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병훈, 압화, 아파
압화를 본다
눌림꽃이 되던 그 순간을 생각한다
자신을 뭉개지 않고는 피어날 수 없는 꽃
압화, 하고 소리내어 보면
아파가 된다
그도 나의 눌림꽃이었을까
나는 누군가의 눌림꽃이었을까
가슴 눌려보지 않은 사랑은
꽃으로 피어날 수 없다
누군가의 영원한 꽃이 되기 위해서
꽃은 절정의 순간에 자기 몸을 던진다
정채봉, 내 마음 나한테 없을 때가 많다
내 마음은 나한테 없을 때가 많다
거기 가면 안 된다고 타이르는 데도
어느 새 거기에 가 있곤 한다
이제 내 마음은 완전히 너한테 있다
네가 머무르는 곳 마다에 내 마음 또한 틀림없이 있다
너는 내 마음의 고삐인 것이다
네가 자갈길을 걸으며 내 마음도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질 때가 많을 것이다
네가 가시밭 길에 들면 내 마음도 가시 밭에서 방황할 것이다
너는 나를 위해서라도 푸른 풀밭사이로
맑은 시내가 흐르는 거기에 싱싱한 풀꽃처럼 있어야 한다
너는 내 마음의 고삐다
잊지 말아야 한다
최승자, 부끄러움
그대 익숙한 슬픔의 외투를 걸치고
한 낮의 햇빛 속을 걸어갈때에
그대를 가로막는 부끄러움은
떨리는 그대의 잠 속에서
갈증난 꽃잎으로 타들어가고
그대와 내가 온 밤내 뒹굴어도
그대 뼈속에 비가 내리는데
그대 부끄러움의 머리칼
어둠의 발바닥을 돌아 마주치는 것은
무엇인가
나해철, 그리운 이에게
사랑한다고 말할걸
오랜 시간이 흘러가 버렸어도
그리움은 가슴 깊이 맺혀
금강석이 되었다고 말할걸
이토록 외롭고 덧없이
홀로 선 벼랑 위에서 흔들릴 줄 알았더라면
내 잊지 못한다는 한 마디 들려줄 걸
혹여 뒤돌아 오는 등 뒤로
차고 스산한 바람이 떠밀려
가슴을 후비었을지라도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사람이
꽃같이 남아 있다고 고백할걸
고운 사람에게
그리운 사람에게
정호승, 너에게
가을 비 오는 날
나는 너의 우산이 되고 싶었다
너의 빈 손을 잡고
가을 비 내리는 들길을 걸으며
나는 한 송이
너의 들국화를 피우고 싶었다
오직 살아야 한다고
바람 부는 곳으로 쓰러져야
쓰러지지 않는다고
차가운 담벼락에 기대 서서
홀로 울던 너의 흰 그림자
낙엽은 썩어서 너에게로 가고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하다는데
너는 지금 어느 곳
어느 사막 위를 걷고 있는가
나는 오늘도
바람 부는 들녁에 서서
사라지지 않는
너의 수평선이 되고 싶었다
사막 위에 피어난 들꽃이 되어
나는 너의 천국이 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