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 있을때. 비번이라는 말은 회사원들만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인줄만 알다가 그것이 군인에게도 사용되는 엄청나게 즐거운 단어라는걸 깨달았었다.
대공초소로 초병근무를 나가는 것은 여름이고 겨울이고 미칠 노릇이다. 막사 뒤 산 위로 몇백미터를 기어올라가면 여름은 더위와 모기가. 겨울엔 살인적인 추위가 괴롭혀대니 말이지. 비번이 돌아오는 것 만큼 군대에서 즐거운 일들을 찾을 수 있을지. 그때부터 내 머리속에 드는 쓸데없는 의문은 다음과 같았다.
'비번을 한자로는 뭐라고 쓸까?'
'비번이 한자인가? 비어있는 번호. 비어있는 순서. 이런 뜻에서 대강 나온 말 아닌가?'
병장휴가를 나가서 친구를 찾으러 학교 도서관에 갔을때였다. 갑자기 비번에 대한 생각이 떠올라 내 머리통만한 두께의 국어사전을(엄청난 두께였겠다고?;; ) 뒤져봤는데 6천페이지가 넘는 그 사전에 `비번`이라는 단어가 없는 것이 아닌가.
이상하다 싶어서 설마 하는 마음에 영어사전을 뒤져본 결과는 놀라울 따름이었다.
-Bee Burn: (영어로;; ) 특정 일자에 업무가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
아니 이게 어떻게 영어일 수가 있지?
친구를 찾아야 한다는 목적은 사라진채 드넓은 건대 도서관(꽤 크다구;; )의 가능성 있는 자료를 전부 뒤지기 시작했다. 대체 왜 비번이 Bee Burn이며 어떻게 유래된 말인지 너무도 궁금해서. 드디어 찾아낸 자료에서 알아낸 그 유래는 '오...그렇단 말인가!!'라는 감탄사를 수십번 뱉을 만한 것이었다.
누구나 알다시피 벌들은 집단생활을 한다. 하루종일 쉴새없이 꽃의 꿀과 화분(花粉)을 옮기는 벌들은 태양이 떠있는 동안에는 그 활동을 멈추지 않는다. 사람들은 흔히 부지런한 생명체에 벌과 개미를 들곤 하지만 여기에 벌을 포함하면서도 인간은 슬픈 벌들의 사연을 모르고 있다.
벌은 태생적으로 체내에서 젤라토닉마그네슘화인 이라는 물질을 분비한다. 마그네슘은 물에 닿으면 발화 비슷한 현상을 일으키고 인은 공기중에서 발화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잘 알고 있을 터. 그 두가지 성분이 특이하게 조합된 이 물질은 벌의 체내를 흐르는 체액의 온도가 일정한 점을 유지또는 하회하는 상태에서만 아무 이상을 일으키지 않는다.
벌의 생체 순환기는 상당히 단순하여, 계속해서 날개를 움직이고, 몸을 움직이는 상태에서는 (마치 엔진의 수냉식 냉각장치처럼) 일정 온도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벌이 움직이지 않을때는 그 냉각장치도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여 대기의 온도와 비슷한 수준으로 벌의 체온은 오르거나 떨어진다.
다행히 밤이 되어 벌이 활동하지 않는 시간에는 대기의 온도가 낮보다 훨씬 낮기에 젤라토닉마그네슘화인은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대기의 온도가 올라가는 여름의 낮과 같은 경우, 벌이 계속해서 움직여주지 않으면 체내의 온도가 급상승하여 젤라토닉마그네슘화인이 체온에 반응하고,
벌은 그자리에서 자기 몸속의 발화로 인해 타죽어버린다. 실제로 벌이 저 화학반응으로 인해 죽을때를 적외선 카메라로 촬영해보면 희미한 불꽃이 일어난다고 하며, 어릴때부터 죽은 벌 중에 속이 텅텅 빈 놈을 많이 본 것 같기도 하다.
벌도 생명체. 힘이 떨어지면 자연히 움직일 수 없고, 계속해서 바쁘게 일하는 동료와는 달리 쉬어야만 하겠지만. ....그 휴식은 잠시가 아닌 그 벌에게는 영원한 휴식이 되는 것이다.
Bee Burn.......벌이 탄다...
산업혁명기는 노동자들이 휴식을 거의 꿈도 꿀 수 없을만큼 바쁜시기였고, 그때 쉬는 날이 있다는 것은 그의 실직을 의미했다고 한다. 자신의 옆에서 항상 일하던 동료가 어느날 보이지 않을때 고용주에게 그의 행방을 물으면 고용주는 밉살스럽게도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Bee burn.'
지금이야 한번 타오른 후 끝나는게 아니라 푹 쉰 후 다음날 또 출근하는.....오히려 좋은 단어가 되어버렸지만 실제의 비번은 죽을때까지 움직여야만 하는 벌의 슬픈 숙명을 등에 업은 끔찍한 단어인 것이다.
우리 역시도 burning하지 않기 위해 끝까지 일을 해야만 하는 작은 존재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