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하, 나의 사랑은 강렬했으나
강한 것이, 열정적인 것이 좋은 걸로 알았다
특히 사랑에는
광화문 네거리에 걸려 있는 전광판처럼 화려하고 거창해야
나는 내 사랑이 너에게 당도할 줄 알았다
나의 그렇나 강렬함에
너는 내 손을 잡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너는 너무도 쉽게 피해갔던 것이다
하기사 한 순간 짧게 퍼붓는 소낙비야
잠시만 몸을 피하면 그 뿐 아닌가
대신 나는 네가 뿌려놓은 가랑비에 몸이 흠뻑 젖었다
너의 은은한 눈빛에
너의 조용한 고개 끄덕임에
너의 단아한 미소에
내 몸과 영혼까지 다 젖고 말았다
너는 나를 피해갔지만
나는 언제까지나 너에게 머물렀다
김재진, 새벽에 용서를
그대에게 보낸 말들이
그대를 다치게 했음을
그대에게 보낸 침묵이
서로를 문닫게 했음을
내 안에 숨죽인 그 힘든 세월이
한 번도 그대를 어루만지지 못했음을
신석정, 꽃등
누가 죽었는지
꽃집에 등이 하나 걸려 있다.
꽃들이 저마다 너무 환해
등이 오히려 어둡다. 어둔 등 밑을 지나
문상객들은 죽은 자보다 더 서둘러
꽃집을 나서고
살아서는 마음의 등을 꺼뜨린 자가
죽어서 등을 켜고 말없이 누워 있다.
때로는 사랑하는 순간보다 사랑이 준 상처를
생각하는 순간이 더 많아
지금은 상처마저도 등을 켜는 시간
누가 한 생애를 꽃처럼 저버렸는지
등 하나가
꽃집에 걸려있다
안도현, 사랑, 당신을 위한 기도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죄짓는 일이 되지 않도록
나로 인해 그이가
눈물 짓지 않도록
상처 받지 않도록
사랑으로 하여 못견딜 그리움에
스스로 가슴 쥐어 뜯지 않도록
사랑으로 하여 내가 죽는 날에도
그 이름 진정 사랑했었노라
그 말만은 하지 말도록
묵묵한 가슴 속에 영원이도록
그리하여
내 무덤가에는
소금처럼 하얀 그리움만 남도록
김남조, 편지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귀절을 쓰면 한 귀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번도 부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