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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교철학, 道
게시물ID : phil_777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얍테
추천 : 0
조회수 : 47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12/21 18:18:01

    도교철학에 대해 언급하기 이전에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도교는 절대로 뇌호흡이나 흔히 말하는 '도를아십니까' 같은 저질스런 사이비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많은사람들이 생각하는 도교는, 단순히 '도를아십니까'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거니와, 조금이라도 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도교철학을'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거 아냐?' 라고 오해하고 있는 경우가 매우 많다. 그렇게 오해할만한 측면도 어쩔 수가 없는 것이, 요즘 길거리에만 나가더라도 마음수련이라고 하면서 계속 끈질기게 가던길 막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제사를 지내야 한다느니 하면서 끌고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이 글을 보는 사람들만이라도 (하루에 10명도 안들어오는건, 논외로 하고) 도교철학에 대한 오해를 풀고, 삶에 있어서 살아가는 방식을 설명해주는 철학으로 이해 해 주었으면 좋겠다.


  사실 우리가 아주 많이 쓰는 용어중에 '도덕'이라는 단어가 있다. 흔히 어떤 사람이 잘못된 짓을 저질렀을때 '저 사람은 도덕성이 글러먹었어.' 라고 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냥 별 생각 없이 도덕이라는 단어를 거리낌 없이 쓰고는 하는데, 이 도덕이라는 단어는 사실 도교철학에서 나온 단어이다. 도덕이란 바로 道와 悳의 합성어인데, 이 두개의 키워드가 도교 철학의 핵심이 된다. 특히 道라는 개념의 중요성은, 도덕경에 나오는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라는 단어만 보더라도 직감이 된다. 도를 말로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라니, 참 애매모호하고도, 당췌 '도가 뭐야?' 라는 말이 나올만한 문장인데, 뭐 도라는 것을 깨달으면 그것이 성인이겠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道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그나마 노자가 남긴 유일한 책인 도덕경에서 아주 스무스하게 설명 해 주고 있는데, 뭐 도덕경에서도 도가도비상도라고 하면서, 도라는 것을 규정하는데 있어서 아주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지만 (그래서 도교철학이 이상한 사이비종교로 변질됐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도덕경에서 그 도라는 것이 무엇일까 흔적을 한번 찾아보자.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도덕경 1


(말로 규정할 수 있는 도는 불변의 도가 아니요,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불변의 이름이 아니다. 천지의 시작을 일컬을 때는 無라고 하며, 만물의 어미를 일컬을 떄는 有라고 한다. 불변의 無는 만물이 나타나기 전 상태를 기술하는 관점이며 불변의 有는 만물이 나타난 뒤의 상태를 기술하는 관점이다. 無와 有는 동일한 실체를 반대편에서 규정하는 것이다. 그 동일한 실체는 파악될 수 없다. 그윽하고 요모한 그것이 모든 것의 원천이다.)


有物混成 先天地生

寂兮寥兮 獨立而不改

周行而不殆 可以謂天下母

吾不知其名 字之曰道, 도덕경 25


(천지가 생기기 전에 어지럽게 뒤엉킨 그 무엇이 있었다. 소리도 없고 형상도 없는 것.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를 바꾸는 일도 없이 자유자재로 운영하되 어김이 없다. 그것은 바로 천하의 어미이다. 그 본래의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그것을 道라고 부른다.)



  도덕경에서 나오는 도에대한 언급들이다. 더 많은 언급들이 있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 도에 대한 핵심적인 설명은 이 두 구절인 것 같다. 두 구절을 읽어본다면 대충 감은 오겠지만, 道라는 것은 결국 모든것의 근원이자 근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천지가 생기기 이전에 어지럽게 뒤엉킨 무엇. 소리도 형상도 없고 스스로 자유롭지만 어김이 없는, 천하의 어미와도 같은 존재인 것이 바로 도인 것이다. 결국 道의 개념은, 모든 것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도교철학에서는 道를 따르는 삶이 성인의 삶 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생각해보건데, 위에 나와있는 것처럼 道가 모든 것의 근본이라는 것을 납득한다고 하더라도, 도라는 것을 따르는 삶이 대체 어떤 삶인지, 종잡기 쉽지가 않다. 아니, 사실 道라는 것이 과연 어떤것인지, 그것을 따르는 삶이 善한 삶인지도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 말할 수 있는것은, 도를 따르는 삶이 대중적으로 말하는 선한 삶이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不居

夫唯不居

是以不去, 도덕경 2


  (만물을 자라게 할 뿐, 간섭하지 않고 만물을 낳고도 소유하지 않는다. 일을 하면서도 힘들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공을 이루고도 그 자리에 머물러 앉지 않는다. 머물러 앉지 않으니 사라질 리도 없다.)



大道氾兮 其可左右

萬物恃之而生 而不辭...

衣養萬物 而不爲主...

萬物歸焉 而不爲主...

以其終不自爲大 故能成其大


(큰 도는 온 세상에서 자유자재로 작용한다. 만물은 도로 말미암아 생기지만 도는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지 않는다...

만물을 입히고 기르면서도 그 주인이 되려 하지 않는다...

만물의 마지막 의지처이면서도 그 주인이 되려 하지 않는다...

끝내 스스로 크다고 하지 않는 것, 바로 그것 때문에 큰 것이 된다.)




  도는 모든것의 근원이다. 하지만 도는 그 어떤 것에도 주인이 되려 하지 않으며, 소유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스스로 크다고 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바로 도의 아이덴티티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 이것을 도가 겸손하다라고 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는데, 이것은 결코 도가 겸손하다는 것이 아니다. 도는 모든 세상 만물의 어미이고 온 세상에 자유롭게 작용하지만, 도는 그냥 있는 것이며, 결코 다하는 법도 없이, 거기서 모든 것이 나오며, 또 언제나 나오는 것일 뿐이다. 다시말하자면 도는 무언가 의도적인 행위가 아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그곳에서 나오는,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자애로운 하나님'과는 거리가 먼, 그냥 단순한 모든것의 근원일 뿐이다. 도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도는 자애롭지 않다. 아니 감정이라는 것 그 자체도 없다. 그냥 모든것에 작용되는, 그냥 단순히 모든것이 거기서 나오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道의 특성 (그냥 있는 것일 뿐인, 결코 사람을 사랑하는 것 따위가 아닌)은 도를 따르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성인에게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도덕경 5


(천지(도)는 인애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고 만물이 제 갈 길을 가도록 한다.

성인은 인애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고 백성이 제 갈 길을 가도록 한다.)


是以聖人之言曰

我无爲也 而民自化

我好靜 而民自正

我无事 而民自富

我欲不欲 而民自樸


(성인이 말하되 내가 무위를 하니 백성이 저절로 그리 되고, 내가 고요함(靜)을 좋아하니 백성이 저절로 바르게 되고 내가 일을 벌이지 않으니 백성이 저절로 부(富하게 되고 내가 욕심이 없으니 백성이 저절로 소박하게 된다.)


  도교철학에서의 성인은 유학에서의 성인과는 달리, 결코 인자하거나 백성을 사랑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단순히 백성을 도에 따르는 삶으로 이끄는 존재일 뿐이며, 자신이 도에 따르는 삶을 살아가는 인간일 뿐이다. 성인은 결코 백성을 사랑하지 않으며, 도는 결코 만물을 사랑하지 않는다. 성인은 단순히 자신이 도를 따라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며,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자연스럽게 도를 따르는 삶을 살게된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유학과 도교철학은 첨예한 대립을 하게 된다. 유학은 성인을 '백성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이끄는 사람'으로 규정한다면, 도교철학에서의 성인은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백성이 스스로 도를 따르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사람'으로 규정한다. 즉, 이 두 철학은 근본적으로 통치체계에 대한 전혀 반대되는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에 관한 글은... 음 나중에 한번 자세히 쓰기로 하고. 자꾸 이런식으로 넘어가는게 많은 것 같기는 한데 ㅡㅡ)



  그렇다면 도를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할까. 도덕경에서는 그 나름대로의 해답을 내린다.


企者不立 跨者不行

自見者不明 自是者不彰

自伐者無功 自矜者不長, 도덕경 24


(발돋움하는 사람은 서지 못하고 껑충껑충 뛰는 사람은 멀리 가지 못한다.

스스로 드러나고자 하는 사람은 밝지 못하며, 스스로 내노라 하는 사람은 빛나지 못한다.

스스로 뻐기는 사람은 공이 없으며, 스스로 자랑하는 사람은 윗사람이 될 수 없다.)



  사실 생각해보건데, 세상의 거의 대부분의 일들은 인간이 무언가를 하기 때문에 생긴다. 인간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어떤 행동을 하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껑충껑충 뛰려는 사람은 멀리 뛸 수 없으며, 스스로를 자랑하는 사람은 윗사람이 될 수 없다. 즉, 도교철학에서 도를 따르는 사는 삶의 방식은 '무위자연(無爲自然), 다시말해 고의적으로 무슨 일을 하려고 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를 따르는 삶이다.



  글이 어쩌다보니 길~어졌음으로, 무위자연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도교철학은 단순히 헛구름만 잡는, 허왕된 이야기가 아니다.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지도자는 어떤 방식으로 행동해야 하는지, 도교철학에서의 설명을 차차 글로 풀어 나갈 계획이니, 조금 따라와 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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