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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또 만나요.
게시물ID : sisa_46325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한솥매니아
추천 : 0
조회수 : 50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12/15 20:24:28

How are you? I’m not fine, and you?

안녕하십니까?” 참으로 익숙하고 반가운 말이다.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 저 말을 한다. 내가 만난 이 사람이 밤새 아무 일 없었는지, 기분은 어떤지, 못 보는 동안 무슨 사고라도 생긴 것은 아닌지 신경 쓰며 안부를 묻는다. 우리가 만나지 않고 있을 때 사람에겐 무언가 평안치 못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항상적 위기의식도 어느 정도 담겨 있지 않나 싶다. 그렇게 우리는 안녕하지 못할 만한 가능성으로 가득한 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서로가 안녕함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이는 단순히 상대의 상태를 걱정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그가 안녕함을 확인함으로써 내 마음의 안녕을 찾고자 하는 욕구의 발로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안녕하냐는 질문에 대해 별로 안녕하지 않소.”라고 대답하는 것은 사실 상당히 무례한 일이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일상적인 대화에서 이런 용법을 쓰지 않는다. 좌중을 웃기고 싶거나, 무례함을 무릅쓰고서라도 상대를 곤란하게 하고 싶을 때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데 최근 이런 식의 용법이 상술한 두 경우가 아닌 형태로 제시되었다. 한 대학생이 동료와 친구들에게 물었다. “전 안녕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안녕하십니까?” 그리고 이 물음은 바로 그 동료와 친구들에게 크나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일어나 대답한다. “저도 안녕하지 않습니다. 다른 여러분은 안녕하십니까?” 마치 죽은 시인의 사회의 마지막 장면처럼, 차례로 일어나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의 존재와 안녕하지 못함을 확인하는 광경은 인상적임을 넘어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지금의 상황에 중심이 되고 있는 발화에서 안녕하십니까?”의 목적은 전도되었다. 일상 대화에서 이 인사의 목적이 상대방의 안녕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었다면, 여기서 우리는 상대방의 안녕하지 않음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나의 안녕하지 않음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 안녕하지 않은 서로의 존재를 목격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바꿔 말하면 만나고자 함이며, 만나지 않고 있을 때 우리에게 쏟아질 수 있었던그리고 실제로 쏟아졌던수많은 안녕하지 못할 가능성을 확인하고자 함이다. 인사말의 목적은 비록 전도되었으나 그 본질은 충실히 이행되고 있다.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서로를 만나고 싶어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차고 넘치지조차 않을 만큼 적절한 한 마디를 던진 이에게 나는 경의를 표하고 싶다.

 

Nice to meet you. Have we met before?

왜 지금 우리는 안녕하지 못할까? 이에 대해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답을 내놓아 대자보로 붙이고 있고, 분명 그 각각의 대자보에는 글쓴이들이 가진 자신만의 정답이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 바로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안녕하지 못하다는 선언을 하지는 않고자 한다. 대신 나는 이렇게 묻고자 한다. “왜 지금 우리는 서로의 안녕하지 못함을 확인하고 싶어 할까? 왜 지금 우리는 그토록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일까?”

모든 2차적인 조건들을 제외하고 가장 단순한 인과관계로 보면 답은 간단하다. 우리가 지금 그토록 서로를 만나고 싶어 하는 까닭은 우리가 서로를 결코 만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마주치지만’, 그 중에서 우리가 만날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마주침은 지나침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서로 마주친 사람들은 상대방의 존재를 마음속에 남기지 않고 무심히 지나쳐 간다. 하지만 만남이란 존재의 확인이다. 네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너를 둘러싼 현실은 무엇인지, 그것에 대해 네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새기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는 서로를 결코 만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얘기하면 어떤 사람들은 대단히 낭만적인 얘기라고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진정한 이해, 고슴도치의 딜레마……. 물론 그런 얘기가 필요한 부분도 있겠지만, 지금 이 글에선 그런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이고 사적인 밀접한 관계라는 것이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 사이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 역시 나이를 앞으로든 뒤로든 어느 정도 먹어서 그런지 대강 알고 있다. 여기서 하고자 하는 말은, 이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서로의 존재를 자기 멋대로나마 확신할 수 있게 만드는 사회적 틀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근대 정치사회는 넓은 범위의 불특정 다수가 서로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도 하나의 덩어리를 이룰 수 있게 만듦으로써 창출되었다. 배밭골 서당나무집 김 가와 같은 마을 훈장 어르신 조 생원의 관계가 아니라,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 나와 같은 교육을 받고 비슷한 환경에서 같은 권력에 복종하는 사람들 간의 관계가 망을 이루는 것이 근대 정치사회의 기초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람들의 덩어리를 누군가는 인민이라 하고, 누군가는 국민이라 하며, 누군가는 시민이라 한다. 여기서 서로 생면부지인 사람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게 만들어 주기 위해선 일정한 틀이 필요한데, 그것이 위에서 말한 분명 나와 같은~’에 들어가는 부분이기도 하고, 또 덩어리에 붙이는 서로 다른 이름들의 차이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러한 틀을 통해 물리적으로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난다. 이름도 모르는 그 누군가는 일단 분명 한국인일 것이고, 한국 사회가 제공하는 밥벌이 중 하나를 수행하고 있을 것이며, 한국 정부를 선출할 권리를 가지는 대신 그 정부가 부과하는 의무를 다하고 있을 것이고, 한국의 표준적인 교육과정을 거쳐 와 그로부터 자신의 생각을 도출해 내고 있을 것이다.

이 틀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은 다시 말해 우리 사회 전체의 기초가 흔들리고 있음을 뜻한다. 한국 사회가 제공하는 밥벌이는 너무나도 불안정해지고 양쪽으로 갈라져 서로의 현실이 무엇일지, 어떻게 변할지 예측할 수 없다. 한국 정부를 선출할 권리는 모욕당하고 무의미해졌으며, 그 정부가 부과하는 의무는 비상식적이고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국의 표준적인 교육과정은 더 이상 생각의 기준으로서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근대인인 우리는 전근대인인 김 가와 조 생원보다도 더 고독하며 무력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서로를 만나지 못한 채, 근대적 대중도 아니고 전근대적 신민도 아닌, 홀로 남겨진 자연인이 되는 것이다. 하나의 5천만이 아닌 5천만의 하나가 된 것이 바로 지금의 현실이다(물론 단 한 번이라도 5천만의 하나였던 적이 있었는가, 그럴 수 있었던 적이라도 있었는가에 대해선 물음표를 던진다). 강제적으로 자연인이 된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인이기에, 그 고독을 참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서로를 만나기 위해 일어선 것이다.

고독은 지금 우리를 자극한 여러 부조리들과 결코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 부조리들이 우리를 고독하게 만드는 것들이며, 우리를 고독하게 만들어 왔던 것들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저들은 우리가 함께우리의 미래를 만들기 위해 던진 권리에 악플과 알바의 독을 풀었으며, 결연하게 일어선 우리 중 누군가에게 종북이라는 타자(他者)의 베일을 씌웠고, ‘우리 모두가사용해야 할 것들을 우리가 아닌 누군가에게 팔아넘기려 하고 있다. 심지어 그들은 앞으로 우리를 재생산해 나가는 데 사용될 것들인 언론과 교과서에도 진흙덩어리를 던져대고 있다. 우리는 추상적이고 심리적인 인간 본성의 한계에 의해 고독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분할의 과정을 통해 고독해진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의 만나고자 하는 욕구는 급진적이다. 서로를 확인할 수 있는 틀이 없어졌기에 우리가 실제로 만나 그 틀을 다시 세우고자 하는 것은, 그 틀을 파괴하거나 전유하고 있던 누군가의 계획을 지금 여기서는 물론이고 향후 어디서든 부정하고 배제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투쟁해야 한다. 우리가 지금 함께 느끼고 있는 이 만남의 욕구가 가진 근원이 그것을 우리에게 명령한다. 투쟁나는 지금 이 단어를 굉장히 의식적으로 사용한다. 한편으로는 저들의 분할 논리를 여전히 두려워하는 당신의 불편함에 띄우는 물수제비로써,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만남이 반드시 저 구체적인 분할의 과정을 실질적으로 저지할 수 있는 움직임이어야 한다는 호소로써 나는 투쟁을 말하고자 한다.

 

Good bye. See you again!

우리의 만남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움직임의 구체적인 진행 과정과 방향에 대해서는 그리 할 말이 많지 않고, 따라서 이 글도 어느 정도는 일반론에 그치는 글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아마 앞으로 저들의 획책에 대해 싸우는 만큼 우리끼리 싸울 것이고, 또한 딱 그만큼만 저들과 싸울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무엇이어야 하는가, 어떻게 우리로 남을 수 있고 남아야만 하는가에 대한 격렬한 고민이 없이 우리를 해체하고자 하는 자들과 싸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고민과 논쟁은 이 만남에 참여하는 사람들 각자의 몫이다.

다만 일반론적이나마 한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자 한다.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안녕하십니까?”를 물으며 일어났다. 하지만 모든 만남은 헤어짐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정치적 근대인인 동시에 생물학적 자연인이며, 분명 언젠가는 각자의 생활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개중에는 큰 뜻을 품고 저 두 기준을 일치시키고자 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대다수는 다시 집으로, 시험장으로, 밥벌이터로 돌아가야 한다. 이 때 우리는 뭐라고 말하며 헤어질까? 표준적인 한국어 대화의 기준으로 보면 분명 그 인사말은 안녕히 가십시오.”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안녕하십니까?”라고 물었을 때는 상대방이 안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말했을 때 상대방은 반드시 안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선 그 말은 잘해야 가식, 나쁘게 말하면 놀림에 불과하다. 나는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꼭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말하며 헤어질 수 있도록 고민하고 실천해 주기를 호소하고자 한다.

지금 만난 우리는 과연 어떻게 안녕히 갈 수 있을까? 세상의 모든 사회악을 척결하고 부조리 없는 유토피아를 만들어야 할까?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마 무리일 것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우리는 서로를 결코 만날 수 없었던 지금의 상태보다는 좋아진 상태로 헤어져야만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서로를 만날 가능성을 가지고 헤어져야 한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어떤 형태이든 좋다. 우리가 당분간은 대자보를 통해 안녕하십니까?”라고 외치지 않아도 되도록, 서로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확인/확신하고 필요할 때는 오래된 친구들이 불러내듯 나와 또 만났군요.”라고 말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것이 지금처럼 우연이나 의지에 의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진심을 담아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말하고, 앞으로 또 만났군요.”라고 말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그것을 고민하며 함께 움직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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