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창환, 결에 관하여
나무에만 결이 있는 게 아니라
돌에도 결이 있는 걸 알고 난 후
오래된 비석을 보면 손으로
쓰다듬는 버릇이 생겼다
돌의 결에 맞추어 잘 쪼아낸
글씨를 보면
돌을 파서 글자를 새긴 것이 아니라
글자를 끌어안고 돌의 결이
몸부림친 흔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나간 기억들,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 같은
파르르 떨다 파득거리다
이제사 먼지 속에 가라앉은 것들
목숨이 제 결을 따라
고꾸라진 흔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무거운 밤 내 앞에 있는 목숨
마주 보며 나는
혹 한 번쯤 더 고꾸라질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어느 무거운 밤, 어둠 속에서
오래된 비석 같은
흔적, 결 따라 파인, 쓰다듬을 때
지나간 시간들, 큰 결 따라
흔들리는 무늬였음을 깨닫는다
민병도, 정거장
그 때 거기서 내렸어야 했다는 것을
기차가 떠나기 전엔 눈치채지 못했네
창 너머 벚꽃에 취해, 오지 않는 시간에 묶여
그 때 거기서 내렸어야 옳았다는 것을
자리를 내줄 때까진 까맣게 알지 못했네
갱상도, 돌이 씹히는 사투리와 비 사이
그저 산다는 것은
달력에 밑줄 긋기
일테면 그것은 또
지나쳐서 되돌아가기
놓치고 되돌아보는 정거장은 더욱 환했네
김윤현, 수평선
산다는 건 망망대해
혼자서 애태우며 출렁거리는 일이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음성으로 중얼거리다가
바람이 조금 불어도 온 몸에 주름이 지는데
주름이 한 번 지면 한없이 번지는데
갈 길이 몸 안에 있어도 멀고멀어
자신도 모르는 소리를 하기는 하는데
생은 비늘처럼 부서지기만 반복한다
몸통인 듯 발인 듯 해저까지 딛고서
그래, 생은 영원히 흔들리는 망망대해라며
횡으로 길게 입을 다물면
어떤 이는 구부러지지 않는 삶으로 읽는다
김영태, 누군가 다녀갔듯이
하염없이 내리는
첫눈
이어지는 이승에
누군가 다녀갔듯이
비스듬히 고개 떨군
개잡초들과 다른
선비 하나 저만치
가던 길 멈추고
자꾸 자꾸 되돌아보시는가
황인숙, 아직도 햇빛이 눈을 부시게 한다
버스가 모퉁이를 도는 순간
햇빛이 유리창처럼 떨어졌다
아찔!
나무가 새겨진다
햇빛이 미세하게
벚꽃을 깎아낸다
벚꽃들, 뭉게뭉게 벚꽃들
청남빛 그늘 위의
희디흰 눈꺼풀들
부셔하는 눈꺼풀들
네게도 벚꽃의 계절이 있었다
물론 내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