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봉, 아름다운 수작
봄비 그치자 햇살 더 환하다
씀바귀 꽃잎 위에서
무당벌레 한 마리 슬금슬금 수작을 건다
둥글고 검은 무늬의 빨간 비단옷
이 멋쟁이 신사를 믿어도 될까
간짓간짓 꽃대 흔드는 저 촌색시
초록 치맛자락에
촉촉한 미풍 한 소절 싸안는 거 본다
그때, 맺힌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던가
잠시 꽃술이 떨렸던가
나 태어나기 전부터
수억겁 싱싱한 사랑으로 살아왔을
생명들의 아름다운 수작
나는 오늘
그 햇살 그물에 걸려
황홀하게 까무러치는 세상 하나 본다
도종환, 세월
여름 오면 겨울 잊고 가을 오면 여름 잊듯
그렇게 살라 한다
정녕 이토록 잊을 수 없는데
씨앗 들면 꽃 지던 일 생각지 아니하듯
살면서 조금씩 잊는 것이라 한다
여름 오면 기다리던 꽃 꼭 다시 핀다는 믿음을
구름은 자꾸 손 내저으며 그만두라 한다
산다는 것은 조금씩 잊는 것이라 한다
하루 한낮 개울가 돌처럼 부대끼다 돌아오는 길
흔들리는 망초꽃 내 앞을 막아서며
잊었다 흔들리다 그렇게 살라 한다
흔들리다 잊었다 그렇게 살라 한다
이성선, 외로운 사랑
나는 다른 시인이 될 수 없음을 안다
풀잎과 마주앉아서 서로 마음 비추고
남들은 들을 수 없는 그런 이야기로
함께 꿈꾸며
별을 바라 밤을 지새는
시인이면 족하여라
그것만으로 세상을 사랑한다
그와 내가 둘이서
눈동자와 귀를 서로의 가슴에 묻고
사랑의 뿌리까지 영롱히 빛내며
저 하늘 우주의 울림을
들으면 된다
세상의 신비를 들으면 된다
그의 떨림으로 나의 존재가 떨리는
그의 눈빛 속에 내가 꽃 피어나는
그것밖에는 더 소용이 없다
그렇게 별까지 가면 된다
정하해, 내 사랑, 그러하거든
사랑하는 사람을 가졌거든
그 사람의 손을 한 번 잡아 보아라
그 속에는 무수한 길들이
나있는 걸 느낄 것이다
오롯이 걸어가는 길 하나
만져지거든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흉장 속으로
걸어가는 그대라고
생각해도 좋으리
한 세상 살면서
내 전부를 주고도 아깝지 않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 가졌거든
그 사람의 손을 잡고
걸어보아라
어정거리는 세상이 얼마나
빠르게 흘러가는지
미쳐 몰랐던 애절함이 거기서
묻어날 테니까
그리하여
이승에 머무는 동안
세상의 용서는 아무일 아닌 듯
일어날 것이다
바로 그 한 사람의 사랑으로 인하여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백 년에 한번 피는 꽃이 아름다워 지는 이유
그것이 그대 아닌가
백인덕, 오래된 약
비 오다 잠깐 갠 틈
책장 사이 수북한 먼지를 털자
어디다 쓰는지 알 수 없는
알약 몇 개 떨어진다
언제
어디가 아팠던가? 무심한
손길이 쓰레기통 뚜껑을 열자
스멀대며 퍼지는 통증 한줄기
약은 몸에 버려야 제격
마른침으로 헌 약을 삼켜버린다
그 약에 맞춰 몹쓸 병이나 키우면
또 한 계절이 붉게 스러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