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모교의 백양로 프로젝트때문에 혼잡한 공사판에도 불구하고
공사하는 길을 따라서 많은 대자보들이 붙여지기 시작했습니다.
대자보들을 보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살펴보게 되었는데요,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의 목소리를 힘껏 피력해보려고 한다는 점에서 많이 감명받았습니다.
또한 현재의 정부에 대해 아쉬운점, 모자란점을 비판하고 이슈화된
각 분야의 민영화 발판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데 다들 자신만의 논리대로
조리있게 잘 써서 다각도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박근혜정부의 정책을 반대하면서 반대를 위한 반대, 또는
프레임에 갇힌 사고를 보여주는 대자보들도 있어서 아쉬운점도 많았습니다.
요즘 페이스북에서나 다른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도 민영화이슈에 대한 글이 많이 올라오는데,
서로 무엇이 옳다 그르다는 방식으로 각종 통계자료들과, 법안 자료를 모아서 싸우면서
반목하는 모습이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정책적 혼란, 정치적 무관심과 그리고 피로만을
부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무엇이 보다 타당한 법안이냐 정책이냐 또는 정부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있는가 없는가를 떠나서
현재 정치적 혼란이 가중된 근본적 원인에 대해서 뚜렷하게 생각해보았으면 했습니다.
'다각적인 접근'과 '소통'.
서로가 신뢰를 얻고 인정하면서, 토론과 갈등속에서 보다 건전한 정책이 마련됬으면 합니다.
이와중에 정말 감명깊게 읽은 대자보를 발견했고,
긴 본문중 마음에 드는 부분을 모아서 발췌해서 올립니다.
물론 긴본문을 직접읽으시는것을 추천합니다.
본문 스크렙
안녕, 합시다!
대학가에 하나의 유령이 떠돌고 있습니다. ‘안녕들하십니까’ 라는 유령이. 새누리당과 국정원, 박근혜 대통령과 보수언론, 일간베스트저장소는 이 유령을 퇴치하기 위해 신성동맹을 맺었지만 유령은 계속하여 다양한 형태로 출몰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사회문제에 무관심했던 자신을 반성하거나, 관심이 있었더라도 표명하지 못했던 자신을 반성하는 등, 그야말로 재 위에 앉아 옷을 찢는 회개의 행렬이 이어지는 실정입니다. 이와 더불어 최근 7천명에 달하는 대규모 인원을 직위해제한 코레일에 대한 규탄과, 권위주의적 행태를 보이는 정부에 대한 불같은 분노 역시 꼬리를 물고 있습니다. 그 동안 안녕하지 못했던, 누구도 대표해주지 않았던 얼굴 없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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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정도는 약과입니다. 박근혜 정권 이후 본격화된 공안통치와 종북몰이를 보면 이 나라가 정말 권위주의 시절로 돌아간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박 대통령이나 그 하수인들이 입만 열면 얘기하는 ‘자유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다원주의(Pluralism)를 그 기반으로 합니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3대 절대 자유’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는 곧 다원화된 사회라고 이해해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다원화된 사회에서 ‘국론 분열’은 당연한 일이고, 오히려 권장되어야 할 일입니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사는 우리는 특정한 ‘국가관’이나 ‘안보관’따위를 가져야할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특정한 국가관, 특정 사안에 대해 특정한 입장을 모든 시민이 공유하도록 강요하는 것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전체주의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로 비판적 발언에 대해 ‘국론분열 용납하지 않겠다.’ ‘조국이 어디냐.’는 식의 대응으로 일관하는 박근혜 대통령과 그 하수인들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도 없는 ‘열린 사회의 적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념을 동원해 시민들을 둘로 나누고, 그 절반의 지지에 기반하여 나라를 통치하려는 전략을 정치학에서는 ‘두 국민 전략(two nations strategy)’이라고 합니다. 두 국민 전략은 권위주의 정권들의 전형적 수법입니다. 이들은 시민 다수의 다양한 정치적 판단을 ‘우리편이냐, 아니냐’는 단순한 질문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자유로운 정치적 사유를 위축시키는 자기 검열을 강화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종국적으로 민주주의의 기반인 자유로운 시민사회를 약화시킬 것입니다.
자신의, 그리고 곁에 있는 동료 시민들의 안녕하지 못함에 분노하고 변화를 촉구하는 일은 분명히 바람직한 일입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겠다는 대통령은 국론 분열을 묵과하지 않겠다는 전체주의적 엄포를 가증스럽게 늘어놓고 있지만, 우리의 다른 목소리야 말로 민주주의를 정상적으로 작동시키는 원동력입니다. 확신에 찬 하나의 의견만 있다면, 안녕한 자들의 목소리만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지상의 독재국가 내지는 천상의 신정국가일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렇게나 안녕하지 못한 다른 목소리가 많다는 것은 죽은 반인반신이 다스리는 위대한 목적의 왕국을 거부하겠다는 살아있는 시민들의 민주적 의사 표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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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라는 질문은 현재 우리가 좋지 못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점을 확인시켜주는 의미가 있는 자극제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단순히 집단적 고해성사와 박근혜 정부에 대한 미학적인 거부감을 표출하는 정념 발산에 그친다면 이는 힐링 열풍의 좌파적 버전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왜 안녕하지 못한지, 어떻게 해야 안녕해질 수 있는지 질문을 확장시켜 나가야 합니다. 서로의 안녕을 물으며, 안녕하지 못한 현실과, 그 현실을 만든 대표자로 지목된 개인이나 집단에게 분노는 표출하는 일은 쉽고 통쾌합니다. 반면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은쟁반에 여왕의 목을 담아오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안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국 시민들을 안녕하게 만든 것은 찰스 1세의 목이 아니라, 전후 복지국가의 초석을 놓은 베버리지 리포트였습니다. 원수에게 도끼를 내려치는 통쾌한 일과, 통계와 씨름하며 보고서를 작성하는 재미없고 골치 아픈 일 중 어떤 일을 할지는 우리의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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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좋은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정치적 대안에 대한 논의를 가로막는 생각들이 있습니다. 비단 정부 뿐 아니라 일각에서도 철도노조의 파업과 집회에 기성 정당들과 사회단체들이 참여하며, 연속된 자보에도 학생운동단체들이 참여한다는 이유로 순수성이 결여되었다는 비난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이는 정치는 순수하지 못하고 더러운 것이라는 반정치주의에 편승한 비난으로 명백히 민주주의와는 배치되는 주장입니다. 타협과 양보 혹은 갈등이라는 정치적 의사결정이 결여된 '순수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체제는 전체주의 체제밖에 없습니다. 순수함은 정치에서 결코 바람직한 가치가 아닙니다. 순수성을 주장하는 것은 타협과 양보를 요구하는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을 우회하여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자신의 목소리만이 정치에 반영되길 원하는 투정에 불과합니다.
어떤 정치적 주장에 대해 순수성을 원한다면 모든 정치과정을 부정하고 반민주주의 무장투쟁을 하거나 수도원에 홀로 들어가 참회록을 서술하며 고고한 삶을 살아가면 될 일입니다. 이들의 주장과 같이 수많은 '외부세력'의 참여를 부정한다면, 나의 행동이 타인의 의사에 의해 제한되는 집단적 의사결정을 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가 지적했다시피 갈등은 민주주의의 엔진입니다. 나아가 민주주의는 혼종과 다양함을 그 본령으로 하며, 집단적 결정은 항상 타협과 양보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혼종과 다양성에서 나타나는 갈등을 사회적 목소리로 만들지 않는다면 이는 결국 사적 관계에서 힘을 가진 기득권자들의 승리만을 보장하게 될 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아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