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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산이다.
게시물ID : phil_693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탄트라
추천 : 0
조회수 : 401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3/10/04 14:18:14
보통 동서양을 막론하고 철학이라는 것을 처음 접할때 느끼는 혼란감은 플라톤이 말했던, 이데아의 개념부터 시작할 것이다.
매우 낯설다.
그리고, 이 개념을 설명할땐 문학책 읽듯 쉽게 읽히지 않는다. 보통 인간들에겐 사뭇 다른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원론은 사실 별거 아니다.
진리,본질 하다못해 천국과 같이...
'인간이 원하는 궁극적인 그 어떤것'은 우리의 실제세계 저 편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종교는 신을 믿으면 거기에 도달한다는 것이고, 철학자는 진리를 밝히면 거기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성철스님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고 주장하는 그 의미는 즉, 일원론적 세계관으로 이원론을 비판한 것이다.

오늘 오유에서 비트겐슈타인이나, 미셀푸코와 같은 언어학자들의 사상이 언급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와 대상....즉,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현실과.. 원래의 대상이나 물질의 본질은 같지 않다는 이원론에 기초한다...

즉, 언어를 최대한 정제화하면 보다더 대상의 본질에 접근하지 않을까? 
이런 궁금증으로 철학이 언어학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지...

그러나,개인적으로 모든 기초학문으로써 모든것을 탐구했던 과거 철학의 지위와 비교한다면...작금의 철학이 이런 언어학에 찌그러져있는 현실은 안타깝기도 하다.

인간은 이성이 있어서, 형이상학적 사고를 할 수 있고 또는 세상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독특한 지위에 있기 때문에 동물은 하찮은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그 근본적 바탕에 이런 이원론이 숨겨져 있다.
마찬가지로, 천국을 향해 노력한다는 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인간들은 미개하고, 그들을 깨우쳐줘야 한다는 논리로 발전하게 된다.
폭력이란,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행위라는 간단한 정의에 의거하면 둘다 폭력적 행위이다.

삶의 본질, 세상의 법칙을 알기위해 노력하는 철학자들의 수고를 (미개한)일반인들은 미개하기 때문에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애초에 이 이원론자체가 참과 거짓중 과연 참이냐부터 알아봐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원론은 반증가능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만 알고가자...

그리고, '사실'이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실이란 그 자체로 진리다.
예를 들어 어제 코스피가 얼마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우리집 강아지가 아침에 밥을 먹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하늘의 별이 반짝였다...즉, 그 별에서 출발한 광자가 내 눈안으로 들어왔다..
이것은 사실이고 그 자체로 우주라는 거대한 역사앞에 객관적으로 기록될 사건이다. 

진리란 형이상학적, 이원론적, 다른차원에 존재하는게 아니라...그건 있는지 없는지 모르니깐 제껴두고서라도...
지금 내앞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럼, 나와 내앞에 있는 대상과의 간격(그것이 공간을 넘는 의미를 가졌더라도)에 의해 대상은 왜곡되고, 본질은 감추어지거나...애초에 내앞의 본질을 오롯이 이해하지 못할까?

이 이원론은 애초에 반증자체가 불가능하지만...
종교가 과학적 데이터에 의해 그 힘을 잃어가듯...(물론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종교가 없어져도 사람들은 새로운 신...즉 자신의 인지체계를 합리화시킬 편리한 개념을 계속 만들어 낼것이다)
과학적 개념에 의해 이 이원론도 그 힘을 잃어가리라 기대한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그 중 하나다...

세상의 모든 기준은 관찰자인 나자신이다.
그리고, 내 옆을 스쳐가는 친구(관찰대상)가 있다...
내가 그 친구를 인식하는 것은 특정한 공간좌표와 특정한 시간으로 기록할 수 있다...
그러나, 빛이라고 하는 나와 친구를 매개시켜주는 인식도구의 속성을 알게된다면...
나와 친구사이의 거리와 속도에 의해 내가 그 친구를 인식했을 때, 그 친구는 아주 미미한 움직임 일지라도 이미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충분히인식 할수 있다.

즉, 굳이 이원론적 개념으로 산은 산이 아니고, 친구는 친구가 아니다라고 얘기할 필요가 없다...
즉, 상대성 원리만 안다면...친구가 안드로메다에 있어도, 내가 친구의 전파를 수신하는 그때에 친구의 상태를 이해할 수 있다.
나와 대상사이의 매개체로써 빛은 한계가 있는게 아니라...원리가 숨겨져 있던 것이지...

철학자들의 고민도 이런식의 고민이다.
우리는 대상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는가?
그 대상을 파악하는 매개체로써의 언어(위에서 말한 빛처럼)는 분명 중요하지만... 그 언어의 한계에 의해 대상의 본질에는 접근하지 못할것이라는 것 역시 성급한 불가지론을 외치는 것이거나, 이원론적 고정관념 일 수 있다.

현대철학이 이 언어학에 '찌그러졌다'... 즉 수축되고 위축된 이유를 짐작할만하다...
이 언어학은 기존의 이원론적 관념으로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을 펼쳐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이 이것에 안주한다면 철학의 미래는 명료한 일원론적 과학앞에 점점 그 설자리를 잃을수도 있다.

이원론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정신분석학도 기본적으로 이원론이다.
무의식과 의식이라는 구조...
무의식은 자각하지 못하고, 의식은 자각한다..
그러나, 정신분석이 기존의 철학과 다른 것은... 그 무의식도 알 수 있다고 하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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