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30대 중반인데도 점심시간에 스타크를 동료들과 즐기고 퇴근 후 집에서 가끔씩 한판을 하고 있는데
훈훈한 기사가 있어서 이렇게 펌질했습니다.
오마이뉴스 , 사는 이야기 중에서 -------------------------------------------------------------------------------------------
아들, 한판 붙자." "예, 좋아요."
"절대 안 봐 줄 거예요." "그래, 임마. 나도 안 봐 줘."
"초장에 박살을 내 버려야지." "웃기지 마. 아빠도 이번엔 만만치 않을 걸."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대화 후 아들과 아버지는 각자 컴퓨터 앞에 앉습니다.
"비겁하게 '맵핵'하기 없기에요." "자식, 아빨 뭘로 보고. 맵핵? 너나 하지 마라."
"아빠, 피자 한 판 내기 어때요?" "그래, 좋아. 돈부터 내. 짜식 피자 사고 싶은 모양이네." "아빠가 내게 될 거예요. 아무리 내가 아빠한테 질까봐…." "임마,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아는 거야."
"로스트 템플(Lost temple)이다." "아빠는 푸토(프로토스)만 하니까 난 랜덤으로 할게요."
로스트 템플은 뭔지 푸토는 또 뭔지 암호 같은 말들을 주고 받은 부자는 이제 더 이상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것이니까요.
게임 중독에 빠진 아들을 닮아간 아버지
평소 과묵한 편인 남편은 이상하게도 스타크래프트 게임만 시작하면 아들에게도 승부욕을 드러내며 아이로 돌아갑니다. 게임에는 문외한인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웃기는 장면입니다.
남편이 스타크래프트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중학생이었던 아들이 게임에 빠져 학업을 등한시할 때부터입니다. 학교만 다녀오면 가방을 내려 놓기가 무섭게 컴퓨터에 달라 붙어 일어날 줄 모르던 녀석은 게임 중독에 가까웠습니다. 한참 사춘기였던 아들은 컴퓨터 게임을 못하게 하는 우리의 시선을 피해 PC방을 전전하기도 해 갈등은 점점 커져만 갔습니다.
당시 이상한 벌레(?)들이 기어다니는 것 같던 전쟁 게임에 매달려 있는 아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우리 부부의 눈길을 붙잡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인터넷 신문 <딴지일보>에 실린 어른들을 위한 스트크래프트 교본(?)이라는 기사였습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했듯이 저와 남편은 아들을 이해하기 위해 기사를 열심히 탐독했습니다. '테란'이니 '저그'니 '골리앗'이니 하는 듣도 보도 못한 생소한 캐릭터 이름은 물론 각 캐릭터별 기능이나 특성들이 저마다 달라 읽어도 읽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일치감치 배우기를 포기했지만 남편은 달랐습니다.
기왕에 아이를 이해하기 위해 배우기로 했으니 끝까지 열심히 해 보겠다며 늦은 밤까지 컴퓨터에 매달리는 날들이 늘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연습 삼아 스타크래프트를 하고 있는 남편의 모습이 아들의 눈에도 띄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곁눈질로 슬금 슬금 아빠의 게임을 지켜 보던 아들은 슬그머니 의자를 끌어다 아빠 곁에 앉더니 이윽고 훈수를 두는 겁니다.
"아빠, 상대가 뮤탈로 공격할 것 같은데 질럿은 그만 뽑고 드레곤이나 포톤으로 방어해야죠." "어, 그래? 그럼 포톤이라도 깔아야 되겠네."
"이제 질럿을 발업시켜요." "어? 그래, 그래."
"한방에 밀어 버려요." "GG(GOOD GAME)~. 이겼다. 하하하!"
"와하하. 아들 덕에 이겼네. 그런데 아빠도 잘하지? 언제 아빠랑 한판 붙을래?"
두꺼비집을 내리고서야 남편을 멈출 수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개와 고양이처럼 앙숙이던 부자는 갑자기 친해졌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은 밥상이고 거실이고 아들과 마주 앉기만 하면 게임 이야기를 했습니다. 텔레비전도 게임 채널만 보면서 마치 프로 게이머가 되기라도 할 것처럼 게임에 열을 올리더니 이윽고 아들과 똑같은 중독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여봇! 지금이 몇 시야? 새벽 2시에 잠도 안 자고 뭐 하는데? 지금 애들처럼 당신이 게임이나 하고 있을 때냐구? 벌써 며칠째야? 애들 보고 하지 말라던 땐 언제구 어른이 이게 뭐하는 거야?"
남편은 핏발이 선 눈으로 잠시 저를 바라보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 다시 모니터에 집중합니다.
"여봇! 안 들려?" "……."
결국 저는 그날 두꺼비집을 내리고서야 컴퓨터 앞에 본드로 붙여 놓은 듯한 남편을 떼어 낼 수가 있었답니다.
아들을 게임 중독에서 빠져나오게 하려다 오히려 게임 중독이 된 아버지를 보셨나요? 정말 이상한 것은 그렇게 게임을 좋아하던 아들이 아버지가 게임에 빠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거짓말처럼 게임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오히려 남편을 닥달하는 저에게 충고까지 합니다.
"엄마, 그냥 두세요. 지금 한참 재미있을 때야. 나도 아빠처럼 저런때가 있었어요. 자려고 눈을 감으면 천장에 맵이 나타나고 질럿이 보이고 그런다니까…. 조금 지나야 돼요. 기다려 주세요." "어이구, 그래? 너도 한패라 이거지? 동병상련이니? 가슴 아프다, 야." "암튼 엄마 잔소린 알아 줘야 돼."
지금 생각하면 아들 말이 맞았습니다. 한동안 출근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게임에 빠져 지내던 남편도 사람들의 무관심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서서히 중독(?)에서 빠져 나왔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남편은 '한판'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답니다. 큰집과 함께 떠난 지난 여름 휴가에서 남편과 우리 아이 둘, 큰집 조카, 그렇게 넷이 사라져 몇 시간째 보이지 않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한참을 찾아 다니다 보니 묵고 있던 콘도 지하 PC방에서 둘씩 편을 먹고 몇 시간째 스타크래프트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때 애들과 함께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사십대의 동생을 바라보는 오십대의 아주버님 얼굴은 마치 어릴 때처럼 동생에게 꿀밤을 한대 먹이고 싶다는 표정이었답니다.
다음 주에 설욕전 한판 붙어요
"와아. 내가 이긴다." "이럴 수가¨안돼…."
"우하하하. GG쳐라, 이눔아." "우아, 이럴 수가. 정말 미쳐…" "와, 아빠가 이겼다. 형이 졌어. 우와! 엄마, 아빠 정말 대단해요!"
"대학생 아들하고 스타크래프트 떠서 이긴 사십대아빠 있음 나와 보라 그래. 우하하! 거참 통쾌하네."
결국 아들은 그날 피자 값으로 만원을 내야 했습니다.
"야, 아들한테 이기고 피자도 얻어 먹으니 이게 왜 이리 맛나냐? 세상에 둘도 없는 맛이다, 야. 당신도 먹어 봐. 이거 내 전리품이야!" "아이구, 자랑스럽기도 하겠수. 암튼 엄마도 잘 먹을게. 고맙다, 아들아. 근데 혹시 져 준 거 아니니?" "이 사람이? 날 뭘로 보고… 말 해 봐. 봐 준 거야? 실력 대 실력이지?"
우쭐대는 남편에게 아들은 정말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입니다.
"아빠, 다음 주에 설욕전 한판 붙어요. 이대론 정말 억울해." "그래, 그래. 아무때나 오케이야. 자식 실력도 없으면서… 하하하!"
아들과 한가지라도 대화가 통하는 관심사가 있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저렇듯 게임 이야기만 나오면 서로를 이겨 먹지 못해서 안달인 부자를 보면 말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난감하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