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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전쟁범죄 - 사브라 샤틸라 학살사건
게시물ID : panic_6988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라군Fish
추천 : 18
조회수 : 5651회
댓글수 : 18개
등록시간 : 2014/07/07 20:17:39


우리는 베이루트 남동쪽의 나이팅게일 계곡에 있는 샤흐르트 와디에 모였다
그 날은 9월 15일, 수요일 이었다. 우리는 대략 300명쯤 됐는데, 베이루트 동부와 레바논 남부, 그리고
북쪽의 아카라 산맥 출신들이었다. 나는 전직 태통령 캬르밀 샤모운의 <타이거 민병대> 소속이었다.
팔랑게(Falange)<이스라엘 특수부대>의 장교가 우리를 소집해서 회합장소로 데리고 갔다.

그들은 우리가 "특수활동" 을 해 줄것을 바란다고 말했다. 장교들은 우리에게 "당신들은 선의 사신" 이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당신들 각자가 복수자" 라고 말했다.

그때 푸른 제복을 입은 이스라엘 군인 10여명이 도착했다. 그들은 계급장을 달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카드놀이를 햇는데 모든 유태인들이 그런 것처럼 경음 "h" 를 "ch"로 발음하는것을 빼면 아랍어를
잘했다. 그들은 샤브라와 샤틸라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에 대해 얘기를 주고 받았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했고 우리는 그것을 기다렸다. 우리는 우리의 활동에 대해 아무것도 발설하지 않겠다고 맹세해야 겠다. 
밤 10시에 우리는 이스라엘군이 우리에게 준 미군 트럭에 올랐다. 우리는 트럭을 관제탑 근처에 세웠다. 그곳의 이스라엘 군 진지
바로 옆에는 우리가 타고 온 것과 똑같은 트럭이 이미 여러대가 세워져 있었다.

팔랑게의 제복을 입은 이스라엘인 몇명은 부대와 함께 있었다.
 우리의 장교들은 '너희들과 동행할 이스라엘 친구들이 임무수행을 도와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가능한 한 화기를 사용하지 말것을 지시했다. "모든 것이 조용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다른 동료들은 쳐다봤다. 그들은 총검과 칼로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골목에는 피투성이 시체들이 시체들이 즐비했다.

반쯤 깬 여자들과 아이들이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바람에 우리의 계획 전체가 무산될 위험에 쳐했다.

비명소리가 난민촌 사람들을 깨운 것이다.

그 때 나는 그 속에서 우리의 비밀모임에 참여했던 이스라엘인들을 다시 목격했다. 그 중 하나가
우리에게 난민촌의 입구에서 뒤로 물러나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사격을 시작했다.

이스라엘인들은 조명탄을 사용해 우리를 지원했다.

그곳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어떤 인간들인지 보여주는 충격적인 장면들이 있었다.
여성을 포함한 몇몇 사람들이 작은 골목 안에서 당나귀들 뒤에 몸을 숨겼다. 우리는 당나귀들 뒤에
숨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끝장내기 위해 불행하게도 그 <불쌍한 짐승>들을 맞혀 쓰러뜨려야만 했다.
당나귀들이 고통스런 비명을 내지를때 그 모습이 나의 뇌리에 박혔다. 그것은 소름끼치는 장면이었다.


한 동료가 여자와 어린이들로 가득찬 집으로 들어갔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가스 난로를 바닥에 내던졌다. 우리는 그 쓰레기같은 인간들을 지옥으로 보냈다. 
새벽 4시쯤 우리 조는 트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침해가 솟을 무렵 우리는 다시 난민촌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시체들을 지나치며 걸었다. 시체들에 발이 걸려 넘어지기도 하면서 우리는 모든 목격자들을 사살하고 칼로 찔러 죽였다.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일단 몇번 해보고 나면 쉬운 일이었다.

그리고 나서 이스라엘 군의 불도저가 왔다. "모든것을 땅에 묻어라. 목격자는 하나도 살려두지 마라."
하지만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곳에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사람들이 이리저리 도망치면서 엄청난
혼란이 벌어졌다. 그들을 모두 땅 밑에 묻는다는것은 불가능했다.

계획이 실패햇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수천명이 그곳을 탈출했다.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목숨을 건진 것이다.

그 결과 이제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학살에 대해 얘기하고 있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동정하고 있다.

우리가 겪은 고난을 누가 평가해 줄까? 생각해 보라 나는 샤틸라에서 물도 음식도 먹지 못하고 꼬박 24시간 동안 싸웠다.

- 학살에 참여한 민병대원 인터뷰 (독일의 주간지 슈피겔 1983년 2월)


학살당한 아이를 보며 오열하는 아랍여자

 

사브라 샤틸라 학살사건은 1982년 6월부터 9월까지 벌어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기간에 벌어진 민간인 학살사건이다.

 

1982년 7월 테러리스트들의 미사일테러에 고심하던 이스라엘 방위군은 레바논 남부를 점령하고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미사일기지 및 저장고를 제거하고 접경지역에 40킬로미터의 안전지역을 설치하는 것이 당초 계획이었으나

당시의 이스라엘 국방장관이었던 아리엘 샤론은 베이루트까지 점령하고

기독교동맹인 바시스 제마엘을 레바논 대통령으로 지명하는 극단적인 계획으로 발전시킨다.

하지만 팔랑게당 지도자 바시스가 대통령이 되었으나 취임 9일전 폭탄테러로 살해된다.

이를 계기로 바시르의 죽음에 광분한 민병대와 동조하는 이스라엘군에 의해 극단적인 상황에 빠진다.

 

레바논 파시스트 정당 팔랑헤(팔랑게)


 1982년 9월16일 레바논의 파시스트 정당인 팔랑게당 소속 기독교 민병대가

이스라엘군의 방조 속에 서베이루트 사브라와 샤틸라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에 난입해 남녀노소 무차별 학살을 시작했다.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한 지 석 달 만에 그리고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눈물 속에서 시리아로 근거지를 옮긴 지

불과 수주일 만에 일어난 이 학살 사건은 뉴욕타임스 레바논특파원에 의해 보도되어 전세계에 놀라움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비무장 민간인을 향해 자행된 학살사건

이스라엘은 팔랑헤의 학살을 더욱 부추겼다


 이스라엘은 PLO가 시리아로 철수하는 조건으로 휴전이 이뤄지면 서베이루트로 진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미국 레이건 행정부에 한 바 있지만

메나헴 베긴 총리와 아리엘 샤론 국방 장관은 이 협정을 무시하기로 결정했고

9월15일 아침 이스라엘군이 서베이루트로 밀려들어와 이튿날에는 전지역을 장악했다.

미국과 레바논 정부는 이스라엘에 항의했지만, 힘없는 레바논 정부만이 아니라 힘있는 미국 정부도 말과 속셈이 달랐던 듯하다.

이스라엘군은 중무장 병사들과 탱크로 사브라와 샤틸라 난민촌을 포위한 뒤 레바논 극우파 민병대원들을 난민촌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 날 오후부터 18일 오전까지 만 이틀동안 벌어진 ‘살인 파티’의 희생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국제적십자사의 비교적 보수적인 집계에 따르더라도 피살자는 2,750명에 이른다. 이 수치는 주로 현장에 널브러져 있던 시신들을 기초로 한 것이다.
  
  이사건은 레바논 헤즈블라 무장투쟁단체가 
탄생하게 된 계기가 되어 헤즈블라에 의해

미군 241명이 죽은 베이루트 미해병대 자살폭탄트럭테러가 일어나게 되었다.

또한 이스라엘군의 방조책임을 물어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아리엘 샤론이 물러나게 되었다. (현재 이스라엘 총리)


아리엘 샤론
샤론은 1983년 미국에서 민간인 학살과 관련된 범죄에 관한 재판을 받았으나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 후 그는 자신을 변호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

 

유대인들은 학살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오직 기독교인들만이 그런 학살을 자행합니다.

나치 또한 그러했고, 결국은 기독교인들의 문제가 아닙니까

 

결국은 악당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루게 된다. 나치가 그러했고 일본제국 또한 그러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당당한 위세를 이어나가고 있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을 다룬 애니메이션 '바시르와 왈츠를'

 


출처 : http://bbs2.ruliweb.daum.net/gaia/do/ruliweb/default/etc/327/read?articleId=21864160&bbsId=G005&itemId=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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