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현근, 아느냐 애인아
산다는 것은
성긴 올을 날실 씨실로 엮는
한 폭의 모시적삼같은거라며
수묵화로 채워지는 화선지같은 거라며
기다림이 걸리던 옷장에는
귀환을 꿈꾸는 홀씨
외눈의 포자만 무성한데
세상이
한 잔의 고운 포도주로 넘칠 수만 있다면
가슴에 거짓말을 품지 않아도 좋을 텐데
넉넉한 사랑으로 채울 수 있다면
벌판엔 온통
풀빛 아닌 것이 없을 텐데
익숙하지 않은 하늘
아직 끝내지 못한 숙제
오오, 마른 입술 열며
그리움은 제 이름으로 저기 오고
아느냐 애인아
큰 언덕너머 온통 너의 이름뿐이던 것을
보느냐 애인아
사랑을 가늠하는 내 젖은 세월을
투정하듯 걸어둔
저 나부끼는
황동규, 조그만 사랑 노래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가득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정호승, 까닭
내가 아직 한 포기 풀잎으로 태어나서
풀잎으로 사는 것은
아침마다 이슬을 맞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짓가랑이를 적시며 나를 짓밟고 가는
너의 발자국을 견디기 위해서다
내가 아직 한 송이 눈송이로 태어나서
밤새껏 함박눈으로 내리는 것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싸리 빗자루로 눈길을 쓰시는
어머니를 위해서가 아니라
눈물도 없이 나를 짓밟고 가는
너의 발자국을 고이 남기기 위해서다
내가 아직도 쓸쓸히 노래 한 소절로 태어나서
밤마다 아리랑을 부르며 별을 바라보는 것은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를 사랑하기엔
내 인생이 너무나 짧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