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연, 다 바람 같은거야
다 바람 같은거야
뭘 그렇게 고민 하는거니?
만남의 기쁨이건 이별의 슬픔이건
다 한 순간이야
사랑이 아무리 깊어도 산들바람이고 오해가 아무리 커도 비바람이야
외로움이 아무리 지독해도 눈보라 일뿐이야
폭풍이 아무리 세도 지난 뒤엔 고요하듯
아무리 지극한 사연도 지난 뒤엔 쓸쓸한 바람만 맴돌지
다 바람이야
이 세상에 온 것도 바람처럼 온다고
이 육신을 버리는 것도 바람처럼 사라 지는거야
가을바람 불어 곱게 물든 잎을 떨어뜨리 듯
덧없는 바람 불어 모든 사연을 공허하게 하지
어차피 바람 뿐 인걸 굳이 무얼 아파하며 번민하니
결국 잡히지 않는 게 삶 인걸 애써 무얼 집착하니
다 바람이야
그러나 바람자체는 늘 신선하지
상큼하고 새큼한 새벽바람 맞으며
바람처럼 가벼운 걸음으로 바람처럼 살다 가는 게 좋아
황병승, 스무살의 침대
Etude Op 25 No 11을 두드릴 때의
빠르고 음탕한 손가락들처럼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오갔다
창밖으로 첫눈이 날리던 그 밤
그것은 좀도둑질에 불과했다
김선재, 가시를 위하여
통증을 용서해요
부분이면서 어느덧 전체가 된 나를
알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모르는 사이도 아닌 사이
날을 세운 날은 아니지만
나이면서 당신이고
당신이지만 나인
시간을 견뎌요
나는 기원에서 멀어졌다 이미 나는 숲의 변형이며 혹은 바다의
변종이다 형식에서 멀어져 속도 없고 겉도 없는 어떤 가능성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사라진 내용이지만 여전히 전체를 제압한다 형식을 제압한다
나는 혀의 어순이다 돌기들 사이에 벌겋게 달아오른 하나의 돌기는 혀일까 바늘일까
미각은 우리의 옛 성질이었으나 지금 너는, 나는 혀인지 바늘인지
짠맛인지 쓴맛인지 수시로 아픔을 확인하는 너인지 나인지
같은 온도를 갖기 이전에 우리는 서로 아무것도 아니었죠
그러니 제분을 못 이긴 팔매질을 용서해요
때로 실감의 모서리에 올 베일 때마다 차가운 그 각도의 질량에 대해 생각한다
때로 나는 말의 어법을 가졌지만 통증으로 변이된, 겨우 피 흘리지않는 실감이다
비유로 은폐되는 실감의 형식이다
혀끝으로 찾는 당신
피 흘리지 않고 아팠지만
다가설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날을 세운 날들은 아니었지만
찾는 순간 서로를 지울 우리
통증을 용서해요 나를 잊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