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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수가 연예인 뽑는 안목이 남다른 이유가 보이는 기사
게시물ID : star_6939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라랄라랄라
추천 : 1
조회수 : 71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8/01 18:20:33

요약은 따로 표시해뒀음

 

출처 : http://news.sportsseoul.com/read/life/649290.htm?imgPath=life/social/2009/0119/

 

[파워인터뷰-미다스의 손] 엠넷미디어 김광수 "영원한 매니저"

.

프로필

●1985년 가수 인순이 매니저
●1988년 GM기획 설립
●1998년 가수 조성모 매니저
●2005년 포이보스 대주주
●2006년 엠넷미디어 제작본부장

 

국내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논할 때 이 사람만은 절대로 빼놓을 수 없다.

1981년 KBS ‘젊음의 행진’ 백댄서 시절을 거쳐 85년 가수 인순이 로드 매니저로 입문해

김완선. 이의정. 구본승. 윤상. 황신혜. 이미연. 조성모 등을 당대 최고의 스타로 만들었으며

지금은 이효리. 송승헌. 이범수. 옥주현. SG워너비. 씨야 등의 매니지먼트를 총괄하는 엠넷미디어 김광수(48) 제작본부장.

그의 삶은 부침이 심한 연예계만큼이나 굴곡도 많고 파란도 많았다. 2000년대 초반 조성모를 발굴해 1000만 장 이상의 앨범을 판매했고

이미연을 내세운 편집 음반 ‘연가’를 빅히트시켜 가요계를 뒤흔들기도 했지만.

두 차례 PD 사건에 연루되면서 단칸 지하방을 전전하는 쓴맛을 보기도 했다.

음반 제작으로 잔뼈가 굵은 그는 지난해부터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지난 여름 호러 영화 ‘고사:피의 중간고사’를 제작해 100% 이상의 수익을 거뒀으며 190억 원을 들인 MBC 월화극

‘에덴의 동쪽’은 30%대에 이르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내년 봄에는 세계 시장에 통할 수 있는 창작 뮤지컬을 무대에 올릴 계획이다.

지난 28년간 한 번도 여름휴가를 간 적이 없다는 ‘워커홀릭’ 싱글남 김광수 본부장을 만났다.

 

 

 

 

-지난해 영화 ‘고사’가 흥행에 성공한 것은 국내 영화계에 적잖은 충격과 여러 시사점을 던져준 것 같습니다.

 

정확하게 말해 ‘고사’는 마케팅 비용을 포함해 23억 원이 들었고 순수익이 25억 원이었습니다.

이번에 권상우 이보영 이범수가 출연하는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는 제작비가 30억 원입니다.

손익분기점이 60만 명이지요. 일반적으로 국내 영화계는 배급사나 투자사가 100% 자금을 대고.

작품이 흥행하면 제작자와 50%씩 나눠 먹는 구조지요. 하지만. 저는 70%가량 내 돈을 투자하고 외부에서 30%밖에 받지 않습니다.

제 돈이 들었으니까 제작에 들어가는 돈을 최대한 아낄 수밖에요.

대신 손익분기점을 넘겨 수익이 발생하면 출연배우 및 스태프와 골고루 나눠 먹는 방식을 취했지요.

‘고사’의 촬영 기간은 두 달이 채 안 됩니다. 보통 영화 한 편에 3~4개월 걸리는 것에 비하면 파격적이었죠.

배우들의 출연료도 최대한 깎고. 러닝 개런티를 제안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작비를 줄였으니 당연히 손익분기점도 낮아졌고요.

특히 출연배우들에게 80% 원금 보장할 테니 투자하라고 설득했습니다. 일종의 동기부여를 한 셈이지요.

순전히 남의 돈 갖고 만드는 게 아니라 내 돈이 들어갔거나 내 작품이라면 더 많은 노력과 더 좋은 효력이 나타나는 법이니까요.

 

 

 

 

-한류가 예전 같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대다수 외주제작사가 한류스타를 잡으려고 안달입니다.

‘에덴의 동쪽’도 송승헌이 출연하지 않았습니까?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에덴의 동쪽’은 송승헌 덕분에 일본에서 50억 원에 미리 사갔습니다.

오는 4월쯤 50부작으로 일본 지상파 방송사에서 소개될 겁니다. 그것도 골든 타임에요.

현재 ‘에덴의 동쪽’ 제작비가 오버해 20억~25억가량 적자인데 걱정하지 않습니다.

일본에서 DVD. MD상품.화보.OST 등을 팔면 훨씬 많은 이익이 날 테니까요. SG워너비가 부른 OST로 이미 15억원을 벌었습니다.

음반 제작을 주로 한 제가 근래 들어 영화. 드라마에서 잇달아 성공하자 의아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는데요.

과거 30분짜리 뮤직비디오 ‘투헤븐’을 비롯해 KBS 사극 ‘명성황후’

.이효리 주연의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등을 제작해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면서 여러 가지 노하우를 터득했습니다.

 

 

-사실 연예계에서 김광수 하면 ‘미다스의 손’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릅니다. 하는 작품마다 ‘인기 대박’을 터뜨렸는데요. 도대체 비결이 뭡니까?

 

향기나는 꽃에는 벌도 많지만. 벌레도 많습니다. 겉보기에는 하는 족족 성공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패도 많이 했습니다. 왜 ‘상처 난 자리에는 다시 상처가 안 난다’는 말도 있잖습니까.

저는 실수를 할 때마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노력했고. 그 덕분에 실패율을 최소화할 수 있었던 겁니다.

 이런 말을 하면 좀 그렇겠지만. 비결이라면 저는 ‘감’(感)으로 판단합니다.

새 앨범의 경우 노랫말이나 편곡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허밍만 들어보고도 타이틀곡을 정합니다.

솔직히 지금까지 제가 했던 프로젝트 중에서 상당 부분이 즉흥적인 아이디어에서 시작한 것들입니다.

SG워너비는 각자 솔로를 준비하고 있던 친구들인데. 한번 합쳐보면 어떨까 해서 탄생한 그룹이고.

씨야도 여성그룹 가비앤제이가 먼저 나온 것을 보고서 곧바로 결성했지요. 지금 준비 중인 뮤지컬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에서 전쟁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보다가 베트남전을 소재로 한 창작 뮤지컬 ‘천국의 눈물’(가제)을 기획했습니다.

 2001년 이미연 주연의 KBS2 ‘명성황후’도 ‘와호장룡’과 ‘비천무’에서 기획 컨셉트를 잡았고요.

음반 제작자이지만 저는 가요도. 팝송도. 일본 노래도 잘 듣지 않는 편입니다.

커피숍에서 흘러나오는 이름 모를 노래를 듣고 머릿속에 퍼뜩 멜로디 라인과 곡 스타일을 떠올리는 식이지요(웃음).

 

 

-모든 것을 ‘감’에만 의존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저는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 머릿속으로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시뮬레이션을 찬찬히 그려봅니다.

그리고 최종 결정을 합니다. 저의 경우 천부적으로 ‘끓는 피’도 큰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아주 개인적인 얘기인데. 저는 아버지를 모릅니다.

어머니는 그 옛날 동두천에서 술집을 일곱 군데나 운영했던 분입니다.

그곳에서 저는 ‘양색시’들과 어울려 보냈던 아련한 추억을 갖고 있지요. 돌이켜 보면

어머니의 타고난 사업 수완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 같습니다.

 


-그동안 돈도 많이 벌었을 텐데 끊임없이 일에 미쳐 사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게다가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고요.

엔터테인먼트 그룹을 세우는. 그런 꿈은 아예 없습니다. 단지 후배 매니저들에게 표본이 되고 싶습니다.

지금도 저는 해외에 갈 때 직업란에 ‘매니저’라고 씁니다. 누굴 만나도 ‘송승헌 매니저입니다.’ ‘이효리 매니지입니다’라고 소개하지요.

대표 혹은 이사라며 격식 차려서 반듯하게(?) 보이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 일을 그만둘 때까지 ‘영원한 매니저’로 인정받고 싶을 뿐입니다.

정장을 입지 않고 항상 캐주얼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것도 조금이라도 젊은 세대와 교감하면서 트렌드. 현장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좋은 매니저는 최고의 프로모터입니다.

수많은 경험을 통해 익힌 감각과 장사꾼으로서의 수완을 발휘해

배우.감독.스태프들이 조화를 이뤄 열심히 일 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이끌어내는 사람.

그리고 완성된 작품을 대중에게 빠르고 효과적으로 접할 수 있도록 하는 사람이지요.

 


 

-결혼은 언제쯤 하실 생각이십니까.

 

(잠시 뜸을 들이더니) 최근에 7년 동안 사귀었던 연기자와 헤어졌습니다. 내 나이도 있고. 결혼을 원했는데 여자친구는 계속 일하기를 원했습니다.

어느날 그 친구 왈 ‘주부로서 연기하기는 싫다. 주부 연기자가 되기는 싫다’고 하더군요.

밤늦게 혼자 밥 먹는 것도 싫고…. 이제는 정말 결혼하고 싶습니다.

 

 

내 인생 최고의 힘 '조성모'

무려 28년을 연예계에서 버텨낸 그에게 인생 최대의 고비는 언제였을까?
“가장 힘들었을 때라? 1995년 PD사건이 일어났을 때 같네요. 94년 김종찬. 김민우. 윤상. 노영심 등을 할 때였는데. 정말 그때만해도 가요계가 저를 위해 존재하는가 싶었습니다. 강호동이 ‘소나기’로 막 인기를 끌 때 캐럴을 기획했습니다. 하루에 15곡 녹음하고 하루 만에 믹싱 끝내고 출시했는데 20만 장 넘게 팔아치웠으니까요. 그리고 PD사건이 터졌지요. 난 떳떳하다고 생각해 도망도 안 갔는데. 잡혀 들어갔고 이후 저 때문에 몇몇 PD들이 피해를 봤다고 소문이 나면서 3년 동안 일을 못했습니다. 호주머니에 몇만 원도 없어서 후배 매니저 지하셋방에 함께 살았습니다. 극적으로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을 갖게 된 것은 구본승 덕분이었습니다. 구본승이 한창 잘 나갈 무렵 MBC에서 그에게 ‘혼자서 일해보라’고 꼬드겼는데. 구본승이 ‘김광수 사장이랑 일 안 하면 안 하겠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MBC 간부진이 저를 조금씩 다시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시트콤 ‘남자셋 여자셋’의 이의정을 매니지먼트하면서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조성모를 만들었습니다. 조성모는 제2의 인생을 저에게 열어준 스타입니다. 잊을 수 없지요.”

김용습기자 snoopy@

 

 

 

양색시 > 예전에, 미군 병사를 상대로 몸을 파는 여자를 이르던 말.

 

결국 엄마가 창녀로 장사하던 장사수완 배워서 아이돌한테 써먹는다는 말씀

일진안이 괜히 나온게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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