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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들의 일화1 (태종~인조)
게시물ID : humordata_51566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aber
추천 : 12
조회수 : 832회
댓글수 : 8개
등록시간 : 2009/04/29 00:27:47
태종

 

1. 직업정신 투철한 사관이 따라다니며 일 거수 일 투족을 다

 기록해서 태종이 걷다 헛발질한 것도 적었다.

태종이 그건 제발 지워달라, 창피하다 애원까지 했는데도

사관은 끝까지

'왕이 길을 걷다 헛발질하다. 헛발질한 것을 적지 말라고 말한 것은

 적지 말라 명하셨다' 라고 적었다.

 

2. 하도 사관이 쫓아다녀서 못 쫓아오게 멀리까지 사냥을 나갔는데

사관이 거기까지 말 타고 쫓아와

사냥기록을 적었다고 한다.

 

3. 태종은 아들 양녕대군이 너무 사고를 치고 돌아다니자 속이 상해

밤새 울어 목이 쉰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점은 양녕대군의 아들인 이혜는 아버지인 양녕

대군보다 더 많은 사고를 쳐 양녕대군의 속을 썩혔고

결국 왕자의 아들의 직위인 '군'의 작위를 깎여 서산군에서 서산윤

으로 강등당했다.

결국 이혜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자살시도를 하였고 이틀 뒤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이혜는 사람을 때려 죽이라도 시키기도 하였고 직접 사람을 죽이

기도 하였으며 남의 첩을 빼앗기도

 하고 시전에서 종친들과 패싸움을 하였고 과격한 놀이판을 벌이다

놀이 중 사람이 죽어나가게 하기도 하였다.

 실록에서는 이혜가 망가진 원인을 사랑했던 첩을 아버지에게 빼앗

기고 난 후에 울화병이 생겨 이리 되었다고 한다.)

 

 

 

세종

 

1. 세종대왕은 좋아하던 후궁에게 신하들 몰래 따로

 불러서 말없이

귤 하나를 쑥- 내밀어 준 얘기도 있다. (그 당시 귤이

귀한 것이었다.)

 

2. 친경한다고, 소 끌고 밭 갈다가 갑자기 비가 내리자 배고픔을 못

견뎌,

밭 갈던 소를 때려잡아서 국 끓여 먹은 적도...

 

3. 명재상 황희는 청백리가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었다.

임금이 사람을 붙여 철저하게 감시하고 너무도 기분 나쁘게 점검하

는 바람에

내참 더러워서 뇌물 먹지 않으리라 결심한 케이스다.

 

4. 훈민정음 반포식을 축하하는 잔치 행사에는 집현전 학사 절반이

 참석하지 못했다.

대부분이 살인적인 과중한 업무와 임금의 요구사항에 시달리다 못

 견뎌 병석에 누운 탓이었다.

성군의 캐치프레이즈는 신하가 고달파야 백성이 편안하다였다.

 

5. 세종은 부하들을 휘몰아치는데 도가 튼 인물이었다.

 아침 조회 격인 새벽 4시 상참에서부터 과업 달성이 부진한 부하들

을 닦달하였다.

밤낮으로 시달리다 못한 김종서의 경우 임금 곁에 있다가는 제명에

못살 것 같아,

스스로 궁궐을 떠나 삭풍이 몰아치는 북방을 개척하겠다고 손을 들

고 나섰다.

 

정인지는 임금이 너무 독촉하고 소위 갈구 대는 바람에 모친 3년

상을 핑계로 상소를 올리고 낙향하려 했으나,

임금은 법령까지 바꿔서 그를 다시 붙잡아다 오히

려 일을 더 시켰다.

 

6. 양녕대군이 평안도를 유람하게 되어 세종은 형인 양녕대군에게

제발 여색을 조심하라고 당부한다.

몰래 평안도 관찰사에게 명하기를

 “만일 양녕대군이 기생을 가까이하거든 즉시 그 기생을 역마에 태

워 서울로 올려 보내라 라고 하였다.

양녕은 세종과의 약속도 있고 하여 가는곳마다 기생의 수청을 물리

치고 근신하였으나,

그가 평안북도 정주에 이르렀을 때 그만 양녕의 마음을 사로잡는 절

세의 미인이 나타났다.

양녕은 그날로 동침하고 귀신도 모르리라 자신했다.

그래서 시를 지어 하룻밤 풋사랑을 읊기를

아무리 달이 밝다하나 우리 두사람의 베게를 들여다 보진 못할것

이다.

런데 바람은 어이해서 신방을 가린 엷은 휘장을 걷어 올리는가 라 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정주수령은 이 기생을 역마에 태워서 서울로 보냈다.

세종이 기생에게 명하기를 너는 양녕대군이 읊은 시를 노래로 불

러 익혀두라 하였다.

 

양녕은 이런 사실도 모르고 유유히 서울로 돌아와 세종을 알현하였

.

 

세종: 잘 다녀오셨습니까. 제가 신신 당부한 말씀을 잘 지켜주셨는

지요?

양녕: 물론입니다. 어찌 어명을 어기겠습니까? 한 번도 여색을 가까

이 한 일 없습니다.

세종: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 제가 형님의 노고를 덜어 드리

고자 가무를 준비하였습니다.

 

양녕은 기생이 나와 노래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누군지 몰랐다.

그런데 가사를 들어보니 자신이 지은 시구가 아닌가. 깜짝 놀란 양

녕은 그 자리에서 땅에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세종을 웃으며 뜰에 내려와 형님의 손을 잡고 위로하면서 그날 밤

그 기생을 양녕댁에 보냈다.

 

7. 나라에 큰 일이 있어, 모두 고기를 먹지 않는 기간이었다.

태종은 특별히 세종에게는 삼시 세끼 고기를 챙겨먹도록 하였는

그것은 충녕(세종)이 고기가 없으면 밥을 먹지 않았

기 때문이다.

 

 

 

문종

 

1. 수염이 매우 풍성하여 관운장과 같은 풍모를 냈었고, 얼굴 또한

 매우 잘생겼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된 궁을 정리하는데 타다 남은 왕의 어진이

한 장 나왔다.

수염이 길고, 풍채도 당당하여 신하들은 인종의 어진이라고 생각했

지만,

한 사람만은 수염이 길다는 말만 듣고 문종의 어진이라고 주장했다.

나중에 어진을 조사하다가 보니 어진 구석에 문종대왕의 어진이라

는 기록이 나왔다고 한다.

 

2. 학식, 외모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단 하나..

 건강 

 

 

 

세조

 

1. 술 먹고 신하 팔 꼬집고 신하한테 '너도 나 꼬집어라' 라고 시키

신하는 세조를 꼬집었다. 그 뒤 자기 혼자 열 받아서 혼내주려다

그냥 넘어갔다.

 

+세조의 팔을 꼬집은 것은 신숙주다.

정확히 말하면 꼬집은 게 아니라 팔씨름하다가 세조의 팔을 두 손으

로 넘겼다.

그래서 세조가 신숙주 죽이려고 했다가, 술 취한 것을 감안하여 넘

어갔다.

 

2. 세조는 후궁이 단 한 명뿐이고 평생 중전인 정희왕후와 금슬이

좋았는데,

국사를 논할 때도, 국가의 모든 행사에도 꼭 정희왕후를 대동했으며

사냥을 할 때도 둘이 나란히 말을 타고 사냥에 나갔다.

 

 

 

성종

 

성종은 후추 중개무역으로 돈을 벌기 위해 후추 씨앗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결국 후추는 구하지 못 하고 주변국에 성종이 후추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나 계속해서

조공으로 후추가 들어오는 바람에 창고에 후추가 가득히 쌓여,

예쁜 비단 주머니에 담아 조정 관리들에게

다 하사하였다.

 

 

 

연산군

 

1. 성종과 연산군이 오랜만에 밖에 바람 쐬러 나와서 성종이

융아, 좋지 않으냐?하니 연산군이 소떼를 보며

아바마마 저 송아지도 어미 소가 있는데 저는

왜 어미가 없습니까 라고 말했다.

 

2. 또 다른 야사에서는 연산이 동궁이었을 때 어느 날 성종에게

거리에서 나가 놀고 싶다고

하여 성종이 허락하였다. 저녁에 동궁이 궁궐로 돌아오자 성종이

오늘은 밖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하고 묻자 연산은

구경할만한 것을 없었습니다. 다만 송아지 한 마리가 어미 소를

따라가는데 그 어미 소가 울면 송아지도 따라 우니 그것이 가장

부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여 성종이 가여워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해짐.

 

3. 공부하는 걸 엄청 싫어하여, 왕자를 훈육하는 학자들이 엄청

고생을 했다고 한다.

매일 꾸중 듣고 야단맞아, 폐비 윤씨 사건이 일어났을 때

모두 죽여버렸다.

 

4. 춤을 잘 췄다고 한다.

 

5. 모후인 폐비 윤씨와 고려 공민왕의 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얼굴이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관공서에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를 수집하게 한 일도 있었다.

 

6. 엄청난 꽃미남이었다고 한다.

 

  

 

명종

 

1. 다른 사람들은 다 물러가 있거라 하고 노래 잘 부르는 내관이랑

둘이서 내관은 노래 부르게 하고

명종은 그에 맞게 춤추며 2인조 가수 못지 않게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2. 꾀병 부려서 총애하는 내관의 극진한 간호를 받았다.

 

3. 위의 내관은 동일인물로 남자이다.

 

4. 내시와 있는 시간이 너무 좋았던 명종은 몸이 아프다고 꾀병을

부려 경연을 취소하고

내관들과 놀러 다니기 일쑤였다.

 

 

 

중종

 

1. 자식 사랑이 남달라서 공주, 옹주랑 왕자들이 오랜만에 문안 오면

눈물을 흘렸다. 오면 버선발로 뛰어나갔다.

 

2. 또 중종은 동궁 전에서 불이 나자 맨발로 달려

나와 훗날의 인종을 애타게 부르며 울었다.

 

3. 또한 효정옹주의 남편(부마)가 바람을 피우고 다니자

철거지악이었던 질투를 하지 않는다고

딸을 꾸짖은 적도 있었다. 결국 효정옹주가 남편의 구박을

견디지 못 하고 죽자 직접 부마를 잡아와 친국을 하기도 했다.

 

 

 

인종

 

인종은 모후인 장경왕후가 자신을 낳고 7일만에 죽자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의 손에 자란다.

하지만 문정왕후는 어린 인종을 끈임 없이 못살게 굴었다.

 

하루는 밤에 쥐의 꼬리에 불을 붙이고 인종이 잠을 자고 있는

궁 안에 들여 보냈다.

인종이 창문을 보니 문정왕후가 웃으며 빨리 불이 타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빈궁만 내보내고 자신은 문정왕후에게 효를 행하기 위해

불 속에서 죽으려 했다.

빈궁과 인종이 어쩔 수 없이 불을 바라보며 울고 있는 그때,

밖에서 중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종은 죽는 것이 문정왕후에게는 효가 되지만 중종에게는 불효가

되므로 곧바로 나왔다.

그 후 인종은 불을 지른 장본인을 알고 있으면서도

중종에게 고하지 않았다.

 

 

선조

 

임진왜란 이후 선조는 의주까지 도망을 하는데, 의주에서 어느

백성에게 생선이 올려진 상을 접대 받았다.

그 생선이 너무 맛있어서 인조가 생선의 이름을 묻자,

백성은 '묵'이라 대답하였다. 선조는 생선의 이름이 그 맛에 비해

별볼일 없다 생각하여 '은어'라 명했다.

나중에 궁에 돌아와 그 생선을 먹었으나.. 맛이 전 같이 않아

'도로 묵'이라 하게 하였는데, 바로 여기서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광해군

 

선조가 세자를 가리기 위해 여러 왕자를 시험하였는데 반찬을

만드는 것 중 무엇이 제일이냐?라는

질문에 광해군이 소금이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그 이유를 묻자 여러 가지 맛을 조화시키려면 소금이

아니면 안 됩니다.라고 답하여 그 현명함을 인정받았다.

이에 선조가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느냐? 라고 묻자,

광해군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것이 가장 애통하옵니다

라고 답하였다.

 

 

 

효종

 

1.나르시즘에 빠져, 항상 거울을 볼 땐 스스로

만족에 차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2.일부일처제를 지켰다고 한다.

 

 

 

숙종

 

신하들이 따뜻한 온돌방에서 꾸벅꾸벅 졸자 온돌을 빼버리고

얼음장에서 일하게 하였다.

 

 

 

인조

 

자신의 몸과 봉림대군의 몸이 아프자, 소현세자의 아내가 저주를

내려서 아프다고 하여

사약을 내리고 가족들을 모두 죽였다.

소현세자를 죽일 때 11살과 6살이던 아들들도 다 죽이고

임신했던 세자빈까지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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