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효자 천승호와 열녀 이씨 효열(孝烈) 이야기
효자 천승호와 열녀 이씨의 효행은 1872년 나라에서 교지를 내려 금곡동에 정려비를 세운 실제 있었던 이야기로서 양산군 유림들이 군수에게 올린 추천서에 잘 나타나 있다.
효자 천승호는 선비 집안의 전통은 이어받아 시례(詩禮)의 풍(風)과 효도를 배우지 않고도 글을 알았으며, 그 어머니가 일찌기 풍담(風痰)으로 여러 달 병에 누웠는데, 입은 옷에 띠를 풀지않고 자리는 곁을 떠나지 않으며 이리 저리 약을 물었다. 의원의 말이 “능구렁이(花蛇)가 가장 좋은데, 때가 겨울이니, 어디서 얻겠는가!”
승호가 하늘을 부르며 물어 널리 구하니 끝내 얼음과 눈 쌓인 산에서 얻어 어머니 병이 즉시 나았다.
그 후에 어머니가 학질을 앓아 좋은 음식을 구할 길이 없어 송아지를 시장에 팔아 받은 돈 10꿰미를 가지고 저녁에 돌아오다가 산골에서 갑자기 산적(山賊) 두 세명이 나타나 칼을 휘둘러 돈을 뺏으니, 승호가 병든 어머니 봉양할 돈이라고 지성으로 울며 간청하니 말씨가 사람을 감동시켰다. 적도들이,
“당신이 효자 천승호인가?”
”성명은 맞으나 효자는 아닙니다.”
“효자의 이름을 일찌기 귀 달갑게 들었소. 우리들이 비록 흉년으로 곤란하나 어찌 감히 효자의 돈을 뺏아 모친 봉양을 못하게 하리까?” 하며 백배사죄하며 가버렸다.
대개 성효(誠孝)가 동물을 감동시켜 능구렁이가 저절로 나왔고, 사람을 감동시켜 흉도(凶徒) 산적들이 저절로 교화(敎化)된 것이다.
23세에 비로서 결혼하여 능히 부부의 도리를 다하여 또한 부부유별(夫婦有別)을 다하였다.
그 아내 경주 이씨는 본래 전통있는 가문의 딸로 천성이 순수하여 바탕과 행실이 정숙하며 이미 어진 부모의 훈계를 듣고 또 남편의 법도를 따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시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물 긷고 방아 찧고 길쌈하기 30여년에 혈기(血氣)가 이미 쇠약해도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절차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부지런 하였고 방이 차고 더운 문안까지 밤이나 낮이나 게으르지 않았으니 이것이 50살에도 부모를 사모하는 (五十而慕父母者) 사람인 것이다.
이웃 여자들이 감화되고 촌 아낙네들이 사모하고 본받아 시모 섬기는 이야기에는 반드시 이씨(李氏)를 일컬었으니, 만약 출천지효(出天之孝)가 아니면 그 사람을 감동 시키는 깊이가 어찌 이와 같겠는가?
정인년 4월에 그 남편 천승호가 문득 병에 걸려 점점 위독하게 되니 이씨가 백방으로 구호하다가 한결같은 정성으로 재계목욕하고 매일 밤 하늘에 빌어 자기 몸을 대신하기 원하였다.
그 남편이 운명하니 슬픔을 절제하여 곡성을 그치고 시어머니를 위안하여 “죽고 사는 것은 운명에 있는 것이니, 애통한다고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하며, 염습범절을 모두 남에게 맡기고 오직 시모 공양을 일로 삼으니 그 시모가 속병이 들었으나 겉으로는 편안한 체 하는 것을 알고 음식을 권하면 마시지 않고도 “마셨습니다.” 먹지 않고서도 “먹었습니다.”하였다.
성복(成服)하는 날, 노비(奴婢)들이 가서 그 시모에게 아뢰니, 비로소 여러 날 동안 곡기(穀氣)를 끊은 줄 알고 손수 음식을 억지로 권하니 물 한 숟가락을 마시고는 피를 몇되나 토하니, 이것은 진실로 정(情)은 감출 수 있으나 피는 감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튿날, 아이들을 불러 이별하는 말이 “너희들 아버지가 세상을 버리는 날, 내가 어찌 즉시 따라 떠나지 않으려했겠는가! 다만 할머니가 방에 계시기에 감히 거듭 마음의 상처를 드릴 수 없어 참아 오늘에 이른 것이다.
내 뜻은 이미 그때에 결정했었다. 지금은 네 아버지 상복을 입었고 할머님 마음도 조금 너그러워졌으며 또 봉양할 며느리가 있으니 내가 죽더라도 좋은 음식 대접은 그치지 않으리라.
너희들은 할머니가 계시고 나는 지하의 남편이 있으니, 살아 계신 할머니를 섬기고 죽은 남편을 따르는 것은 지금부터 길이 다르니라. 너희들은 너무 한탄하지 말거라.” 하시며, 또 양자로 간 아들 부부를 불러 말하기를, “내 죽은 뒤에 어린 동생들과 여동생들을 네가 거두어 길러 염려가 되지 않게 하라. 사람의 모든 행실이 어버이 섬김이 으뜸이요, 가정 다스리기에 완성되니 너는 모름지기 힘쓰고 힘써 집안 명성을 떨어뜨리지 말거라.” 또 말하기를, “부부는 무덤까지 같이 간다는 옛말이 있느니라. 이것이 내 지하의 소원이다.” 하며, 말을 마치고 입을 닫으며 떠나니 그 곡기를 끊은 처음과 끝날을 계산하면 무릇 7일간이었다.
그 남편은 어질고도 효성스러우며 그 아내는 효도와 정렬이 겸비했으니 감영과 고을에서 미행을 포창하는 일이 거듭되지 않음이 아니나, 조정에서 효열(孝烈)을 드러내어 밝히는 혜택(정려각)은 아직 지금까지 받지 못했으므로, 도내(道內) 선비들의 의논이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여 상감의 행차가 왕릉을 뵈오러 가시는 때에 사유를 갖추어 말씀을 올렸더니, “도(道)에 조사토록 하겠노라”는 하교(下敎)가 있었기에, 도대표 유자(道代表 儒者)의 공의가 이미 이처럼 동의했고 본읍 사림이 침묵할 수 없었다.
이에 연명하여 우러러 하소연하오니 참고하고 즉시 실제대로 감영에 보고하여 천승호의 지극한 효도를 포창하고, 그 처 이씨(李氏)의 높은 열행을 정려(旌閭) 내려 조정에서 권장하는 높은 은택으로 처분 해 달라는 글을 올려 나라에서 효자 열녀 정려(旌閭) 교지(敎旨)가 내려진 것이다.
(2) 산성으로 가는 모래재 고갯길
산성마을에서 1Km쯤 서쪽으로 대천을 따라 산성길로 내려 가면 모래재가 나온다. 이 고개는 산성마을과 구포로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로 구포장을 다녀오는 사람들로 왕래가 잦았다.
모래재는 모래로써 이루어졌으며 예전에는 숲이 울창하게 우거진 깊은 고개라 호랑이가 살았다. 사람들이 구포장에 갔다가 오면 호랑이가 꼬리로 모래를 훨훨 날려 이 모래재에서는 겁이나서 빠른 걸음으로 지나갔다고 한다. 이 고개의 바로 동쪽 위에는 50여호의 죽전마을이 있고 대천 옆에는 금정산성의 서문이 당당하게 낙동강을 지켜보고 있다.
죽전마을에는 홀어머니를 봉양하고 있는 한 청년인 살았는데, 그는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영리한데다가 마음 씀씀이도 착해서 부모님께 효도하고 마을 어른들을 공경함이 지극하였다. 이 마을에서 칭찬이 자자했으며 장래가 촉망되어 17세가 되었을 즈음에 딸자식 가진 집에서는 누구나 돈은 별로 없지만 성실하고 착한 이 청년에게 시집 보내기를 다투어 원할 정도로 덕망이 높았다. 모자가 돈은 없지만 서로가 믿고 의지하며 행복한 생활을 엮어 나갔는데, 이 청년이 스무 살이 되던 해 겨울, 어머님께서 노후하신 탓으로 그만 병이 들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가난해서 변변히 약 한 첩 쓸 수가 없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정성으로 간호를 했지만 어머님의 병환은 차도가 없었다. 착하기만한 이 청년은 새벽마다 정화수를 마당가에 떠 놓고 백일 기도를 올렸다.
그 지독한 추위도 어머니를 걱정하는 효성을 이기지 못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근 1백여일이 다 되어 눈이 펑펑 쏟아지는 어느 날 저녁이었다. 그날도 마찬가지로 내리는 눈을 가까스로 쓸고 정화수를 떠놓고 빌던 중 눈과 추위에 떨던 그 자리에서 어느결엔지 깜박 잠이 들었다. 그때 백발노인이 백호를 타고 나타나서 “나는 이 고을의 산신령이니라, 너의 효성이 지극하니 특별히 너에게 어미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비법을 일러 주겠으니 똑똑히들어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되니 꿈결일망정 이 청년의 가슴은 뛸 듯이 기뻤다. 청년이 무릎을 끓고 엎드렸더니 “이 마을 밑의 모래재 산꼭대기엔 무슨 병이라도 고칠 수 있는 약초가 있을 것이니 그걸 캐서 네 어미에게 먹이면 병을 고칠 수 있을게다”하고는 홀연 사라지고 말았다. 이 청년이 눈을 번쩍 떠 보니 자기가 물을 얹어 놓은 소반에 엎드려 잠이 들었음을 알고 깜짝 놀랐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꿈이 신기하여 날이 새자마자 곧장 그 눈덮인 모래재의 산 위로 단숨에 기어 올라갔다.
사방은 몇 치나 되는 깊은 눈으로 덮여 있었고 웬만한 사람은 이 산을 올라 갈 엄두도 내지 못했겠지만 이 청년의 효성은 자기의 몸을 돌볼 겨를도 없었다. 그래서 엎어지고 넘어지면서 한나절이 넘어서야 중턱까지 겨우 올라갔을 때, 갑자기 큰 호랑이 한마리가 나타나서 꼬리를 들어 등을 두드리는 꼴이 마치 자기 등에 타라는 시늉 같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이 호랑이가 어젯밤 꿈에서 산신령이 타고 있던 호랑이와 꼭 같았다. 그래서 산신령님이 보내주신 것이로구나 생각하고 산신령께 깊이 감사드리며 호랑이 등에 올라타고 커다란 바위 밑에까지 가서 그 약초를 캐어다 어머님께 달여 드렸더니 곧 병은 쾌차되었고 두 모자는 오래 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다 한다.
(3) 용당 호수의 청룡과 황룡
<용당 호수 앞에 있던 돌파골>
자연경관이 수려했던 용당마을이 개발에 밀려 없어져 버리는 지경에 이르었지만 옛날 이곳에 있던 호수(湖水)와 관련하여 전해오는 ‘청룡과 황룡' 전설이 있다.
조선시대 양산군의 아전(衙前) 한 사람이 구포의 남창(南倉)에 출장을 오게 되었다. 양산에서 구포까지 오고가고 하룻길이라 남창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데, 꿈에 돌연 흑룡 한 마리가 나타나서 말하기를,
“내일 한나절쯤 올라가면 용당의 정자에서 쉬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정자 밑 큰 못에 청룡과 황룡이 싸우고 있을 것이다. 그 중 황룡은 나의 첩인데 서편의 초군들이 노전(갈밭)에서 쇠를 치고 있을 것이니 걸낫(큰낫)을 달라 해서 죽여라. 만약 내 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몇 발자국 못가서 너가 죽을 것이다." 하는 것이었다.
놀라서 깨어보니 꿈이었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기이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튿날 아침에 볼일을 끝내고 행장을 차려 길을 떠나 용당의 정자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 아래 큰 못을 내려다 보니 꿈에서 말한 대로 청룡과 황룡이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건너편에는 역시 초군들이 쇠를 치고 있었다. 그래서 초군더러 소리를 쳐 걸낫을 가져오라 하여 큰 낫을 잡고 내려다보니 청룡이 아래위로 오르내리고 있어 쉽게 황룡을 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아전이 생각하기를 ‘아이구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으니 한번 낫이라도 휘둘러보자.' 하면서 걸낫으로 황룡을 내려쳤다. 그런데 그만 청룡을 치고 말았다. 그러자 갑자기 하늘에서 구름이 모이고 천둥번개가 치면서 어디선가 흑룡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너는 황룡을 죽여달랬더니 청룡을 죽였느냐? 너를 그냥 보낼 수 없다." 하면서 아전을 물에 빠져죽게 만들었으니 결국 꿈 한 번 잘못 꾸고 그 아전은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양산군에서는 아전이 돌아오지 않아 수소문한 결과 쇠를 치던 초군들의 말을 듣고 가보니 용당의 돌팍골에 아전의 신발과 옷이 남아 있고 시체는 큰 못에 빠졌는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4) 대밭골 호투장 (虎鬪場)
상학산(上鶴山)을 이곳 주민들은 학(鶴)이 남쪽과 북쪽 봉우리를 따라 양 날개를 편 형상이라 쌍학산이라고 한다.
상학산의 북쪽 끝 봉우리를 화산(華山)이라고 부른다
화산은 가파르고 유수한 충적암이 산 전체를 이루고 있는데 이 산의 8부능선에는 장사가 앉았던 엉덩이 표적과 발자국이 있는 장사바위가 있다.
장사바위 아래 돌 언덕(덤)에는 수정돌이 나오는 수정골이 있다. 화산아래 대밭골 하곡쪽 산골 도랑 옆에 평지 빈터가 있는데 이곳이 호투장(虎鬪場)으로 호랑이가 싸우던 곳이다.
대밭골은 현재의 북부산 변전소 뒤쪽 대가 많이 자라던 골짜기를 말하는데 이 산골 도랑 옆에 평지에서 호랑이가 싸웠다고 한다. 예로부터 어느 산골이든 주산신령(主山神靈)이 있다.그러다가 타산(他山)에서 온 난달(떠돌이 호랑이)이 들어오면 본산 신령이 크게 소리를 높여 울어 산 아래 마을사람들에게 난달이 들어왔으니 호환(虎患)을 당하지 말도록 경고를 하고 자신은 난달과 최후의 일전(一戰)을 벌인다.
다행히 본산신령이 이기면 난달은 달아나고 만약에 지게 되면 3일동안 산천을 떠돌며 슬피울다가 타산(他山)으로 떠난다. 그리고 결투에서 이긴 난달이 이 산을 영유(領有)하여 주산신령이 되는데 당분간 산 아래 주민들은 조심하여야 하고 입산(入山)을 삼가하여야 한다.
옛날 산골 주민들이 왕왕 호식(虎食)을 당했다는 소문이 들리면 이는 타산에서 침입한 난달에게 당한 것이다. 주산신령이 강하면 절대로 호환(虎患)이 없었다. 그러므로 주민들은 항시 본산신령에게 지내는 산신제(山神祭)를 정성껏 지냈다. 화명의 대밭골 아래 호투장(虎鬪場)은 본산신령과 난달이 싸웠던 곳으로 이야기가 전해온다.
(5) 대밭골 묘자리
대천마을 윤씨 문중에서 장사가 출생하였던 이야기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120여년전 대천마을의 윤기홍씨가 상(喪)을 입고 묘지를 구하기 위해 유명한 지관(地官)을 초빙하여 명당 자리를 물색하던 중 대밭골(화명동 산70번지)에 묘자리를 정하였다.
이 때 지관이 하는 말이 이곳에 묘를 쓴 후에 집안에 장사 1명, 부자 1명, 풍병환자 1명씩 출생한다고 했다 한다.
그로부터 아들 셋이 출생했는데 장사로 태어난 아들을 두고 부모가 밖에 나갔다 오면 방에서 먼지가 자욱한지라 이상히 여겨 다음에 엿보니 방안에서 나르는 연습을 한다고 먼지가 생긴 것이었다. 한번은 밖에서 들으니 방을 흔드는 소리가 나는지라 그 소리를 듣고 들여다보니 천장을 날라 붙고 천장 종이를 손으로 짚으니 천장 종이가 찢어 지면서 그 길로 밖으로 날라 가버리더란다. 그 후 15일이 경과한 날 한번 온 후로 다시 나가더니 영영 소식이 없었다고 한다.
장사아들 다음에 태어난 아이는 뒤에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아이가 출생한 후 부모는 다음 태어나는 아이가 풍병을 앓게 될까 겁이 나서 묘를 지늘골(비석골)로 이장(移葬)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뒤에 태어난 아이는 풍병환자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이처럼 지관(地官)의 말이 들어맞게 되었는데 이 묘터는 구포~양산간 도로 확장 공사 때 철거되어 다시 이장해 갔다고 한다.
(6) 천국부와 장터걸
화명 와석 동네에 옛날 배를 가지고 소금장사를 해서 큰 부자가 되었던 천국부(千國富)의 집이 있었다. 이곳에 장터걸이 있는데 천국부 한 사람의 재력으로 장(場)이 섰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또한 이 마을에 못이 있었는데 천국부의 돈(엽전)을 씻던 못이었다고 한다. 이만큼 와석동네는 천국부 집과 그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한 마을을 형성했다고 할만큼 천(千)씨가 큰 부자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국부(國富)라는 이름이 전해 오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부자라고 하지만 이처럼 큰 부자가 된 것은 무슨 연유가 있는 것이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천국부가 소금배를 타고 낙동강 상류로 장사를 다니면서 그 당시 가짜 엽전을 싸게 사들여 그것을 배 밑에 깔아 가마니를 덮어놓고 소금물을 퍼부었다고 한다. 그러면 이내 엽전에 녹이 쓸어서 진짜와 구분하지 못할 정도가 되어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옛날 민간인이 가짜로 만든 엽전을 사전(私錢)이라고 했는데 뱃속에서 그것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그런데 또 다른 이야기로는 천국부는 원래 양산 화제 출신으로 40이 넘도록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며 살았다고 한다. 아무리 머슴살이를 해도 끝이 보이지 않았는데 버선을 하나 신으면 바닥은 다 닳아 버리고 버선목만 달고 다녔다고 한다.
하루는 구포장으로 가기 위해 용당 앞 한질(큰길)을 지나다가 세상 살 맛이 나지 않아 신계들에 벌렁 누워 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과객이 지나다가 천씨를 보고 걸음을 멈추고는 하는 말이
“아이구 이놈 봐라! 아이구 이놈 봐라!”
이렇게 탄성을 지르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천씨는,
“여보쇼. 아이구 이놈 봐라고 하니 날 보고 하는 소린데 도대체 왜 그러오?”
하고 물었더니,
“그래 널 보고 하는 이야기다! 너가 지금은 거지처럼 이렇게 맥이 빠져 길가에 누워 있지만 너는 꼭 큰 부자가 될거다.”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천씨는 하도 기가차서,
“왜 그런 소리를 하오?”
했더니 과객은 딴 말은 하지 않고
“너는 부자가 될 것이 틀림 없으니 그리 알아라.”
하고 지나가 버렸다.
그 이후 천씨는 머슴살이를 하면서 고되게 살아 왔는데 하루는 양산 화제 갯벌에 나가서 보니 강에 광선(廣船) 한 척이 정박해 있었다. 그런데 그 배에는 사람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천씨가 배에 들어 가니까 이게 왠일인가, 뱃속에는 엽전이 가득 들어 있는게 아닌가! 그래서 마누라에게 급히 달려가 함께 배 있는 곳으로 와서 이 엽전을 가져 가자고 의논하여 천씨와 마누라는 밤새도록 이고지고 집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그래서 천씨는 논을 사고 밭을 사서 큰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엽전도 사전(私錢)인 것이다.
천씨가 부자가 되어 소금배를 사고 화명 와석에 와서 살게 되었다.
이처럼 큰 돈을 벌었던 천국부가 갑자기 망했다는데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천국부가 새 집을 지으면서 욕심을 내어 너무 큰 집을 지었기 때문이라고 전해 온다.
옛날 왕궁을 지을 때는 대문을 100간 짜리로 지을 수 있어도 백성은 아무리 부자라도 99간 밖에 짓지 못한다고 했는데 천국부는 집을 지을 때 아들이 100간짜리를 짓겠다고 고집했다.
산성에서 굵은 나무들을 베어다가 켜고 불메를 차려 놓고 연장을 제작하여 큰 일을 벌이자 천국부는 아들에게 집을 너무 크게 짓지 말라고 타일렀다.
하루는 천국부가 볼 일이 있어 마차를 타고 그 당시 관행로였던 용당 쪽으로 가다가 용당 말랑걸에 마차를 대놓고 바로 건너다 보이는 와석의 자기집 짓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이 때 마부가 너무 거창하게 일을 시작하여 집을 미처 짓지 못할 것이라고 하면서 집터에서 찌끼미(진대)가 나가더라고 일러 준다.
그러나 이처럼 큰 집을 누가 새로 뜯어 짓겠느냐고 아들을 말리지 못했는데 천국부는 뒤에 역적으로 몰려 결국 패가망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천국부가 망한 이유로 대원군 때 궁궐을 지으면서 상놈이 너무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하여 돈을 뺏아 갔기 때문에 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결국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던 상놈으로서 돈을 벌었지만 양반의 세도에 밀려 망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와석마을에는 천국부의 집터가 있고 그 후손들은 이 동네에 살다가 뒤에 사상으로 이주해 갔다.
망해 버린 천국부 집의 기와는 동래 범어사로 가고 목재는 명호(명지) 소금밭의 땔감으로 가져 가서 쓰였다고 한다.
(7) 허진사와 대장골 도적들
옛날 화명에서 동래로 가는 길인 대장골의 뒷산은 산적의 본거지였다. 그래서 대장골을 일명 대적골, 대정골이라고 했다. 산적들은 해마다 대장골 아랫 동네인 수정 마을에 나타나 집집마다 곡식을 약탈해 갔다. 이 마을에는 큰 부자였던 허섭(許攝) 진사(進士)가 살고 있었는데 산적들에게 동네사람을 대표해서 내가 곡식을 다 줄테니 약탈을 하지말라고 협약을 맺었다. 그래서 산적들은 매년 1회씩 정례적으로 허진사댁에 와서 양식을 약탈해 갔다. 도적의 연락을 맡은 부하가 허진사댁에 와서 며칠 후에 우리가 올 것이니 곡식을 찧어놓고 준비해 달라고 통보를 하였다.
산적들은 지정된 날이 되면 무리를 지어 나타났는데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대문을 잠그고 부녀자를 숨겨 놓고 바깥 출입을 일체 하지 않는다.
산적들은 앞산에 와서 징과 꽹과리를 치면서 법석을 떨었다고 한다.
허진사댁에서는 마당에 멍석을 깔아 음식을 준비해 놓고 하인을 시켜 산적들을 인도하여 불러 들여 대접을 하는 사이에 두목과 허진사는 사랑채에서 대작을 하면서 갖고 갈 물자를 흥정을 하였다.
흥정이 끝나고 곡식 등 물자를 내어 주면 그들은 그것을 받아 유유히 사라졌다. 이처럼 산적의 본거지와 가까운 수정마을은 부자인 허진사 한사람의 공덕으로 산적을 막아 내어 마을 사람들의 피해를 방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허섭(許攝)진사는 실존했던 인물로서 조선 철종 임술년(1862년)에 수정마을에서 태어나 고종 갑오년(1894)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 마을의 안녕을 위하여 많은 일을 했는데 일제 초기인 1914년 구포 구장터에 불이 나서 장터를 재건하기 위한 기금을 모을 때 그 당 시 구포은행이 낸 성금 150원(圓) 보다 더 많은 160원(圓)을 내어 향토를 위한 애착심을 나타내 주고 있다.
그리고 독립운동단체에서 은밀히 자금을 모우러 다녔을 때 화명에 오면 반드시 수정마을의 허진사 댁을 찾았고 허진사는 많은 자금을 선뜻 내주는 인물로 추앙 받았다고 한다.
(8) 신선이 데려간 아이
지금으로 부터 150여년 전 화명동 대천마을에 윤기홍(尹基洪)이라는 선비 한 분이 살았는데 어느 날 밤에 그 부친의 꿈에 신선(神仙)이 현몽하기를,
“천상선동(天上仙童)을 그대에게 점지할 것이니 이 꽃을 먹어라.”
하고 흰꽃 한 가지를 주거늘 그 꽃을 먹은 후 부인에게 태기가 있어 십싹만에 아들을 낳았는데 아기를 낳은 날 밤에 풍우(風雨)가 크게 일고 뇌성(雷聲)이 진동하여 지척을 분별하지 못하였다.
시아버지 되는 선비는 출타하였고 시어머니는 큰 방에서 자고 있었는데 건너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서 잠이 깨어 건너가 보았다.
가 보니 방문은 열려 있고 등불은 꺼져 있는데 안개가 자욱하여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래서 등불을 켜서 들고 들어가 보니 산모(産母)는 기절해 있고 흔적을 보니 아기를 낳았음은 분명한데 아기는 없는지라 산모가 깨어나기를 기다려서 아기의 행방을 물었다.
며느리가 대답하기를 흰옷을 입은 사람 셋이 와서 아기를 데려가면서 이레(7일) 되는 날 자시(子時)에 오겠다 하면서 방문 안쪽 바위에 종이 한장을 붙여 놓고 갔다고 하였다. 이에 벽을 살펴보니 붉은 물감으로 일곱자를 쓴 글씨 한장이 붙어 있으나 도무지 그 글자가 무슨 글자인지 알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집안에서는 아기를 낳았으나 아기가 없어졌으니 이웃과 친척들에게 죽은 아이를 낳았다고 속이고 거짓으로 아기를 갖다 묻는 시늉까지 하였다.
그후 7일만에 신선이 현몽하기를 삼년 후에 올 것이라는 말을 하며 사라졌는데 그 날 밤 산모가 이(蝨)를 잡으려고 저고리를 벗으니 왼쪽 팔에 일곱 글자가 쓰여져 있었다. 그 글자 역시 알아볼 수 없는 글이었다.
그 뒤 삼년째 되는 날 밤 삼경(三更)에 신선 세 명이 와서 아무 말 없이 문 위에 알아보지 못할 일곱자를 붙여놓고 이제는 8년 후에 다시 오겠다고 하며 가 버렸다. 그 뒤 8년째 되는 해 정월에 신선 세 명이 전과 꼭 같은 복장을 하고 와서 “그 아이는 범인(凡人)이 기를 아이가 아니어서 우리가 기르고 있으니 이 말을 누설치 말라. 만일 누설하면 집안에 화가 있으리라.” 하였다.
그러면서 “그 아이는 바다 섬 가운데서 기르고 있으니 안심하라. 때가 되면 알게 될 날이 있으리라.” 하면서 그 아이가 썼다는 일곱자 글이 쓰여진 종이 한장을 주고 갔으나 그 역시 알아볼 수 없었다.
그 뒤로 소식이 끊겨 버렸는데 신선이 넉장 종이에 썼던 글자 21자만이 윤씨 집안에 지금까지 남아서 보존해 오고 있다.
(9) 양산 구포복설비 (龜浦復設碑)의 내력
양산군 용연리 내원사(內院寺) 입구 국도변에 비석(碑石) 셋이 서 있는데 그 내력을 모르고서 이 비석을 보면 어찌된 영문인지 전혀 알 수 없게 되어있다. 비록 한학에 능한 분이 보더라도 영상대감 이유원(領相大監李裕元)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국도변에 세워진 연유를 알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그 비석 이면에 <구포복설장두 우석규, 서상로, 이기수(龜浦復設狀頭 禹錫奎, 徐相魯, 李基洙)>라 씌어 있을 뿐 아무런 설명도 붙어 있지 않으니 비석 전면의 인물과 어떤 관계이며 구포복설(龜浦復設)이란 무엇인지 전혀 알 길이 없을 것이다.
이 세 비석에 얽힌 전래의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1869년(高宗6:己巳)에 양산 소속이던 구포면(龜浦面)이 인부족 세부족으로 동래군에 탈속(奪屬)되게 되었다. 양산고을에서는 군민이 하나같이 분개하여 구포면이 다시 양산군에 환속되도록 요로에 여러번 소진(疏陳)하였으나 시일만 지연될 뿐, 아무런 실효를 거두지 못한 나머지 향중 공론을 조정에 직소하기로 정하였다. 사림(士林) 우석규(禹錫奎)를 필두로 서상로(徐相魯), 이기수(李基洙) 등을 장두(狀頭) (상소하는 글의 우두머리)로 하여 세사람이 직접 한양까지 가서 성상을 배알하고 향론을 주달(奏達)토록 선정하였다.
이 세사람은 향중의 공의(公議)로 추대된 바이니 그 사명의 지중함을 통감하면서 한양 천리길을 죽장망애(竹杖忘愛)로 출발하였다. 때마침 늦은 봄이라, 산천 경개는 녹음이 무르익어 미풍에 하늘거리며 바위 사이의 봄꽃은 지나가는 봄을 아쉬워하는 듯한데, 숲속에서 지저귀는 산새소리는 먼길을 떠나는 세 용사를 반겨주는 듯도 했다. 이리하여 낮이면 산천경관에 피로를 달래고 밤이면 여사(旅舍)의 한등(寒燈) 아래서 여독을 풀어가며 천신만고 끝에 한양에 당도하였다.
시골 선비가 한양에 지기(知己)가 있을리가 없으니 백방으로 주선해 본들 성상(聖上)을 배알하기란 아예 가망 밖이니 세 사람은 절망 속으로 빠져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중대결심을 하게된다.
“우리는 향중 사림의 추대를 받은 몸이니, 그 책무의 중대함을 생각한다면 비록 죽음이 닥치는 한이 있더라도 어찌 물러설 수 있겠으며 이러한 심상한 방법으로만 시종하다가는 할 일 없이 헛걸음 할 수 밖에 도리가 없지 않겠는가. 범의 새끼를 얻으려면 범굴에 들어가야 하고 큰 일을 감행하려면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 마땅히 대장부로서 감사심(敢死心)을 가지고 최후의 방법을 취하자”
이렇게 의논한 끝에 남산 봉수대(熢燧臺)에 올라가서 밤 되기를 기다려 봉화를 올리면서 무슨 변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는데 삽시간에 온 장안이 술렁이더니 즉각 군관들이 당도하여 성화같이 꾸짖어 말하되
“너희들은 무엄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구나, 봉화는 나라가 위급한 때에 올리는 것인데 이렇게 무모한 짓을 하였으니 중벌을 면치 못하리라”
이렇게 호통이 떨어지자, 세 사람은 추호도 겁내는 기색이 없이
“저희 고을에 일대 신원사(伸寃事)가 있습니다만은 천청(天聽)에 주달(奏達)할 길이 없어 이와같은 무엄한 죄를 범하였습니다. 비옵건데 저희들의 원사를 성상께 주달할 길을 열어 주옵소서”
이런 간청도 주효하지 못하고 그날 밤으로 세 사람은 체포 구금되었다.
며칠 후 삼인은 의금부(義禁府)에 끌려나가 추국(推鞠:중죄인을 다스리는 것)을 받게 되었다. 국문(鞠問)하는 관원(官員)은 추상같이 호령하면서,
“너희들은 무슨 원사가 있어 이렇듯 무엄한 행동을 자행했느냐? 이실직고(以實直告)하렸다.”
하거늘 삼인은 복지돈수(伏地頓首)하면서도 당당히 아뢰기를
“개국 이래로 군현(郡縣)은 서로 경계가 엄연하므로 이로써 백성들의 생업이 안정되어 있으며, 이것은 수백년 이래 한번도 변함이 없었사온데 이번 양산(梁山)고을의 소속인 구포면이 불의에 동래군(東萊郡)으로 탈속되었으니 이는 반드시 동래군내의 세도가들의 농간이라 아니할 수 업사오며, 구포면민으로서도 일상생활에 관부출입이 생소하여 친화에 해(害)되는 바 적지 않사오며 향민들 상호간에도 여태껏 한 울타리 안에서 사는 친족처럼 지내오던 사이가 이제는 남의 집 식구처럼 인식되므로 상부상조의 미품에 결여됨이 있을까 저어함이요, 또 경제적 유대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차질이 발생하고 있으므로 온 국민이 억울한 마음 금할 수 없어 수차에 걸쳐 요로(要路)에 진정하였으나 번번히 묵살되므로 마지막으로 우민(愚民)등이 목숨을 걸고 성상께 주청(奏請)코자하여 이렇게 엄청난 죄과를 저질렀사오니 우러러 바라옵건데 우민 등에게는 어떤 죄를 내리시더라도 이미 각오한 바가 있사오니 우민등의 숙원인 구포환속 문제만은 청허하여 주시옵기를 간곡히 비오며 아울러 전 양산군민이 우러러 천은(天恩)에 감읍(感泣)케 하는 날이 하루 빨리 올 수 있게 해주시옵기를 돈수백배(頓首百拜)하옵나이다.”
이렇게 답변하였던 바 이 추국(推鞠)한 내용이 당시의 영상대감 이유원(李裕元)에게 보고되었다. 영상대감 이유원은 특별히 삼인의 의기(義氣)를 가상히 여겨 봉수대에 봉화한 사건은 면책 불문하고 또 구포면은 즉시 양산군에 환속되도록 조치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향민들이 그 공적을 치하하기 위하여 비석 셋을 세웠으니, 그 첫째가 당시의 영상을 기리는 비석인데 그 비석 전면(前面)에는 <領相大監李閤裕元永世不忘碑> ‘閤은 합하(閤下)의 준말인데 정일품(正一品) 관원의 성(姓)밑에 붙이는 경칭’이라고 각자(刻字)되어 있으며 그 후면(後面)에 <龜浦復設狀頭>라 두서하고 삼인의 성명만이 병기(幷記)되어 있다. 삼인만의 비석을 마땅히 따로 건립해야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영상의 비석 뒷면에 붙인 것은 관직이 없는 사람은 비석을 세울 수 없는 당시의 법 때문에 영상의 비석 뒷면에 각자하여 그 공적을 더욱 빛나게 남기려는 의도에서이다. 둘째 비석은 복설 당시의 군수를 기린 비석이니
(행군수어공윤중영세불망비)『行郡守魚公允中永世不忘碑』라 씌어 있고, 또 하나는 비석 건립 당시의 군수를 기린 것이니
(행군수이공능화애민선정비)『行郡守李公能華愛民善政碑)』라 씌어 있다.
(10) 백양산 낭(郎)바위
구포지역의 주산(主山)인 주지봉(蛛蜘峰)에서 백양산 본산 능선을 따라 가는 600m고지 정상에는 옛날 신라의 화랑(花郞)들이 말을 타고 훈련을 했다는 평평한 벌판이 펼쳐지는데 이곳에 있는 큰 바위를 화랑들이 찾아 온 곳이라 화랑바위, 낭(郎)바위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이 바위는 원래 농바위라는 이야기가 있다.
모양이 농(옷장)처럼 생긴 네모진 바위인데 천지개벽(天地開闢)으로 온 천지가 물에 잠길 때 이 바위만은 농처럼 물 위에 떠 있었기 때문에 농바위라는 것이다. 이 농바위는 영험이 있다고 한다.
여름철에 가뭄이 심할 때 구포사람들이 한밤중에 올라와 농바위 앞에 제상(祭床)을 차려놓고 소나무를 베어다 불에 태우면서 비가 오기를 빌었다.
이렇게 나무를 태우면 솟아오르는 연기가 꼭 구름처럼 하늘에 번져갔는데 기우제(祈雨祭)를 올린 후 3, 4일이 지나면 반드시 큰 비가 왔다고 한다.
이 산에서 흘러내리는 도랑의 물줄기가 12골인데 비가 쏟아지면 골짜기마다 흘러내리는 물길의 흐름이 꼭 백마가 내려 오는 것처럼 보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