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집회 시위, 파업 진압'과 영국의 판결]
제가 영국에서 경찰학 공부할 때 충격적으로 접했던 판결 하나는,
도로를 막고 '원전 반대' 시위를 하던 주민들을 강제 해산시키고 주동자와 반발자 연행하라는 지방경찰청장의 명령을 거부하고 평화 유지와 해산 설득을 장시간 했던 경찰관에 대한 징계처분의 정당성 관련 사안이었습니다.
쟁점은, 현장 경찰관의 '판단'과 경찰조직 위계질서 상의 '지시' 중 무엇이 더 법적인 우위에 있느냐는 것이었죠.
판결은, "현장 경찰관의 판단"이 "중대한 과실이나 고의가 없다면", 더 중요하고 존중되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징계처분은 부당하다는 판결.
이 판결은 영국에서 '경찰권'의 특성과 성격을 명확하게 밝혀주었습니다. 영국 경찰법상 체포, 즉시강제 등 경찰권은 '순경(Constable)의 권한'입니다. 계급과는 상관없죠. 계급은 단지 행정과 지휘체계 확립을 통한 업무 표준화와 효율성을 담보하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그래서 지방경찰청장의 호칭도 '최고 순경 (Chief Constable)'입니다.
이 판결이 가지는 또 하나의 의미는, 경찰 상층부는 정치적 판단이나 영향 (소위 '정무적 판단')을 받지만, 현장 경찰관은 오직 '범과 양심', 그리고 자신이 교육받고 훈련받고 업무를 통해 체득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현장 상황에 맞는 '재량(discretion)'을 즉각적으로 발휘해야 할 존재라는 것이죠. 현장에서 멀리떨어진 고위 경찰간부가 정무적 판단으로 현장 특성에 맞지 않는 지시를 내릴 경우, 불상사나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 '경찰 상황의 특성'이란 것입니다. '전투에 지고, 전쟁이 이기는', '대를 의해 소를 희생하는' 전쟁, 군대와 다른 점이죠.
세 번 째, 1829 근대경찰 청설 이래 영국 경찰의 철학인 '시민의 동의와 수긍을 바탕으로 하는 경찰(Policing by Consent)' 이 영국 현장 경찰관들에게 각인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상관의 지시, 그에 따른 불이익 보다 '시민의 눈', '시민의 평거'를 더 중시하고 두려워 합니다. 영국에서 경찰 등 공무원이나 국가기관이 시민을 부르는 통상호칭은 '세금 납부자 (Tax Payer)'입니다. 세금으로 월급받으니, 세금 납부자인 시민이 주인, 고용주 라는 걸 잊지 않기 위해서죠.
그 대표적인 사례가, '경감 이하 현장 경찰관 협의회' 인 경찰관연맹(Police Federtion)에서 강도의 피습 등으로 경찰관 사망이나 중상 사건이 연이어 발생해 언론과 여론에서 '경찰은 더이상 비무장 정책을 고집하지 말고 경찰관에게 총기를 지급하라'고 촉구하자 총회를 열어 "최근 동료 경찰관들의 희생을 가슴아프게 생각하며, 시민들의 지지와 성원에 감사드리지만, 경찰관이 무장하면, 범죄자는 더 강하게 무장하는 '악순환' 현상이 나타나고, 무장한 순찰 경찰관을 보는 시민들이 불안과 두려움을 느낄 수 있어 '비무장 정책' 지속을 요구하기로 했다" 고 결정한 것이죠. 어찌 시민이 경찰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영국 경찰에도 흑역사가 있습니다. 대처 정권에서 광산과 철도 등 국가기간산업을 민영화하거나 폐쇄하는 '영국병 치유' 정책을 밀어붙일 때 파업 노동자와 집회 시민들을 무력진압하면서 큰 비판과 실망의 대상이 되죠. 이 기간 중 우리처럼 정보기관 (MI5)가 개입, 관여한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흑인 등 인종 차별 문제도 대두되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죠.
허지만, '양은 결코 양치기 개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경찰 속설처럼, 규제하고 단속하는 게 일인 경찰을 좋아하는 시민은 어디나 많지 않죠. 그런 환경하에서도 90%에 가까운 높은 신뢰도를 유지하는 영국 경찰의 뒤에는 이런 역사와 노력이 있습니다.
과거 군사독재의 불행한 시기, 시민의 반대편에서 묵묵히 임무를 수행하며, 돌도 맞고 화염병도 맞으며 아프고 쓰린 가슴을 달랬던 저는,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우리 후배들은 그렇지 않으리라, 영국 경찰처럼 신뢰받으며 수긍받으며 멋지게 법집행 하리라 믿고 기대했죠.
하지만, 지금 다시 옛 모습으로 돌아가는 군요.
철도 민영화냐 아니냐, 논란을 떠나, 대화와 타협 노력을 쉽게 버리고, 경찰력을 이용해 반발과 파업을 억누르려는 태도는 이젠 좀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현장 경찰관들도, 너무 상부의 강압적 지시를 따르려 하지만 말고, 부상없이, 변수 없이, 평화적으로 경찰 목적이 달성될 수 있도록, 전문성과 재량을 발휘해 주길 바라고 기대합니다.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