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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변호인' 어디까지가 실제일까? (스포주의)
게시물ID : movie_2150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하이잉
추천 : 16
조회수 : 5236회
댓글수 : 64개
등록시간 : 2013/12/23 10:31:16
BGM정보 : 브금저장소 - http://bgmstore.net/view/ZPCvR

 

※ WARNING 

영화 내용을 다수 포함하고 있으니

본 포스트는 영화 '변호인'을 보신 분에 한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영화를 아직 못보셨거나

'부림사건'의 자세한 내용에 관해 궁금하신 분들은

http://inizios.blog.me/10180800260 을 먼저 읽어주세요.

 

스마트폰으로 보실 경우  PC화면보기(클릭)를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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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중 송우석 변호사의 선배로 나오는 김상필 변호사(정원중 분). 실제로는 부산지역 원조 인권변호사로 부산 학생운동의 실제 자금줄이었던 김광일 변호사를 그리고 있다. 훗날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13대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하지만 3당야합때 김광일은 YS를 따르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민주당에 남아 DJ를 따르면서 멀어지게 된다. 이후 김광일은 문민정부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내게 되고 2010년 타계한다. 

   그는 2002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에 입당,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되는 10가지 이유'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 당시에는 탄핵안 가결을 환영하기도 했다. 또한 각종 인터뷰 및 회고에서 "부림사건을 맡기 전의 노무현을 속물로 판단했다"거나 "부림사건 1~2차가 아닌 3차 구속자 3명에 대한 재판만 맡겼다"고 폄하하기도 했는데 이는 인터뷰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1~2차 구속 피해자들의 증언을 고려해 볼 때 노무현 대통령은 1~3차 구속자 전체에 대한 변호를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영화 변호인에서 송우석의 초기 캐릭터를 '속물 세법 변호사'로 시작하는데는 김광일 변호사의 회고가 어느정도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된다.)(월간조선 2004년 4월호) (국제신문 2007.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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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중 송우석 변호사가 김상필 변호사 사무실에 찾아가 변호사 개업자금 변통을 부탁하는 장면.

   이는 실제로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법연수원 시절 시보교육을 받느라 안면이 있었고 부산에서 가장 유명한 인권변호사로 자리잡은 김광일 변호사에게 돈을 변통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광일 변호사는 생전 인터뷰에서 "그가 판사직을 1년 만에 그만두고 부산에 변호사 개업을 할 때도 내게 찾아왔다. 개업비용을 빌려 달라고 해 좀 빌려 줬는데 두 달 만에 갚았다"라고 말한다.(월간조선 200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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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변호사들이 하지 않는 등기업무를 시작하면서 호황을 누리는 모습

   당시 이름없는 변호사가 사건을 따내려면 브로커에게 돈을 줘야만 하는 관행이 심했는데 극중 송우석 변호사는 돈도 없고 학벌도 부족해 스스로 다른 변호사들이 하지 않는 '부동산등기' 쪽을 택해 명함을 돌리고 홍보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에 대해 김광일 변호사는 "그는 부산 법조계에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사건 수임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그는 영리하기 짝이 없는 인물로, 돈을 벌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당시 등기, 저당 등의 업무는 사법서사들이 주로 했는데 그는 변호사로서 그 일거리를 처리했다. 부산 법조계에선 그를 '이단아'로 취급했다"라고 회고했다. (월간조선 200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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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년전 사법고시 준비하던 시절, 어렵고 가난해서 밥값을 내지 않고 도망쳤던 식당에 찾아와 인사하는 장면.  이 장면을 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때 당시 평상복으로 자주 입던 검은색 가죽자켓를 입고 있는 것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후 일부 공판씬에서 실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즐겨 입던 '체크무늬 양복'을 입은 송우석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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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밥집 아들 (박)진우가 야학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다 차경감에게 잡히는 곳은 '부산양서협동조합'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데 이는 실제 명칭과 동일하게 영화에서 묘사되고 있다. 78년에 창립된 '부산양서판매이용협동조합(부산양협)'은 YMCA를 비롯한 각종 종교단체와 부산지역 재야 지식인 및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졌는데 주로 독서모임, 스터디그룹, 야학과 같은 형태였다. (이전 포스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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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밥집 아들 박진우(시완 분)는 '부림사건' 피해자 중 특정인을 모델로 했다기 보단 여러 피해자들의 사연을 취합한 캐릭터로 보여지지만 그래도 가장 비슷한 피해자를 찾으라면 송병곤씨와 가장 유사하다. 송병곤씨의 경우 무려 두달 이상을 불법감금 상태로 고문당했는데(7월4일에 납치, 9월7일에 구속영장 발부) 영화 속에서도 실종된지 두달 만에 영장이 날라온 날을 보면 9월3일이다.

 

   또한 노무현 전대통령의 회고에도 나와 있듯이 "한 젋음이는 62일 동안 구금되어 있었다. 그 어머니는 아들의 시신이라도 찾겠다고 영도다리 아래부터 동래산성 풀밭까지,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헤매고 다녔다. 변사체가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혹시 아들이 아닌지 가슴을 졸이며 뛰어갔다. 그 청년의 이름은 송병곤이었다"라는 내용을 참고해 보면 극중 최순애(국밥집 주인)는 송병곤씨의 어머니, 박진우(국밥집 아들)는 송병곤씨가 연상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그러나 법정씬에서 진우가 달고 있는 수인번호는 21번으로 실제 피해자 고호석씨의 수번과 같다)  (이전 포스트 참조) (실제 피해자 고호석씨의 영화 감상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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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 공판기일이 1981년 9월 9일로 표기되어 있다. 통지서가 발부된 날은 9월 3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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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서도 언급했던 국밥집 주인이자 극중 박진우의 엄마 '최순애(김영애 분)'. 실제 부림사건의 피해자 송병곤씨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역할인데 송병곤씨가 불법연행 후 구속되었을 때 쓰신 호소문 중 일부를 살펴보면 "애타는 가슴 조이며 자식찾는 일에 전념하는데 난데 없이 구속영장이 왔습니다. 알고보니 부산시경에서 병곤을 데려간지 두달이 지나서 보낸 소식입니다. (중략) 자식의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서 급히 수사기관에 찾아갔으나 냉혹한 수사관들은 일언지하에 모른다는 거절을 반복할 뿐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영화는 송우석의 도움으로 바로 아들을 만난 것으로 묘사되었지만 실제로 송병곤씨의 어머님은 아들을 면회하기까지 4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송병곤씨 어머니 호소문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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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시가현에서 경기용 요트 강습을 받고 있는 모습 

   노무현 전 대통령을 두고 두고 괴롭혔던 호화 요트도 짧지만 실제 사연과 똑같이(올림픽 출전을 위한 경기용 요트) 등장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경기용 요트에 매력을 느껴 아들에게도 요트를 사준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이 경기용 요트는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의도된 폭로기사로 인해 '호화요트'로 둔갑하기도 했었다.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조선, 동아에 잘못된 보도에 대해 소송을 제기해 승소하는 등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였지만 이미 지역 사회에 '인권운동 간판을 달고 뒤로는 호화요트나 즐기는 국회의원'으로 낙인 찍힌 후였기에 14대 국회의원 선거에 악영향을 받아 재선에 실패한다. 일명 '조중동과의 악연'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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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상고 동창들과 모임중 TV에 나온 '서울대 무림사건' 보도를 보고 흥분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회고에도 나오지만 "김광일, 이흥록 변호사가 영장도 없이 구금되고 수많은 학생들이 붙잡혀 고문당하고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런데 나는 바로 옆에 있던 변호사가 그런 일을 당해도 그저 소문으로만 들어 넘겼을 뿐 관심조차 가지지 못했다" 등의 내용과 故 김광일 변호사의 "노무현을 속물로 판단했다"라는 회고의 영향인지 극중 송우석은 연일 데모로 이어지는 시국에 대해 관조적이거나 비판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이전 포스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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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신보에 다니는 친구 캐릭터로 '이윤택(이성민 분)'이 등장하는데(왠지 응급수술을 잘 할 것 같이 생겼다) 시국을 걱정하고 용감하게 바른 말을 하다 직장을 잃은 동료들과 달리 자신의 영달을 위해 자리보전하는 자신을 부끄러워 하는 모습에서 송우석의 속물 캐릭터를 더 부각시키려는 극적인 장치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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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우석이 최순애와 함께 진우를 면회가서 첫 대면하는 장면. 이 장면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회고했던 "온 몸과 다리에는 시퍼런 멍자국이 남아있었다. 얼마나 고문을 당하고 충격을 받았는지 처음엔 변호사인 나조차 믿으려 하질 않았다. 공포에 질린 눈으로 슬금슬금 눈치를 살폈다. 한창 피어나야 할 젊은 나이에 그 처참한 모습이란... 눈 앞이 캄캄해졌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상상조차 해 본 일이 없는 그 모습에 기가 꽉 막혔다"라는 부분과 맞닿아 있다.  (이전 포스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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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중 송우석이 김상필 변호사를 찾아가 변호하겠다고 말하는 장면. "머릿속이 마구 헝클어졌다. 사실과 법리를 따지기도 전에 걷잡을 수 없이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이것만은 세상에 꼭 폭로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져먹고 변론을 시작했다"라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회고에 해당하는 부분이라 추측된다.  (이전 포스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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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장면은 드라마 '투윅스'의 한 장면입니다. ㅎㅎ

   극중 어용검사 캐릭터로 묘사되는 강검사(조민기 분)는 실제 부림사건의 주임 검사였던 '최병국'과 닮아 있다. 부림사건 수사 및 기소를 주도했던 최병국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일화 중 "알리하고 포먼하고 권투시합을 하는데 김일성이 알리 편을 들었을 때 피고인도 알리 편을 들었다면 그것도 이적행위냐?"고 따져 묻자 당시 최병국 검사는 "북괴를 찬양하는 발언을 자제해 주십시요"라고 소리쳤던 내용이 영화 속에 고스란히 묘사되어 있다. (월간 '말' 1990년 3월호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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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중 탁월한 수사실력을 인정받아 훈장까지 받고 부산으로 파견되는 차경감(곽도완 분)이란 캐릭터는 실제 부림사건의 피해자인 윤연희씨가 당시 대공분실 수사원이었던 '이덕만 경감'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실감났다고 평하기도 했다. (부림사건 실제 피해자의 변호인 감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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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밥도 못먹고 잠도 못자는 등 물고문, 전기고문, 통닭구이까지 실제 부림사건에서 행해졌던 잔인한 고문 장면이 영화에는 아주 짧지만 강렬하게 묘사되었고 그들이 수개월 동안 고문받았던 부산 중앙동 부두길 근처 '내외문화사'라는 간판의 '대공분실'이 영화속에선 '삼일문화사'라는 간판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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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림사건이 어떻게 고문을 통해 조작되었는지 결정적인 장면이 영화속에 나오는데 진우와 함께 잡혀온 다른 선배와 함께 강제로 자백을 맞추는 씬이 그렇다. 이는 한명의 자백은 증거로써 효력이 없지만 두명 이상의 자백(일치할 경우)은 그 자체만으로 유죄의 증거로 충분한 능력을 발휘하기에 여러명을 함께 고문하면서 필요할 때 마다 서로 자백을 맞추게 강제하는 역할이 당시 공안경찰 및 대공수사대의 주 역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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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외에도 부림사건을 맡으면서 권양숙 여사와 작은 트러블이 있었던 것이나 그들이 읽었던 속칭 '불온서적'이라는 책들을 밤새워 읽는 장면도 실제 노무현 전 대통령의 회고와 닮았으며 부림사건에서 문제가 되었던 에드워드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또한 극 중 등장하여 이를 가지고 재판 중 저자의 사상과 출신을 두고 강검사와 다투게 되는 것도 묘사된다.

 

   5번의 공판에서 송우석의 모습은 "믿고 맡겼더니 법정에서 행패를 부려 실망했다"고 악평했던 김광일 변호사의 말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변론을 끝내고 나올 때 까지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다"라고 회고했던 모습의 중간 정도로 잘 묘사되지 않았나 싶다. 극중 판사가 중요한 증인의 보호신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재판을 중지하려 하자 판사의 법봉을 뺏어드는 장면은 특히 하이라이트.

 

   이후 극중 재판에서 유죄로 판결되어 크게 상심하는 송우석을 김상필이 위로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재판에서의 피고인 수와 재판 내용으로 미뤄볼 때 영화 속 1~5차에 걸친 공판은 부림사건 1~2차 구속자 16명에 대한 1심 내지는 2심 판결 과정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이호철 등의 3~4차 구속자들의 재판은 별도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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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마지막 시위모습과 마찬가지로 시위대의 맨 앞에서 독재 타도를 외치는 노무현 전 대통령

  

   영화 속 송우석은 부림사건 공판 이후 거리의 투사로 변신해 거리로 나선다. 실제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림사건 이후 인권변호사로 변신하여 '노동법률상담소'를 차리게 되는 것은 물론 부산지역 민주화운동 인사들과 함께 '부산공해문제연구소'라는 간판을 걸고 시민운동을 시작한다. 이후 영화처럼 그를 거리로 나서게 한 가장 큰 사건은 87년 2월 항쟁과 8월 거제 대우조선소 이석규 열사 사건이었다.

 

"내가 '노변'을 따라가지 못하는 점은 흔히 말하는 먹물, 지식인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행동의 한계를 설정하고 선을 긋는 점이다. 변호사니까 단체에 참석하더라도 재정적인 지원 등 2선이나 바람막이를 하다가 일 터지면 변론을 하는 것으로 자기역할을 규정한다. 몸으로 부대끼는 것은 자기와 맞지 않는다고 스스로 규정하는데, '노변'은 그런 것이 없다. 이것을 단점이라고 평가한다면 아주 속물적인 견해다. 부산국본 당시 나도 상임집행위원이었지만 가두연설을 한다든지, 경찰과 직접 몸을 맞대고 투쟁하는 것은 내가 할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노변'은 흔쾌하게 집행위원장을 맡고, 연설하고, 거리를 돌며 행동하고 투쟁했다(월간 '말' 2002년 6월호 문재인 인터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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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전 대통령은 1987년 8월 거제 대우조선 파업현장에서 최루탄에 맞아 숨진 노동자 이석규씨의 사체부검과 임금협상을 도와주는데 그 과정에서 그는 당시 노동법의 대표적 악소조항인 '3자 개입' 금지 혐의와 '장례식 방해'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부산구치소에 수감 된다. 

 

   영화속에서 묘사되는 마지막 법정의 모습엔 수형번호 33번이 찍힌 죄수복을 입고 피고인 자리에 선 송우석이 그려지는데 이는 실제 법정에 섰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 그대로이며 구속적부심이 진행될 때 참석했던 공동 변호인단의 숫자가 99명(부산지방변호사회 소속 91명 포함)에 달했던 사상초유의 사태를 영화속에서도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영화에는 그려지지 않았지만 결국 구속적부심이 받아들여져 피의자 노무현은 수감된지 23일만에 석방됐다. 하지만 그해 11월 변호사 업무정지가 내려지고 88년 2월엔 벌금 1백만원이 선고되어 항소했지만 모두 기각당했다. (87년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 사건)


   "당시 부산변호사회에 등록된 변호사 수가 120명 가량이었다. 실제 활동하는 변호사들은 거의 빠짐없이 참여했으며 대부분 직접 법정에 나왔다. 방청석까지 변호인들로 가득 찼으며 재판장이 변호인의 출석여부를 확인하는데 방청석에서 끊임 없이 '예'하며 손을 들었다(문재인의 운명 중 발췌)

 

   이후 1988년 송기인 신부의 추천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광일 변호사는 제 13대 총선에 출마하는데 이때 노무현 전 대통령은 통일민주당 후보로 5공 실세인 허삼수의 지역구 부산동구에 출마하여 당선되는 파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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