보름의 달이 하늘 한 가운데 고고하게 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하늘이 오히려 섬뜩할 지경이었다.
이번에 받은 의뢰의 내용은 간단했다. 새로 지은 전원 주택에 붙은 노인의 혼령을 성불시킬 것. 이 것이 전부였다. 그 이상 어떤 요구도 없었다. 너무도 간단한 내용에 나는 그만 긴장을 풀고 친구의 결혼식에 갔다 그 차림 그대로 이 곳에 일을 하러 왔는데.. 그런데.. 그게 나의 실수였다.
주택에 들어서기 전부터 수 많은 영들이 달려들어 해치우려 했지만 생각보다 영이 잽싸 따라잡으려니 빌어먹을 스타킹과 정장 치마가 거슬려 도저히 마음껏 움직일 수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한둘이 아니라 어림잡아도 대여섯이 사방에서 동시에 덤벼드니 아직까지 현관에도 들어서지 못했다.
대충 짐작하기에 이 집은 실 평수만 해도 200평 정도 되어 보이는 거대한 주택이었다. 가뜩이나 밤이라 건물이 어스름하게 윤곽밖에 보이지 않아 헤매는데 거기다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무언가 자꾸 주위를 맴돌며 나를 치고 도망가니 아주 미칠 지경이었다. 한번은 손을 뻗어 그 형체를 움켜쥐었는데, 뭔가 우득-하며 떨어져 나왔다. 뭔가 하고 손을 봤더니 반쯤 썩어가는 살점이었다. 이건 분명히 누군가 죽은 시체를 이용해서 만든 좀비들이다. 하지만 좀비치곤 너무 재빨라 애를 먹고 있었다.
호우는 내 옆에서 등을 맞대고 어둠을 응시하다 몇 번 뛰어올라 좀비를 물어뜯었는데, 다행히 공격이 먹히긴 했지만 좀비들이 상처 따윈 아랑곳 하지 않고 그대로 재빨리 도망가버려 호우는 잔뜩 약이 오른 상태였다. 약이 오른 호우는 머리부터 꼬리까지 털을 낱낱이 다 곤두세워 옆에 있는 나까지 소름 돋게 만들었다.
“저기.. 호우. 기분은 알겠는데 말이야.. 우리 서로 일 하는데 지장은 주지 않는게 좋지 않을까..아?”
- 시끄럽다.
“어, 그래. 조용히 할게.”
저 녀석이 나를 지켜주는 건지, 내가 저 녀석을 상전으로 모시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다.
손에 붙여둔 부적이 땀에 젖어 눅눅해졌다. 손마다 세 장씩 붙였는데, 하나는 방어용이고 둘은 공격용이었다. 이런 사이비 생활도 접어야 하는데- 생각하지만 생각은 늘 생각에서 그친다.
“아!”
무언가 또 내 등을 할퀴고 지나갔다. 등에 꽂아둔 영총을 꺼내 가만히 숨을 죽이고 허공을 향해 겨눴다.
적막한 어둠. 희미하지만 밝은 달빛과 감각에 의지해 그 놈들의 움직임을 쫓고 있었다.
‘그래, 지금 내 앞에 한 놈 지나갔고.’
‘다른 놈이 내 앞으로 달려오...’
탕탕!!
느낌이 오는 곳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두발 연속으로 쏴서 어깨가 약간 얼얼했지만 제대로 맞춘건지 좀비를 살피러 다가갔다.
“아..안나,”
쓰러진 시체가 나를 불렀다.
“좀비를 쏴야지.. 나를 쏘면 어떡해! 아.. 아파!”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 그리고 죽지 않은 걸로 봐서는 분명히 사람이었다. 얼굴을 보려 했지만 잘 보이지 않아 형화(螢火)부적을 꺼내 발화를 시켰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승우였다.
“승우? 네가 여기 왜 있는 거야?”
“아..아파,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난 니가 온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구.”
그 녀석은 당황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승우라는 이 녀석은 전문 제령사다. 나처럼 이것 저것 다 집적거리며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성불을 못해 한 맺힌 영만 골라서 제령을 시켜주는 전문가이다.
“너도 이 일 의뢰 받은 거야?”
“너랑 나 뿐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현진이 형이랑 유정이도 있어.. 아.. 쓰읍..!!”
고작 신축 건물에 붙은 노인의 영을 성불하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을 부르다니. 뭔가 이상한 예감이다. 현진 오빠도 유정이도 다 어지간한 커리어를 지닌 능력자들이다. 현진 오빠는 박수 무당으로 조상신을 내림 받아 그 분야의 독보적인 존재로 떠오르고 있었고, 유정이는 아직 학생이었지만 양쪽 부모 모두 강한 영력을 지닌 퇴마사였기 때문에 만만치 않은 피를 물려받은 아이였다.
퍽!!!!
승우와 얘기를 하고 있는데 머리 위로 뭔가 묵직한 것이 떨어졌다. 축축하고 습한 느낌에 더듬어 보니 너덜너덜한 좀비의 머릿가죽이었다.
“안나도 온 거야? 너희들 얘기하는 건 좋은데 몸조심은 해야지. 따라와.”
현진오빠가 목 없는 좀비를 발로 쓰러뜨리며 정원을 가로질러갔다.
“호우!!!”
멀찍이서 좀비들을 물어뜯어 곤죽을 만들고 있던 호우를 불러 같이 따라갔다.
가는 길목에는 이미 몸이 으깨진 좀비의 덩어리들이 쿠션처럼 깔려있었다. 밟을 때마다 물컹거리며 살과 피가 튀어서 최대한 안 밟으려 노력했지만 워낙 수가 많이 다 피할 순 없었다. 하이힐의 뒷굽이 푹푹 빠지는 느낌이 정말...윽... 머리가 울렁거리도록 진동하는 피 비린내에 후각이 다 마비될 지경이었다.
현진 오빠가 안내한 곳은 집 옆에 붙어 있는 차고 앞 이었다.
“유정아, 너 좋아하는 안나 언니 왔다.”
“와! 언니!”
나는 쪼르르 달려와 안기려는 유정이를 두 손으로 얼른 막았다.
“옷이 지금 피범벅이야. 나중에 안아줄게.”
“이잉...”
심통스런 얼굴을 하며 입술을 불룩 내미는 모습을 보니 귀여워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 얘가 호우구나. 정말 귀엽게 생겼어요!”
호우가 난처한 듯 표정을 찡그렸다. 귀엽다니. 아마 살아있을 때도 저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을 거다.
“모두 알고는 있겠지만, 이 집은 우리가 의뢰 받은 ‘성불시켜야 할 노인’이 살아있을 때 직접 지었는데... 그 노인의 유언이 자기가 죽고 난 후, 자신의 영을 실력이 뛰어난 영능력자들이 성불시키도록 하라고 했다더군.”
“오빠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알죠?”
“너 의뢰 맡으면서 계약서 안 썼어?”
“썼죠.”
“거기에 써 있잖아.”
아차 싶었다. 워낙 큰 거금을 걸어 놓은 의뢰 였는데다 서류마저 두꺼워 대충 살피는 둥 마는 둥 하고 얼른 사인을 했었다.
“그 노인은 우리와 목숨을 담보로 한 게임을 하고 싶다는 말도 남겼어. 그리고 네가 못 본듯해서 하는 말인데. 계약서에는 우리가 여기서 죽어도 사고사로 처리해도 상관없다는 내용도 있었어.”
“네?! 잠깐, 지금 그런 서류에 오빠는 다 알면서도 사인을 했다는 거에요?”
“나도 했어.”
“저도 했어요.”
“뭐? 다들 제정신이야? 그 노인이 우리보다 강한지 약한지는 모르지만, 꼭 그 영만이 우리를 죽인다는 보장은 없잖아! 막말로 영이 아닌 어떤 사람이 앙심 품고 우리한테 총이라도 갈겨대면 어쩔 거야? 순순히 죽을 거야?”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를 빤히 보던 현진 오빠가 침묵을 깨고 말을 꺼냈다.
“안나가 많이 약해졌네. 예전이라면 무서운 거 없이 뛰어들었을 텐데.”
뜨끔했다. 확실히 난 마음이 많이 약해져 있었다. 멋 모르고 이 일에 뛰어들었을 때는 몰랐지만, 얼마 전부터 내 능력의 ‘한계’라는 것과 또 몸이 죽음 직전까지 갈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어보고 나니 겁이란 것이 생겼다.
“어차피 우리같은 사람들은 모 아니면 도인 인생이야. 우리가 죽을 운명이라 한다면 이 일이 아니더라도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허무할 정도로 쉽게 죽을 수도 있어."
그래. 맞는 말이야.
“...그래요 오빠. 어차피 뛰어든 이상, 이겨야 하지 않겠어요?”
어차피 발을 들인 이상, 당당한 승리자가 되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몸 안에 마치 차가운 피가 돌듯이 마음이 냉정해졌다.
바보같이. 죽자면 자다가도 이유 없이 죽는 거야.
“살아남아서 쓰레기 같은 영을 짓밟으며 비웃어주는 게 우리의 특기잖아.”
오빠는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며 접힌 종이를 꺼냈다.
“자, 이게 주택 1층 구조야. 2층까지 가려 했지만.. 내 힘으론 역부족이었어. 그래서 그냥 대충 눈으로만 빨리 보고 내가 본 대로만 그렸어.”
“형, 근데 1층에 방이 없네요?”
“어. 아무리 둘러봐도 문은 없었어. 있는 건 칸처럼 나뉜.. 뭐랄까, 방이라고 하긴 모호한.. 그런 것들 뿐이었어. 아마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든 거 같아.”
“1층에 뭐가 있었나요?”
“소환된 좀비들이었어. 하지만 그 전의 좀비들과는 다른.. 뭔가 더 날카로운 느낌을 지닌 놈들이었지. 해치우려 했지만 도대체가 죽질 않아서 결국 포기하고 나왔어.”
“그럼 여기 모일 필요도 없었네요. 적에 대한 정보는 없잖아. 고작해야 저 쪽에서 뿌려준 미끼 같은 정보 뿐이고. 가요. 서로 등이나 맞대고 엄호하면서 하나씩 처리하죠.”
“언니.. 무서워요…”
“무서우면 그냥 여기서 못하겠다고 돌아가면 그만이야. 괜히 방해만 될 거라면 그냥 포기해.”
“...여기선 발을 뺄 수 없어. 그 계약서는 인간과 한 게 아니라 마물과 했기 때문에 그냥 돌아가면 평생 쫓기게 될 거야.”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내내 호우는 묵묵히 나를 바라봤다. 나를 보는 저 눈은 깊고 한없이 붉었다. 마치 핏빛을 열 겹은 덧씌운 색깔이다.
“호우. 생각해 봤는데, 너는 가능하면 참견 말고 나를 따라다녀줬으면 좋겠어. 너를 만난 후로 너에게 의지하느라 나는 많이 약해졌어.”
- 하지만 너는 스스로 나약한 존재라는 걸 알고 있을 텐데.
“그래, 알아. 하지만 네가 없을 때 난 늘 나를 극복하며 살았어. 내 페이스를 잃고 싶지 않아.”
- 그래. 네 생각이 그렇다면야.
“고마워.”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장비를 필요한 것만 간단히 챙겨 몸을 최대한 가볍게 했다. 상대가 좀비라고는 하지만 이 곳에 있는 놈들은 너무 재빠르기 때문에 우선은 몸을 가볍게 하는 게 우선이었다. 현진 오빠는 박수 무당답게 부적과 금줄 위주로 챙겼고, 유정이는 아직 신체적으로 맞설 능력이 별로 없어 뒤에서 우리를 위해 호령(護靈)을 불러주기로 했다. 승우는 작은 영방(靈棒)을 들었다. 영방은 승우가 스스로 만든 무기인데, 평소에는 한 자 가량의 길이 이지만 승우가 기를 모아 영방을 휘두르면 주변에 떠돌던 영들이 영방으로 빨려들어와 그 영들로 길이가 길어지면서 영력을 갖게 되는 무기이다. 그리고 나는 손에 붙인 부적을 가다듬고 영총과 여분의 탄창 두 개를 치마 허리에 끼우고 나서 혹시 몰라서 양쪽 발목에도 부적을 붙이고 형화부적도 여러 장 챙겼다.
고요하다.
바닥에는 핏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고, 밤은 이미 깊은 새벽으로 들어서 이상하게 밝은 느낌을 주었다.
“오빠.”
“응?”
“배수진이 왜 승리 했는 줄 알아요?”
“물러설 곳이 없어서 죽기 살기로 싸워 승리한 거 아냐?”
“맞아요.”
저편의 바닥에 뭔가 꿈틀했다. 나는 순간 반사 신경으로 그 곳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뭐였는지 보려고 형화부적을 발화시켰다. 죽어있는 건 눈을 제대로 맞은 한 마리의 개였다.
“꺄악!”
유정이 그 모습을 보고 처참함에 소리를 질렀다.
“너! 뭐 하나 죽일 때마다 일일이 소리 지르며 다닐 거야?!”
나는 싸늘하게 유정을 봤다.
“아예 살려달라고 소리지르지 그래?”
"어..언니.."
나의 말에 유정이는 울먹이는 얼굴로 내 얼굴을 쳐다봤다. 지금 내 신경은 잔뜩 날카로워져 있어서 제 멋대로 독설이 튀어 나왔다.
“상황 판단을 좀 해. 언제라도 방해되면 너부터 죽여버릴 거야.”
“안나, 좀 심하잖아.”
“승우 너도 마찬가지야. 입 닥..”
말을 끝내기도 전에 승우의 뒤편에서 커다란 형체가 튀어나와 우리를 향해 덤벼들었다.
현진 오빠와 나는 잽싸게 뛰어 그 형체를 공격했다. 몇 차례 공격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형체는 힘이 줄질 않았다. 게다가 얼굴이나 몸이나 다 콜타르에 녹은 것처럼 검고 형체가 모호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뛰어! 우선 집 안으로 들어가!”
정원에 곧게 나 있는 돌길을 따라 현관으로 들어섰다. 문은 열려있는 상태였고 우리가 현관까지 도착하자 그 때까지 우리를 집요하게 쫓아오던 형체는 바로 멈춰서서 그 앞에 앉아버렸다. 마치 우리를 빨리 집 안으로 몰고 가려는 움직임 같다는 의심이 들었다. 우리는 서로 눈을 잠시 마주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형화부적 덕에 집 안은 제법 환하게 윤곽이 다 드러나 보였다. 입구를 중심으로 거실처럼 보이는 넓은 공간이 있었고 그 양 옆으로 칸막이뿐인 ‘방 같지 않은 방’들이 있었다. 이상한 건 그 모양이 육각이라는 점이었다. 두 면만 뚫린 채 나머지 방향만 칸막이로 모양을 만든 뭔가 많이 기묘해 보이는 방이었다.
따각... 따각... 따각...
구두굽이 대리석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 나는 방향을 보니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이 있었다. 1층은 무시하고 그냥 올라가려는데 사람 형체를 한 몇 몇이 계단을 따라 내려왔다.
계단을 따라 내려온 건 사람이었다.
사실 사람이라는 확신은 없지만 외형상으로는 사람이었다. 정확히 네 명만이 내려온 걸로 봐서는 그 노인은 계획적인 게임을 만든 것 같았다. 그 넷은 우리를 훑어보더니 만족한 미소를 짓고 서서히 다가왔다. 옆에서 가만히 있던 승우가 팔을 빙빙 돌리며 영을 모아 영방을 키워 먼저 덤벼들었다.
펑!
승우가 그 중 한 놈의 팔을 내리쳤다. 그리고는 연속해서 머리와 명치를 찔렀으나 그 놈은 별 감흥이 없다는 표정으로 승우를 봤을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합세하려는데 다른 놈들이 하나씩 우리를 공격해왔다.
“카앗!!!”
내 앞의 놈이 내려친 주먹을 막는데 양쪽 팔이 다 부러지는 줄 알았다. 영총을 쥐고 머리를 쐈으나 구멍만 남을 뿐 머리는 그래도 붙어 있었다. 다시 한번 쏘려는데 그 놈이 내 팔을 잡아 뜯어 내렸다. 퍽 소리와 함께 몸이 한 바퀴 굴러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 상처를 흘끗 봤는데 왼팔에 저 놈의 손가락 모양대로 살이 패여 떨어져나갔다.
“너, 숙녀에게 정말 매너가 없구나?!”
나는 몸을 피하며 치맛자락을 뜯었다. 피가 말라 붙어 있어서 미끄러지지 않고 쉽게 찢어졌다.
“어서 죽어버려!”
발을 올려 으득 소리가 나도록 턱을 걷어찼다. 부적의 힘인지 몸이 뒤로 밀린 그 놈은 약간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이 때를 틈 타 양 손의 기를 모아 한 번 더 공격을 하려 했는데 살이 패인 곳에 피가 엄청나게 쏟아져 부적이 자꾸 떨어지고 있었다.
“아, 제길.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그냥 발로 걷어 차면서 밟아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다시 그 놈을 향해 몸을 돌렸는데 얼굴이 심상치가 않았다.
‘칼 눈?’
그 놈은 내 팔을 보더니 눈빛이 달라졌다. 갑자기 앞뒤를 안 가리며 달려들었다. 엄청난 완력에 밀린 나는 아까의 육각 방을 생각해 내고는 그 곳으로 들어갔다. 좁은 곳에 등을 대고 싸우면 한결 수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였다.
무작정 뛰어 방으로 들어갔다. 일단 등이 벽에 붙으니 약간 안심이 되었다. 다음 공격을 위해 기를 모으려는데 갑자기 다리가 후들거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일어나려 했지만 자꾸 몸이 쳐지면서 누군가 위에서 누르는 기분이 들었다. 불현듯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손에서 자꾸 떨어지려 하는 부적을 떼어 칸막이 앞에 붙여 결계를 쳤다. 오래는 아니어도 몇 분은 버텨줄 것이다. 그리고 바닥을 보았다. 그냥 평범한 마루바닥이었다. 하지만 뭔가 확실히 이상하다. 벽과 바닥이 맞닿는 부분을 다 손으로 긁어 틈을 찾았지만 발견할 순 없었다.
‘후, 힘은 아낄려고 했는데.’
나는 왼발에 기를 모아 바닥을 내리쳤다.
우지끈!!!!
예상대로 마루는 얇았고 안은 흙으로 꽉 차 있었다.
“으윽”
고약한 썩은 냄새가 풍겼다. 고양이인지 토끼인지 아니면 작은 개인지 알 수 없는 사체가 거의 다 썩어들어 흙과 섞여 있었다. 뜯긴 구멍을 중심으로 마루를 뜯어냈다. 방금 본 그런 작은 동물의 시체가 여러 마리 있었고 그걸 들추니 피에 절은 종이가 있었다.
종이를 들어 대충 흔들어 흙을 털어내고 펴보니, 예상한대로 저주진(詛呪陣)이 그려져 있었다.
어쩐지 방 모양이 완벽한 육각형이라는 게 이상했어. 이 노망난 늙은이 같으니. 정말 우리를 죽일 참인 거다.
찢어버리려 했지만 잘 찢겨지지가 않았다.
“주제에 지금 같지도 않은 쓰레기가 붙어서 나를 방해해?”
홧김에 영총으로 저주진의 한 가운데를 쏴 뚫었다. 말캉한 젤리 같은 물체가 저주진에서 떨어져 흙 바닥 사이로 비집고 도망갔다.
“어딜!”
발을 들어 그 물체를 짓이기자 약간의 반항을 하더니 이내 곧 터져 흙에 모두 흡수되고 말았다.
저주진을 처리하고 나는 결계가 깨지기 전에 모든 신경을 모아 죽을 힘을 다해 기를 모았다.
갑자기 단전에 힘이 들어가며 무언가 쑥, 하고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응?’
여느 때와는 다른 생소한 느낌이었다. 뭐가 들어온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순간 내 영기가 치솟아 갑자기 온 몸이 따듯해졌다. 여하튼, 지금 이게 뭔지 생각 할 겨를이 없었다.
“자, 다시 해보자구.”
나는 호기롭게 부적을 뜯고 나갔다.
퍼억!!!
나가자마자 둔탁한 것이 머리를 내려치는 바람에 바닥에 뒹굴었다. 중심을 잡고 보니 아까 그 놈이 내내 방 앞에서 기다린 모양이었다. 그 놈은 가느다란 칼 눈으로 나를 흘끔거리며 내 팔을 뜯은 손가락을 핥고 발로 나를 걷어찼다.
“우욱!”
하필 재수없게 얼마 전 치료를 끝내 막 아문 상처를 쳤다. 잇새로 뭉친 피가 터져 나왔다.
“빌어먹을.. 그래, 죽일테면 죽여봐!”
나는 너무 화가 나 아픔도 잊고 일어나 공격을 하려 손을 들었다.
손을 들자 내 몸의 기가 순식간에 손으로 모여 작은 파장을 만들었다. 나는 순간 깜짝 놀랐다.
‘이, 이게 뭐야?!’
놀랐지만 계속 놀랄 여유가 없어 그냥 손으로 그 놈의 공격을 막아냈다. 아까처럼 아프지 않았다. 시험 삼아 오른 발로 기운을 몰아 보았다. 시원스레 기운이 흘러 발을 동그랗게 둘러 싸 파장을 만들어냈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로 발을 들어 그 놈의 턱을 날렸다.
퍼억!!
둔탁하지만 시원한 소리와 함께 그 놈의 머리가 날아갔다. 구석에서 몸을 숙이고 나를 보던 호우가 이 광경을 보고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정작 놀란 것은 나였다.
‘어, 어라?’
다시 한번 발로 가슴께 부근을 걷어찼다. 그러자 그 부분이 조각조각 부서져 흩어졌다.
얼결에 그 놈을 처리한 나는 급히 다른 사람들을 찾으러 갔다.
“현진 오빠! 승우야! 유정아!”
쓰러져 있는 한 놈을 딛고 현진 오빠가 나왔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 쓴 오빠는 손으로 슥슥 얼굴을 닦아내고 있었다.
“안나는 살아 있구나. 다행이다.”
“뭐..? 안나는? 그게 무슨 말이야?”
“...유정이는 죽었어.”
그 말을 듣고 각 방을 다 뒤졌다. 바로 옆 방에서는 거의 초 죽음이 된 승우가 있었고 그 건너편에 유정이 죽어있었다.
“유, 유정아?”
온 몸이 벌집처럼 구멍이 뚫린 채, 유정이는 힘 없이 쓰러져 있었다.
“유정아? 유정아?”
손으로 아무리 뺨을 쳐 봐도 유정이는 의식이 없었다.
“소용없어.. 완전히 숨이 끊어졌으니까..”
“유정아!! 유정아!!”
“시체 붙들고 울지 말고.. 걔 혼이나 찾아봐.. 아까부터 안보여.. 다른 이상한 놈한테 먹히기 전에 말야. “
갑자기 머리가 너무 멍했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 하얀 백지장 같았다.
- 안나.
“미안해 호우. 지금은 유정이를 먼저 찾아야 해.”
- 안나!!
“내가 걔한테 마지막 한 말이..언제라도 방해되면 죽여버릴 거라는 말이었어. 혼이라도 찾아줘야 해..난.!!.”
- 안나!! 나는 유정이의 혼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어.
의외의 말에 내 눈은 동그랗게 커졌다.
- 유정이라는 아이는 네 안에 있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아이의 결정체가 있을 뿐이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그 혼이 나에게로 들어올 수 있어?
- 유정이 죽을 때, 때마침 기를 모으던 너에게 빨려 왔을 뿐이야.
아..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렇게 쉽게 들어올 수 있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아는 제령 지식을 총 동원해 그 이유를 찾는데, 갑자기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 이번에 보니 안나는 영매(靈媒)에 소질이 있었다.
- 이번에 보니 안나는 영매(靈媒)에 소질이 있었다.
- 이번에 보니 안나는 영매(靈媒)에 소질이 있었다.
.
.
.
“내, 내가 영매자 였어? 그래서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도 모르게 받아들인 거야? 그런 거야?”
- 엄밀히 말하면 완벽한 영매자는 아니다.
“그래? 그래, ...그래...그래, 그런거야? 그래?”
- 정신 차려라.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다.
“그래, 그래, 나중에 마저 생각하자. 지금은 이게 우선이 아니잖아. 그래, 나도 알아.”
애써 감정을 추스리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나를 부르는 승우에게 갔다.
“안나, 나는 지금 몸을 못 움직이겠어.”
“승우야, 너, 너마저 왜 그래!”
“형이랑 둘이 가서 끝을 보고 와.. 기다릴게.”
그렇게 말을 하며 내미는 손에는 영방이 들려 있었다.
“안돼. 난 이거 받을 수 없어.”
“빌려주는 거야. 끝나고 돌려줘.”
고통 중 에서도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는 승우가 안쓰러웠다.
“꼭 이길게.”
이제는 더 이상 돈이 탐나지 않았다. 어떻게든 끝장을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현진 오빠와 나는 별 다른 말 없이 형화부적을 발화시킨 후, 2층으로 올라갔다. 이젠 말이 필요 없는 거다. 그냥 끝을 내자는 마음 뿐이었다.
2층은 다 트여 있었다. 마루의 마감이 깨끗하게 잘 되어 한눈에 고급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마루의 끝에는,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둘이나 남았군.”
우리를 응시하던 노인의 첫마디였다.
“그래도 평생을 들여 만든 작품인데.. 한나절도 못 버티고 죽다니...”
노인은 말을 마치고 고개를 숙인채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을 보고 화를 이기지 못한 현진 오빠가 달려들었다.
“이 개만도 못한!”
달려가 부적을 내려치려는 순간, 현진 오빠의 몸이 퍽 소리와 함께 피를 흩뿌리며 터져버렸다.
"...하나만 남은 거로군... 아무리 영력이 세다 한들, 내 평생의 작품을 대가 없이 쉽게 이길 수는 없지.”
흐뭇하게 웃던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다.
“어디.. 한번 볼까..”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오는 노인에게선 어떤 영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백호에.. 천성적인 퇴마사의 피를 지닌 아이의 혼에.. 게다가 타고난 운까지 좋군.”
내 눈을 가만히 응시하던 노인은 갑자기 호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좋아좋아. 이 정도는 되야 나도 체면이 살지!”
시원스레 웃던 노인이 덥썩 내 손을 잡았다.
“앞으로 잘 부탁하네.”
“뭐?!”
그 말이 끝나자마자 노인의 유령은 신나게 내 그림자에 붙어버렸다. 어떻게 해보려 했지만 막을 새도 없이 그냥 붙어 버렸다.
밖은 동이 터오고 있었고, 나에게 의뢰를 했던 남자가 아래층에서 뒤처리를 하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유일한 생존자시군요.”
“유일하다고요?”
“네.”
그 말에 놀라 허겁지겁 승우를 찾아봤다. 흰 천이 덮인 채 들것에 실려나가고 있었다. 기분이.. 정말이지 더럽다.
저 빌어먹을 노인네 때문에 아까운 사람 셋이 죽었다.
승우가... 영방을 빌려준다고 했는데... 이젠 내가 죽어서야 돌려줄 수 있게 되다니...
*
“그래, 그래서 말이지. 내가 세계 여행을 다니면서 온갖 지식을 습득했는데.. 그걸 써먹으려니 당신들 같은 사람 밖엔 없는 거야. 허허.. 끝에 당신들 둘이 올라왔을 때, 사실 내 등골이 오싹했어. 저런 괴물이 둘이나 있나 싶어서, 근데 다행히 그 사내놈은 죽었잖아? 하긴, 안 죽으면 이상한 거지. 내가 그 괴물들을 만들 때 좀비에다 흡혈귀를 교배해서 새로운 괴물을 창조했거든. 이른바 좀혈!이라는 거야. 어때, 정말 대단하지 않아? 여하튼, 다들 피가 빨리고 터져 죽은 와중에 너만 살아남은 건 정말 신기했어. 역시 넌 운이 좋아. 하지만 말야! 늘 방심하면 안...”
이 노인은 나이를 입으로 먹었는지 말이 엄청나게 많았다. 시끄러워. 시끄러워.
당신은 신날지 몰라도 나는 지금 말이 아니야.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프다고.
- 시끄러워!
호우가 내 마음을 읽었는지 노인에게 고함을 질렀다. 그제사 노인은 입을 다물었다.
하루가 너무 길다.
오늘 나는 결혼식에서 새로 인생을 시작하는 내 친구를 보았고
목숨을 담보로 한 이 노인의 게임에서 세 명의 동료를 잃었다.
하나는 내가 삼켜버렸고,
하나는 나에게 중요한걸 주고 떠났고,
마지막 하나는.. 이미 죽은 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지키려 했다.
자고 싶다. 다 잊고 싶다.
이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그대로 길 위에 쓰러져 버렸다.
“뭐야, 이 아가씨 원래 이렇게 길에서 자? 그럼 곤란한데.. 여자는 말이지, 자고로 찬데서 자면 몸이 허...”
- 시끄럽다고 했다.
뭔가 포근한 게 나를 덮었다. 호우. 그래, 호우구나.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이 날 쓰러진 후로 일주일간 죽은 듯이 잤다고 한다.
호우에게 전해들은 은수가 나를 끌고 집에 데려 가느라 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잠에서 깨어난 날부터 나는 그 전과는 다른 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