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이었어요,
나는 일산에, 베프는 부천에 살고 있었어요,
중간지점인 영등포에서 신나게 술과 수다,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고 헤어지곤 했었는데
그날 역시 내가 버스 타는 것을 본 베프는 쉥~하니 집으로 갔고, 일찍 자리에 앉은 나는 헤드폰을 꺼내 귀에 밀착시켰어요,
시끄러운 게 싫어서 이어폰보다는 헤드인어폰을 좋아라 해요,
800번인지 300번인지를 영등포에서 타면 2정거장 정도만 들렸다 바로 고속화도로인지 자유로인지로 올려버린 뒤 다음 정차 역은 백석역,
완전 빠르고 신속, 정확, 안전, 택시비 잠금 등의 장점이 있는 버스였어요,
밤 11시이다보니 술을 마신 사람도 있었고 야근을 하고 퇴근하는 사람, 학원 마치고 가는 학생 등등이 뒤섞여 있더랬어요,
물론 어린친구들, 나이 많은 어른들, 여성, 남성 다 있는 그런 흔한 버스였어요,
그 할배가 버닝하기 전까지는 말이에요,
평소처럼 헤드폰을 귀에 앉힌 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무척이나 시끄러워지는 거예요,
자리가 없어 서서 가는 분들은 두세 명 정도였는데 한 할배가 시끄럽게 통화를 하더라고요,
자기가 차를 잘못 탔다고 이거 어쩌냐 저쪄냐 10분 동안 정말 듣기 싫어 볼륨 최대로 올렸는데도 다 들리더라고요,
통화가 끝나니 운전기사 분께 가서 차 돌려라, 나 이 차 타면 안 된다 막 Dog GR을 시전하더군요,
이미 고속화도로로 올라왔는데 말이에요,
기사 분께 막 쌍욕하고 하대하며 차 돌리라고 고래고래, 시발, 무슨 심해인 줄 알았어요,
한 이삼 분 조용한가 싶더니 이제는 자기 화장실 가야 한다고 차 세우라고 다른 버전의 GR시전,
이제는 쌍욕만이 아니라 기사님을 팰 듯한 제스처를 취하다 막혀 있으니 자리로 돌아와 계속 혼잣말로 시끄럽게 GR 남발,
자기가 무슨 공산당이야, 남한도발하게,
여튼 모두 힘들고 피곤하고 지친 상태여서인지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이 어쩔 수 없이 참는 침묵과 할배의 Dogsory만 버스를 쾅쾅 울리고 있었어요, 아오, 빡쳐!!!
나는 좀 싸가지가 없는 편이에요,
어른들께 말 잘 놓는 편이에요,
어린 친구들에게는 말 잘 못 놓아요, 맞을까봐, 웃흥,
잘 참는 편이지만 화를 참는 한계를 벗어나면 좀 눈 뒤집히는 광년이임은 확실해요, 내가 보장함,
고속화도로인지라 중간에 차를 세울 수도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 시점에서 내가 지랄하면 버스 내에서 난동이 일어날 수도 있고 여러 사람 피해볼 게 확실해서 일산 첫 정류장까지 침묵하고 있었어요,
몇 분이 지나자 드디어 일산으로 진입하기 시작했어요,
할배는 그때에도 자기 화장실 가야 하네, 차 돌려야 하네 말인지 당나귀인지를 마구마구 흩뿌렸어요, 더럽게시리,
일산으로 진입하니 할배 원래 자기 자리였던 곳으로 오더니 다른 사람이 앉아 있자 또 싸가지 없는 새끼네 뭐네 뉴라이트버전 GR을 시전하기 시작했어요,
이제 정류장까지 1분여 정도가 남은 상황이 됐어요,
헤드폰을 벗고 엠피삼을 끄고 할배를 조용히 불렀어요,
"할아버지, 이제 정류장 도착하니 거기에서 내리신 뒤 반대편으로 가셔서 버스 타세요. 그럼 영등포 금방 가요. 일산은 웬만한 빌딩들 화장실 문 안 닫으니 급한 볼일은 빌딩 화장실 들어가셔서 해결하시고요."
나는 참 예의바른 청년이에요,
아주 곱게 말했어요,
무슨 난리버전을 시전할지도 모르고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 가게 하고 싶지도 않아서 그랬어요,
사실은 소심한 사람이라 그런 거예요, 흑,
그 할배 대꾸가 참 컬쳐쇼크를 느낄 정도로 신선했어요,
오오오~ 이것은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 떨어진 엘리스에 빙의됐다고나 해야 할까요?
"야, 이 씨발년아, 너 지금 뭐라고? 이 썅년이 애비 에미도 없나. 가정교육도 못 받고 자란 년이 어따 대고 지랄이야!"
헐,
그때 내 임계점이 파박!하고 박살났어요, 저것은 인간이 아닌 그저 지나가는 한 마리 늙은 짐승이다,가 됐어요,
"내가 한 말 뭐가 잘못 됐나요? 할배 내리셔서 급한 볼일 보고 집에 잘 가시라고 한 건데, 뭐가 잘못 됐어요?"
"이 좆같은 년이 환장을 했나! 이 씨발년아, 그 썬글라스 안 벗어!!!"
나는 낮에든 밤에든 썬글래시스를 착용해요, 안경 대용이에요,
홍채가 밝은 편이라 빛에 약한 점도 있지만 조용히 혼자 사색하며 다니기를 좋아하기 때문이에요,
저 말 들을 때 10m 앞에 정류장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왠지 눈물이 날 듯했어요, 흑,
할배는 이 죽일년 살릴년하면서 내게 주먹을 휘두르는 시늉을 하기 시작하던 때였거든요,
"할배, 깽값 물어줄 정도로 돈 많이 벌어놨나 보네요. 그 돈으로 운전기사 사서 다니면 개고생 안 하고 좋을 텐데 왜 이러시나 모르겠네."
살짝 웃어줬어요,
물론 나는 맞는 일도, 때리는 일도 무척이나 싫어 하는 사람이라 심장이 심장심장, 콩팥이 콩팥콩팥하고 있었어요,
드디어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했어요,
"이 씨발 잡년이 어른 무서운 줄도 모르고, 이 썅년아, 너 나랑 같이 경찰서 가자! 어디서 배워먹지도 못한 게 어른을 공경할 줄도 모르고!!!"
이런 말을 하며 나를 끌어내리려 했어요,
잡혔어요, 옷이 늘어나 슴가가 보일 듯해서 조금 일어나줬어요,
남자 두어 분이 할배를 뜯어말려줬어요,
기사분께서는 하차하는 문을 열어놓은 채 움직이지 않고 계셨어요,
"일몰 후에 안경 쓴 사람 얼굴 때리면 살인미수인 건 아냐? 나이 처먹었으면 나잇값을 한 뒤에 공경받을 생각부터 하란 말이다! 나이 어린 여자한테 맞아본 적 없지? 한번 맞아볼래?"
일부러 더 도발하기 위해 자극적 멘트를 날렸어요,
그때까지는 다들 모르쇠로 일관하다시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나 혼자 처치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었어요,
술 처먹고 힘이 더 세져서 자리에서 반 정도 그 할배에게 끌려나갔을 때-당시 내 자리는 창가 쪽이었음-였어요,
그제서야 말로만 할배에게 그만 하시라 하던 사람들이 합심해서 할배를 내게서 뜯어냈어요,
뜯어내도 또다시 내게 달려드는 그 할배를 서로 일어나 버스에서 밀어버렸어요,
다시 할배가 욕을 하며 타려 하니 기사님께서는 쿨하게 문 닫고 쌩쌩 달리셨어요,
씐나게 고고씽~
아힝아힝, 그때 타시고 도와주셨던 승객분들, 그리고 운전기사님, 고마워요,
저 정말 무서웠어요, 진짜 맞을 듯했는데 그때도 안 말려주셨다면 나 두개골 함몰됐을지도 몰라요, 흑흑,
버스가 씽씽 달리기 시작하자 사람들 한숨소리, 아가씨 괜찮냐고 묻는 소리, 여기저기로 전화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어요,
뒤에 앉아 있던 어떤 아가씨는 조금 전 상황을 자기 애인에게 전화로 얘기하더라고요,
어떤 언니가 어쩌고... 하는데 창피해서 몸을 더 숙이게 되더군요,
건너 편 자리에 앉아 계시던 아저씨께서 자꾸 괜찮냐고, 놀라지 않았냐고 물어보셔서
나는 괜찮다고 웃은 뒤 다시 헤드인어폰을 꽂고 집에 돌아와 개운하게 잤어요,
아쉬운 점은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찍거나 녹취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어요,
세상에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자신보다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법 따위는 없어요,
어른으로 공경받고 싶으면 나잇값을 하면 되고
나이 많다고 다 어른 대접받는다면 일흔이 넘는 어른은 다 공자맨탈이겠네,라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 없어요,
여튼 별 탈 없이 잘 마무리 되고 한 마리 미친 할배개가 낯선 일산에서 방황했을 테니 그것으로도 충분히 개운했어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