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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압] 씨발년 (2)
게시물ID : humorbest_69650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무타무타
추천 : 18
조회수 : 6371회
댓글수 : 4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3/06/16 14:15:19
원본글 작성시간 : 2013/06/13 04:20:46

서른이 다 돼서야 첫 선을 봤다. 애초에 여자를 사귈 재주도 구실도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

다. 직업 때문인지 선자리는 끊임없이 들어왔고 아홉번째 만에 첫사랑을 만났다. 그녀는 내 직업을 듣고난

뒤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참 보람된 일을 하시네요"

무척 선이 고운 얼굴이었다. 눈썹은 날아갈 듯 사뿐했고, 웃을때 드러나는 보조개는 치명적이었다. 어느날

그녀가 내 손을 이끌고 고속버스에 올랐다.

"춘천은 왜?"

"갈 데가 있어"

그녀는 제일 뒷자석으로 간 뒤 창문을 활짝 열었다. 휘날리는 머리카락이 볼을 간지럽힌다. 하지만 이내 표

정이 굳어졌다. 그것의 머리카락도 조금씩 나부꼈기 때문이다. 숯많은 머리카락이 굵기도 무척 굵다. 수만

마리의 뱀들이 요동치는 것 같다. 우리는 춘천에 도착했고, 곧 택시를 탔다.

"어디 가는데?"

"점집"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난 불안했다. 나에 대해 안 좋은 소리를 해댈게 분명했다. 여태껏 찾아간

점쟁이란 점쟁이는 모조리 한결같은 반응이었다. 최악의 사주팔자. 뭘해도 망하며 뭘해도 불행해진다는 것

이었다. 택시가 한적한 시골길에 멈췄다. 그녀가 아담한 양옥집의 초인종을 누른다. 두세번 눌러도 대답이

없다.

"일반 가정집 아냐? 간판도 없는데"

"은퇴하셨어, 왕년엔 전국 최고셨는데"

그녀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다행이다. 전국최고라면 무조건 피해야 한다. 우리는 한적한 시골길을 걸

었다. 시원한 가을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길 따라 죄다 논이요 밭이었다. 황금색 벼들이 바람에 따라 일사

분란하게 방향을 틀어댄다. 시골길엔 정말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 우리 셋 뿐이다.

"앗, 저깄다"

그녀가 환호성을 지르며 가리켰다. 이백미터도 넘는 거리의 들판 한가운데 점 하나가 움직이고 있었다.

"어서 갔다와"

그녀가 생글생글 웃는다.

"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아봐?"

그녀가 눈을 희떴다. 미친사람 처럼 흰자만 보이게 눈을 치켜떴다.

"앞이 안 보이셔"

도리없이 들판을 가로 질렀다. 가까이 가보니 인상 좋은 할아버지가 도리깨를 휘두르고 계셨다.

"할아버지"

사람 소리에 할아버지가 이쪽을 바라본다. 혼탁한 동공. 눈 전체에 지독한 안개가 가득하다.

"점 보러 왔어?"

"네"

할아버지는 잠자코 내 편을 바라본다. 보이긴 보이는 걸까. 의사인 내 소견으로 할아버지는 완벽한 장님이

었다.

"무조건 잡아, 놓치면 자넨 죽어"

"네?"

의외의 대답에 가슴이 벌떡거린다.

"저 여자가 있어야 자네 목숨을 부지 할 수 있어, 무슨 말인진 자네가 더 잘 알거 아닌가"

"아.."

누가 뒷통수를 힘차게 후려친 기분이었다. 듣고 보니 그랬다. 그녀를 만난 후 부터 모든 일이 잘 풀렸다.

웃는 일도 많아지고 스스로가 행복하다고 느껴졌던 것이다. 늘 따라다니는 그것마저 신경 안쓰일 정도로...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신나게 뛰어갔다. 시원한 바람이 폐 깊숙한 곳까지 식혀주었다. 단숨에 들판을 가로질러

그녀에게 갔다. 내 표정에 그녀도 신이 난 듯 묻는다.

"뭐라고 하셔?"

"너 놓치면 나 죽는대"

그녀가 함박 웃음을 짓는다. 하지만 그 웃음은 반나절도 가지 못했다. 이건 사기다. 이럴수는 없다.

할아버지가 길가로 나온 뒤 정식으로 집안으로 들어갔다. 뭔가 이상하다. 할아버지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덩달아 우리 표정도 싹 굳었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그녀가 핸드백을 챙긴다.

"벌써 가려고?"

"응"

싸늘하다. 냉기가 풀풀 넘친다. 다급하게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는 서울까지 오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

다.

"왜 거짓말 했어?"

차에서 내리자 그녀가 차갑게 묻는다. 어이가 없어 잠시 하늘을 올려보았다. 밤하늘 중앙에 할아버지의 간

사한 얼굴이 둥실 떠올랐다. 사기꾼이 분명했다. 차라리 다른 이유라면 억울하지도 않았다.

"빌어먹을 사기꾼 영감탱이가"

"함부로 말하지마"

"아 미치겠네 진짜"

"끝내"

그녀의 말한마디에 진짜로 끝났다. 이건 사정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만의 어떤 믿음이 작용하는

듯 했다. 그녀와 헤어지고 다른 여자와 이듬해 결혼식을 올렸다. 그녀는 점 따위는 믿지 않았고 속설같은

것도 전혀 신뢰하지 않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결혼은 했지만 부인을 사랑하지는 않았다. 자식도 태어

났지만 전혀 이뻐 보이지 않았다. 과거 아버지의 시선처럼 약간의 동정심, 단지 그것 뿐이었다.

주기적으로 낙태시술을 했지만, 며칠뿐이었다. 며칠이 지나면 다시 그것이 무서워졌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강해지는 것 같다.







요즘따라 스트레스가 심하다. 지독한 불면증에 자면 언제나 악몽이다. 물론 깨어난다 해도 똑같지만...

그것이 부쩍 신경 쓰인다. 일이 없을땐 항상 최후를 생각한다. 그것이 얼굴을 보여주는 날 나는 죽을 것이

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우리 핏줄의 운명이다. 불현듯 덮치는 극심한 공포에 식은땀이 흐른다.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얼마나 무섭게 생겨야 바로 죽을 수가 있는걸까'

주말엔 온통 그것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대항했던 것처럼 나역시 가만히 앉아 있을 순 없었다.

아버지는 무당에 의존했지만, 난 그것을 과감히 배척했다. 오히려 죽는 시기를 앞당긴다고 여겼다. 실제로

굿 때문에 아버지가 죽었다고 믿었다. 미신을 배척하고 나자 할 수 있는 것이 대부분 사라졌다. 하긴 귀신

을 그럼 도대체 무엇으로 대항한단 말인가.

우선 최후의 순간에 대비했다. 그것의 얼굴에도 심장마비를 안 일으키도록 단련했다. 처음엔 시체 사진을

모았다. 평범한 시체부터 시작해서 점점 범위를 넓혀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추락사한 시체, 불에 탄 시

체, 부패하다 만 시체 등등 각종 시체들을 섭렵했다. 무서웠지만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다.

시체 중에선 범죄로 인한 시체가 가장 끔찍했다. 그 중 남녀간의 애증으로 인한 살인이 제일 처참했다.

지인의 소개로 강력계 형사 한명을 만났다. 형사는 두꺼운 사진첩을 보여주었는데, 각종 범죄의 희생자

들 모음집이었다. 형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펼치고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얼핏 봐도 꽤나 높은 수위

의 사진들이 제법 있었다. 면역이 되서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형사가 사진을 향해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는

다. 하긴 나도 나만의 분야가 있지 않은가. 눈앞의 형사가 조각난 태아사체를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

금해졌다. 어쨌든 노력 덕분인지 종국에 가서는 무엇을 보더라도 놀라지 않았다. 내가 조금이라도 반응을

보일만한 것이라면 그야말로 끔찍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외유내강이라..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기로 마음먹었다. 약 200여가지를 검사하는 종합검사를 우선 받았다.

비용만도 천만원가까이 소요되는 그야말로 몸 전체를 샅샅이 훑는 작업이었다. 두달 동안의 검사가 종료되

고 담당의사에게 결과를 통보 받는 날이었다.

이 계통에 있는 사람들은 대충 서로를 안다. 우리도 역시 술자리서 두어번 마주친 전력이 있다.

"저기..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그가 말끝을 흐린다. 젠장, 이거 내가 많이 하던 대사다

"짧고 간결하게, 그리고 하나도 남김없이 말하세요"

그가 더욱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선생님께서는 생식능력을 상실하셨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의외의 대답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내 표정에 그가 더욱 황망한 표정을 짓는다.

"선생님은 더이상 아기를 가질 수 없..."

"괜찮아요, 다른 이상은 없나요?"

정말 괜찮았다. 혼전이라면 문제가 됐겠지만, 지금은 결혼도 하고 아들도 하나 있지 않은가.

"저, 그게.."

아뿔싸, 드디어 감이 왔다.

"고환암 말기입니다"

"씨발"

"네?"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물어 볼 것도 없다. 고환암은 초기 아니면 다 죽는병이다. 어쩐지 얼마전부터 고환

이 간질간질 하더라니만. 하지만 백프로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2퍼센트의 확률로 오진이란 것이 발생한다.

"고환암입니다"

"안타까우시겠지만 우선 항암치료부터 시작합시다, 두달 정도는 충분히 늘릴 수 있어요"

며칠 지나서 다른 병원의 결과까지 받았다.

두달이 언제부터 충분한 시간이었던가. 단호하게 말하던 그놈의 머릿가죽을 벗겨버리고 싶었다.

난 이제 죽는다. 죽는다. 세달도 못가 죽을 것이다. 기어코 확실하게 죽을 것이다. 문득 암으로 죽을 지

심장마비로 죽을지 헷갈렸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무엇으로 뒈지든 그것 알아 무엇하리.

차라리 암보다는 화끈하게 심장마비가 나을 듯 싶었다. 하지만 그건 대단한 착각이란걸 그날 밤에 깨달았

다. 멍하게 거리를 걸었다. 길이 보이는 곳은 어디로든 걸었다. 뒤에선 분명이 그것이 따라오고 있을테지만

신경쓰기 싫었다. 그냥 다 귀찮았다.

"빵.빵"

벼락같은 경적소리에 정신이 번쩍든다.

"개새끼가 죽을라고 환장했나?"

덤프트럭 한대가 멈춰 있었고 자신은 차도 한복판에 서있었다. 다시 인도로 돌아가 걷기 시작한다.

초등학교가 보인다. 아무 생각없이 들어간다. 초등학교 운동장 치고는 꽤 넓다. 밤중이지만 곳곳에 설치된

가로등으로 제법 밝다. 누가 있는 듯 하여 무심코 뒤를 보았다. 잘못 들었나 보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다'

다시 이리저리 찾아보아도 역시 아무도 없다. 사라졌다. 그것이 사라진 것이다.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다 중

간에서 멈춘다.

'그럼 뭐해, 곧 뒈질거'

저만치서 점 하나가 움직인다. 운동장 끝과 끝 사이. 점이 점점 커진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보니 어렴풋이

사람의 형체다. 점이 점점 커진다. 사람인 동시에 여자다. 점이 더욱더 커진다. 사람인 동시에 여자인

동시에..

"씨발년이다"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뒤뚱거리지도 않았다. 벌써 반이나 거리를 좁혔다. 엄청난

속도때문인지 그것의 머리카락이 사방팔방으로 나부낀다. 머리카락 사이로 희끄무레한 것이 보인다.

"쿵.쾅.쿵.쾅"

심장이 중간단계없이 최대한의 출력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잠시 잊고 살았던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어마어마한 원한. 내몸은 어느새 그날의 아버지를 다시 보고 있다. 그것이 아버지위에 올라 타있다.

슬며시 머리카락을 젖힌다. 숨도 못쉬고 그걸 지켜만 본다. 내몸은 다자란 성인이지만 꼼짝도 할 수 없다.

마치 어린시절의 나처럼. 별안간 머리카락이 확하고 젖혀진다.

"으아아악"

순수한 공포심에서 우러나오는 비명이었다. 그것이 달리는 속도를 높였다. 이제 거의 얼굴 윤곽이 보일 듯

하다. 보면 죽는다. 저 얼굴이 망막에 아로새기는 순간 무조건 죽는다.

"우아악"

미친듯이 팔목을 물어 뜯었다. 어찌나 세게 물었던지 살점과 혈관이 같이 터져 나왔다.

"싸아"

팔목에서 피가 물총처럼 쏘아진다. 그것의 달려오는 속도가 약간 느려졌다고 느꼈다.

"크아악"

뜯어진 부위사이로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연한 살덩어리 사이에서 길다란 힘줄이 느껴진다. 힘줄을 잡고

서 있는 힘껏 당긴다.

"찌익"

힘줄이 대번에 팔길이 만큼 뽑혀나왔다. 그것의 속도는 이제 눈에 띌만큼 느려졌다.

"아흑"

뽑고 뽑아도 힘줄은 끝이 없었다. 키만큼의 길이에 해당하는 힘줄을 뽑아내자 드디어 그것이 달리는 걸 멈

추었다. 머리카락은 다시 얼굴을 덮었고, 그것은 조용히 내 옆으로 다가와 섰다.

"개씨발년아"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벌떡 일어났다. 거친 호흡에 상체전체가 위아래로 흔들거린다. 팔목을 보니 정상

이다. 꿈을 꾼것이다. 너무 억울했다. 분해서 꺼이꺼이 울었다. 울다보니 내자신이 불쌍해서 더욱 서럽게

울었다. 그러고보면 이때까지 정말 편하게 지내 본 적이 없었다. 스스로에 대한 연민 때문에 울지 않고서는

배길수가 없었다. 침대맡에 조용히 서있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 거실로 나왔다. 마

누라는 집에 거의 붙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한번도 거기에 대해서 언급한 적은 없다. 어차피 관심도 없었

다. 역시 오늘도 나가고 없다. 아들이 자는 방의 문을 열었다. 자기보다 커다란 베개를 다리 사이에 끼운채

정신없이 자고 있다. 이 끔찍한 인생을 물려주기 싫다. 버러지만도 못한 인생. 차라리 죽느니만 못하다.

아들을 흔들어 깨운다.

"으응.."

아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뜬다.

"저기 문앞에 누가 서있는 줄 알아?"

녀석은 질문을 이해하느라 나를 멀뚱멀뚱 쳐다봤다. 아마 잠결이라서 더 헷갈렸을 것이다.

"그냥 아줌마"

망설임없이 일어났다. 부엌으로 가서 식칼을 손에 쥐었다. 다시 아들방으로 갔다. 그런데 아들이 없다.

화장실에서 소리가 들린다. 쫄쫄쫄 오줌누는 소리. 오줌을 다 누기를 기다렸다. 아들이 나오자 식칼로 심장

을 힘껏 쑤셨다.

"아.."

아들은 비명도 못 지르고 쓰러졌다. 눈을 감고 한번더 찔렀다. 최대한 빨리 죽이는게 예의리라.

아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식칼을 들고 그년을 보았다. 그년이 온몸을 비틀거린다.

"어때? 이제 대가 끊겼으니 어쩌나? 이제 네년의 복수상대도 사라졌으니 이제 어쩔거냐고"

그년이 크게 휘청거린다. 저런 모습은 처음이다. 통쾌했다.

"자 이제 얼굴을 보여줘"

그년이 여전히 경련을 일으키고 있다.

"씨발년아, 면상 한 번 보자고"

성큼성큼 걸어가 그년의 어깨를 확 잡아챈다. 아마 집안을 통틀어 이런 행동을 보인건 내가 처음일 것이다.

아들도 죽였는데 그년이라고 대술까. 그년이 아무렇게나 팔을 휘두르자 순식간에 벽에 처박혔다.

"씨..씨발년이 힘은 장사네"

그년이 점점 나에게 다가온다. 내 표정이 환하게 밝아진다.

"컴온, 씨발년 베이비"

그녀가 다가옴에 따라 미칠듯한 원한이 쏟아진다.

"그래 이거야, 이 느낌이라구"

공포와 흥분으로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흔들렸다. 해묵은 집안의 한. 켜켜이 쌓인 그것이 남김없이 쏟아지는

듯 하다. 그년이 내 발을 지나서 머리맡으로 왔다.

"어서 까봐"

그년이 물끄러미 내려다 본다. 심호흡을 했다.

"스윽"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아 버렸다. 속으로 욕을 하면서 다시 눈을 떴다.

"어라"

그년이 없었다. 저만치서 그년이 걸어가고 있다.

"이봐 어디가?"

그년이 현관쪽으로 다가간다.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단 생각이 든다. 얼른 뛰쳐가서 그년의 어깨를 돌렸다.

"휙"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머리카락을 치워버렸다.

"....."

뭔가 잘못됐다. 이럴수는 없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안쪽으로 부적 몇 개가 붙어 있을 뿐이었다.

그년이 다시 현관으로 향한다.

"안돼"

사라졌다. 그년이 사라졌다. 뒤를 돌아보면 짠 하고 나타날 줄 알았다.

"홱"

"홱"

몇번이나 돌아봐도 마찬가지다. 그년이 완벽하게 사라져버렸다. 뚜벅뚜벅 걸어가서 아들의 시체를 안았다.

죽은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찬기운이 느껴진다. 아들만 차운게 아니었다. 거실바닥도 차웠고 공기도 얼어

붙는듯 매웠다.

"하"

숨을 내쉬자 뽀얀 입김이 퍼진다. 그러고보니 주위가 어둡다. 창문쪽을 바라보니 아무 것도 안보인다.

그냥 까맣다.

"헉"

일순 급격한 추위가 몰아 닥쳤다. 전신의 소름이 연신 돋아났고, 팔다리에 마비 증상이 오기 시작했다.

냉정하게 이 상황을 직시했다. 지금은 한여름이다. 이런 추위는 있을 수 없다.

다시 바깥쪽을 보았다. 여전히 까맣다. 자세히 보니 까만것이 움직이는 것 같다. 베란다를 열고 들여다 보

았다.

"꿈틀꿈틀"

시커먼 덩어리들이 울룩불룩 돋아나왔다. 별안간 덩어리들 사이에서 뭔가가 솟구쳤다. 사람이다. 사람인데

목이 없다. 여기저기서 마구 솟구친다. 모두 목이 없다. 동물적인 직감으로 옷을 살펴보니 결코 요즘 시대

옷이 아니었다. 낣고 헤진 한지로 만든 옷들...슬금슬금 뒷걸음질 친다.

"꿈틀꿈틀"

또다시 사방팔방에서 무엇인가가 솟구친다. 이번엔 목이 있다. 그런데 다들 병신이다. 팔한쪽이 없거나 발

이 없었다. 죄다 병신들이다. 옷을 살펴보니 한복이다. 슬금슬금 뒷걸음질 친다. 어느새 거실까지 물러났

다.

"꿈틀꿈틀"

이번엔 가까이서 소리가 들린다. 맙소사, 천장이다. 천장에 시커먼 것들이 퍼져있다. 그것들은 벽으로 흘러

내리고 점차 온 집안을 잠식해 들어온다. 이젠 추위를 넘어서 전신이 따끔 거린다.

벽에서 또 수십명이 솟구친다. 목도 있고 병신도 아니다. 옷을 살펴보니 가슴에 번호가 새겨져 있다.

"죄수복!"

정수리부터 시작해서 꼬리뼈까지 수십만 볼트 짜리 전류가 흘렀다.

"설마"

뒷걸음질 치다가 뭔가에 걸려 넘어졌다. 아들의 시체다. 뭔가 알듯 말듯 애매하다.

사라진 그년과 부적 그리고 나타난 원혼들. 깨알같은 힌트라도 절실했다. 불현듯 사기꾼 할아버지가 떠올랐

다. 수만가지 생각이 서로 넝쿨처럼 꼬였다. 입구는 수십갠데 출구는 하나다. 이 매듭의 시작점만 쥘 수 있

다면, 참말로 그럴수만 있다면.. 수십번 침을 삼키고 미친듯이 눈을 깜박거렸다. 최대한 뇌를 쥐어 짜냈다.

가상의 선이 그어진다. 조심스레 그 선을 따라 걸었다. 눈앞에 굵은선 외에는 죄다 함정이다. 밟으면 아랫

도리가 터져버리는 지뢰밭이다. 발을 딛으려는 찰나 오른쪽에 있던 선도 굵어진다. 곧 모든 선이 통나무 마

냥 굵어져 버렸다. 서로 오라고 살랑 살랑 꼬리를 흔든다. 빌어먹을. 더이상 짜낼 뇌도 없다. 탈수기까지 

동원해서 모조리 짜내버렸단 말이다. 알렉산더의 검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어느새 온 집안에 검은 덩어리들이 가득 찼다.

"꿈틀꿈틀"

이번엔 바닥이다. 그것도 내가 누워있는 바로 밑바닥이다. 온몸이 미칠듯이 따끔거렸다. 전과는 비교도 안

될만큼 아팠다. 목없는 시체, 병신들, 그리고 죄수들이 다가온다. 이제는 살이 뜯길 만큼 아프다.

그들이 쳐다볼때 마다 한움큼씩 떨어져 나가는 것 같다.

"꿈틀꿈틀"

바닥이 들썩거리면서 가랑이 사이로 뭔가가 고개를 쳐든다. 물컹물컹한 그것이 가까이 다가온다. 다가오면

서 점차 제자리를 찾아간다.

아기다. 수많은 아기가 원망어린 시선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모든 원혼들이 한데 뒤엉켜 나에게 쏟아진다.

알았다. 이제 알았다. 그년이 왜 사라졌는지 이제 알았다.

할아버지도 틀렸고, 아버지도 틀렸다. 죄다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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