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현 병장이 주운 반지가 모든 일의 원인이었습니다.”
초소로 출발하기 전에 들린 당직실에서 해원은 설명했다.
“사람이 죽으면 으레 저승으로 간다고 합니다만, 때때로 예외는 있습니다. 죽은 자가 어떤 미련이나 원념 때문에 이승에 머무르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한을 품었다고들 합니다. 자동차 사고로 죽은 귀신이 그 현장에 계속 나타나면서 다른 사람들이 사고를 당하게 한다는 이야기는 아마 자주 들어보셨을 겁니다. 혹은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이가 죽은 후에도 범인들에게 복수하려 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승에서 이승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극히 힘들고 드문 일이지만, 그 한의 깊이가 매우 깊고 영의 의지가 정말 강력하다면 그 영은 소위 원귀가 되어 그런 일들을 저지릅니다.”
당직실에는 침묵만이 흘렀다. 해원은 김성현 병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한 평범한 사람이 길을 가다 모르는 사람에게 갑자기 공격당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 경우 죽은 사람의 영이 저승으로 떠나지 않고 이승을 떠돌며 원한을 갚으려 하는 것은, 흔하지는 않더라도 가끔씩은 생기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조금 특이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죽은 사람의 영은 자신의 원수가 누구인지, 즉 누가 자신을 살해한 범인인지를 몰랐을 겁니다. 귀신은 뭐든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퍽치기를 당했다면 십중팔구 범인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을 것이고, 죽은 후 복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현장에 아무도 없었을 테니까요. 아마 그대로 놓아두었다면 십중팔구 자신이 죽은 장소에서 머무르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지박령이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그 영의 물건, 아마도 생전 매우 소중하게 여기고 아꼈을 물건을 가져갑니다. 그 순간 영은 그 사람을 자신을 죽인 범인처럼 간주했을 겁니다. 자신의 모든 원한과 고통과 복수심을 쏟아 부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으로 말입니다.”
해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예부터 죽은 이의 물건에는 함부로 손을 대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은 이의 영은 이 반지에 깃들어 이곳으로 함께 왔습니다. 그리고 복수를 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 영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이 어떤 식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잘 몰랐을 겁니다. 그래서 며칠간 그저 반지를 가져온 사람의 주변을 맴돌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조금씩 학습했을 겁니다. 그 과정이 바로 김성현 병장의 악몽으로 나타난 겁니다.
아마 그대로 며칠이 더 흘렀다면 십중팔구 김성현 병장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겁니다. 아마 정명훈 일병과 같은 방식으로, 홀린 후 빙의하여 자살하게끔 했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되기 전에 겁이 난 김성현 병장은 반지를 멀리 버렸습니다. 영은 다시 복수의 대상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원한과 복수심은 오히려 더욱 커졌을 겁니다. 심지어는 아무 관계없는 사람을 해칠 정도로 말입니다.”
“......정명훈이 말인가?”
2중대 행보관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예. 사건이 벌어진 날의 상세한 이야기는 이미 들었고, 오늘 낮에 현장을 방문해서 최종적으로 확인했습니다. 낮인데다 수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로 북적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의 음습한 기운이 확연했습니다. 반지를 집어 들자 원념이 요동을 치더군요. 심지어는 염주에 물리적인 영향까지 미칠 정도였으니 정말 엄청난 겁니다. 아마 다른 분들도 그 반지를 보면서 뭔가 이상하다거나 기분 나쁘다는 정도의 느낌은 받으셨을 겁니다.”
우리는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대장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자네는 그걸 만져도 괜찮은 건가?”
“예. 저는 몸을 지킬 수 있는 방도가 나름대로 있습니다.”
해원은 대답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 더 이상 놓아둘 수는 없습니다. 김성현 병장은 며칠 전부터 다시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고 하더군요. 그 영은 원래 가지고 있었던 원한을 무고한 사람을 죽게 만들었고, 또 죽은 정명훈 일병의 한까지 흡수해 더욱 지독하고 강한 원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김성현 병장에 대한 원한을 잃지 않았습니다. 김성현 병장에게 복수할 때까지, 그 영은 계속해서 다음 희생자를 찾아내며 점점 더 강하고 거대한 원한덩어리가 되어갈 겁니다.”
병장은 모터라도 단 것처럼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귀신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쫓아올 것이란 이야기를 들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무리 자초한 일이라지만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약간이나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그를 보며 해원이 말했다.
“자. 그러니 오늘 초소에 가서 뭘 해야 하는지 아시겠지요?”
“어? 어...... 그러니까 그 귀신을 물리쳐 주는 게......”
병장의 말을 듣고 있던 해원이 얼굴을 심하게 찡그리며 손을 내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저는 만화에 나오는 퇴마사가 아닙니다. 그럴 능력도 없어요.”
“그럼...... 어떻게?”
간절하기 그지없는 병장의 질문에 해원은 짧게 대답했다.
“사과하세요. 반지를 가져와서 미안하다고.”
‘정말 그냥 사과하는 것만으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끝나는 걸까?’
해원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 사람을 죽이고 또 다른 사람을 죽이려고 했던 지독한 귀신인데, 그저 진심이 담긴 사과만으로 납득하고 떠나간다는 건 무슨 동화 속 이야기처럼 비현실적인 게 아닌가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해원에게 자세하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겨를이 없었다. 발자국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초소를 맴도는 발소리가 점점 더 커져 갔다. 속도도 더 빨라지는 것 같았다. 동시에 초소 바닥에 놓인 반지가 부르르 떨리는 것처럼 움직였다.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일어나며 신경이 곤두섰다. 병장도 그 모습을 보았는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쉿, 가만히 있어요!”
해원이 낮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반지는 점차 떨리는 정도가 커지더니 급기야는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요동치기 시작했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초소 밖의 백열등이 터져나가며 어둠이 초소 안을 채웠다. 단순한 어둠이 아니라 모래처럼 거칠고 얼음처럼 차가운 어둠이었다. 원한이라는 두 글자를 촉각으로 표현한다면 바로 이런 느낌이리라. 양 팔을 타고 소름이 쫙 올라왔다. 이를 악물었지만 턱이 덜덜덜 떨렸다.
일렁이는 그림자가 불현듯 초소 한가운데 나타났다. 먼 곳에서 비치는 전등의 불빛과 달빛만으로는 간신히 서로의 위치 정도만 분간할 수 있을 정도였지만 그 그림자는 기묘하게도 또렷하게 보였다. 뭔가 형체를 이루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검은 연기가 한데 뭉쳐져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윽!”
나는 치밀어 오르는 비명을 억지로 집어삼켰다. 순간적으로 극심한 어지럼증이 느껴지며 무릎을 꿇을 뻔했다. 하지만 나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간신히 몸을 가누며 김성현 병장을 쳐다보니, 그는 이미 바닥에 누워 허리를 새우처럼 꺾으며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끔찍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악!!!! 오지 마! 살려줘! 내가 아냐! 오지 마! 으아아아아아악!!”
검은 그림자가 병장을 향해 미끄러지듯이 스륵 움직였다. 그 순간 해원이 잽싸게 움직여 귀신과 병장 사이에 끼어들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무덤덤한 말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됩니다.”
놀랍게도 그림자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병장의 비명소리가 차츰 잦아드는 가운데, 그림자는 차츰 형태를 갖춰가기 시작하더니 이내 머리와 팔다리가 달린 사람 비슷한 모습이 되었다. 티셔츠에 청바지. 운동화에 야구 모자. 대학교 근처에서 너무나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옷차림이었지만 어울리지 않는 그 평범함이 오히려 공포감을 배가시켰다.
죽일거야
목소리가 귀로 들린다기보다는 오히려 머릿속으로 직접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해원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한 번 반복했다.
"안됩니다."
내 반지를 훔쳤어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게 죽을 죄는 아니지 않습니까."
소중한 반지야
"어느 분이 주셨나요?"
어머니의 유품이야
"저런.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습니까?"
그래 그런데 저놈이 훔쳐갔어
병장이 황급히 끼어들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미, 미안해! 하지만 고의가 아니었어!"
내 반지를 훔쳤어
아까의 어지럼증이 다시 한 번 나를 덮쳤다. 머리가 핑 하고 돌면서 나는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병장이 아까보다 훨씬 더 끔찍해서 진저리가 쳐지는 비명을 연신 지르며 몸을 꼬아댔다. 총이고 방탄모고 간에 진작에 죄다 내팽겨친 채였다.
"으아아아아아아악! 미안해! 살려줘! 죽이지 마! 살려줘!"
그러나 해원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말했다.
"억울함은 알고 있습니다. 김성현 병장도 잘못이 크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죽여선 안 됩니다."
왜
"죽은 사람이 이승에 개입하는 것은 인과를 해치는 일이지요. 더군다나 생명을 해치면 악업이 큽니다."
상관없어
"악업이 쌓이면 그 고통은 결국 당신에게 돌아갑니다."
상관없어
순간 그림자가 옅어지더니 해원의 옆을 스쳐 지나가려 했다. 해원은 황급히 오른손을 옆으로 뻗어 그림자를 제지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림자가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병장의 몸을 덮치듯 내려앉더니, 마치 흡수된 것처럼 순식간에 병장의 몸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찢어져라 질러대던 병장의 비명 소리가 갑자기 스위치를 내린 것처럼 뚝 멈췄다. 해원이 혀를 찼다.
"이런!"
나는 총을 지팡이 삼아 간신히 일어섰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나 뿐만이 아니었다. 병장도 사지를 이상하게 놀리며 천천히 일어섰다..몸을 흔들흔들거리는 가운데 양눈이 허옇게 뒤집혀 있었다. 헤벌린 입에서 기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병호에게 들은 적이 있는 소리였다.
"같이 가자......"
말로 듣는 것과 직접 체험하는 것은 천양지차였다. 그 끔찍한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조차 없이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뱀을 만난 개구리라는 비유가 바로 이런 상황일 것이다. 그대로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몸이 마음대로 움직였더라면 정말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행히도 볼썽사나운 꼴을 보이기 전에 해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되겠다. 바리야!"
"예, 대령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젊은 여자의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온다는 건 내가 공포심에 미쳐 버렸다는 뜻일까? 그러나 아니었다. 불현듯 반투명한 그림자가 해원의 곁에서 예고도 없이 둥실 나타났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교복을 입은 단발머리 여학생이었다.
그녀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김성현 병장에게 다가가 덥썩 오른손을 잡았다. 다시 발랄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몸에서 나가세요."
마치 영화와도 같은 장면이었다. 검은 그림자가 마치 김성현 병장의 몸에서 뽑힌 것처럼 위로 쓱 벗겨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병장의 몸이 속이 빈 포대자루마냥 풀썩 무너져내렸다. 검은 그림자는 여학생의 그림자를 마주보고 섰다. 마치 깜짝 놀란 듯 그림자가 연신 움츠러들었다 다시 펴졌다를 반복했다.
넌 뭐지
여학생의 그림자가 싱긋 웃은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무당 귀신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