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진, 얼마나 더 가야 그리움이 보일까
문이 닫히고 차가 떠나고
먼지 속에 남겨진 채
지나온 길 생각하며
얼마나 더 가야 그리움이 보일까
얼마나 더 가야 험한세상
아프지 않고 외롭지 않고
건너갈 수 있을까
아득한 대지 위로 풀들이 돋고
산 아래 먼길이 꿈길인 듯 떠오를 때
텅 비어 홀가분한 주머니에 손 찌른 채
얼마나 더 걸어야 산 하나를 넘을까
이름만 불러도 눈시울 젖는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는
얼마나 더 가야 네 따뜻한
가슴에 가 안길까
마음이 마음을 만져 웃음짓게 하는
눈길이 눈길을 만져 화사하게 하는
얼마나 더 가야 그런 세상
만날 수가 있을까
김용균, 남자도 가끔은 눈물을 흘린다
살아가는 일이 때로는 버거워
하는 일마다 벽에 부딪친 듯 암담한 날은
돌아와 잠든 아내의 야윈 발목을 보다가
샤워꼭지를 얼굴에 맞춰놓고
남자도 가끔은
비명 같은 눈물을 흘린다
차창 밖으로 색 고운 노을이 뜨는 날에는
보도에 쓰러지는 노란 은행잎을 보며
지나온 날들이 참으로 덧없어 져서
나하나 잘 되라고 기도하던 어머니 모습에
남자도 가끔은
안개 같은 눈물을 흘린다
무심히 살다가 주위를 돌아보니
모두들 유복하게 잘들 사는데
홀로 뒤처진 듯 작아진 모습에
터벅터벅 골목길을 돌아 나가며
남자도 가끔은
어둠 같은 눈물을 흘린다
연속극 슬픈 장면에도 쉽게 울고
이웃 사소한 일에도 우는 여인의 눈물과 달리
절절한 생의 결손이 녹아내리는
진득진득 쑥물 같은 설음을 토하며
남자도 가끔은
달빛같이 맑은 눈물을 흘린다
도종환, 옥수수 밭 옆에 당신을 묻고
견우 직녀도 이 날만은 만나게 하는 칠석날
나는 당신을 땅에 묻고 돌아오네
안개꽃 몇 송이 땅에 묻고 돌아오네
살아 평생 당신께 옷 한 벌 못 해 주고
당신 죽어 처음으로 베옷 한 벌 해 입혔네
당신 손수 베틀로 짠 옷가지 몇 벌 이웃에 나눠 주고
옥수수 밭 옆에 당신을 묻고 돌아오네
은하 건너 구름 건너 한 해 한 번 만나게 하는 이 밤
은핫물 동쪽 서족 그 멀고 먼 거리가
하늘과 땅의 거리인 걸 알게 하네
당신 나중 흙이 되고 내가 훗날 바람 되어
다시 만나지는 길임을 알게 하네
내 님아 밭 갈고 씨 뿌리고 땀 흘리며 살아야
한 해 한 번 당신 만나는 길임을 알게 하네
박종화, 술잔을 들어라
서성이는 사람
무정한 세월
시련의 산줄기를 향해
술잔을 들어라
지금은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술잔이라 해도
지켜온 자의 고결한 신념을 안주 삼아
몸은 야위었으나 변함없는 사랑 나누면서
술잔을 들어라
지울 수 없는 청춘의 약속은 언제나
동면설한을 깨고 타오르나니
세월도 좌절도
피눈물의 산줄기도 적시우는
일당백의 취기로 술잔을 들어라
그대 가슴에 드리운 쇠창살의 아득함이
아직은 머리끝에 남았어도
망망한 긴 긴 겨울 밤
믿음의 뜨거운 맹세는 꺼지지 않노니
힘들어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가장 멋있는 말로 건배를 청하면서
그대의 피 같은 술잔을 들어라
복효근, 다 스쳐보낸 뒤에야 사랑은
세상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산길에선 정말 믿을 사람 하나 없다
정상이 어디냐 물으면
열이면 열
조금만 가면 된단다
안녕하세요 수인사하지만
이 험한 산길에서 나는 안녕하지 못하다
반갑다 말하면서 이내 스쳐가 버리는
산길에선 믿을 사람 없다
징검다리 징검징검 건너 뛰어
냇물 건너듯이
이 사람도 아니다 저 사람도
아니다 못 믿겠다 이사람
저 사람 건중건중 한 나절 건너뒤따 보니 산마루 다 왔다
그렇구나, 징검다리 없이
어찌 냇물을 건널 수 있었을까
아, 껴안아 주고 싶은
다 멀어져 버린 다음에야 그리움으로 남는
다 스쳐 보낸 뒤에야 사랑으로 남는 그 사람
또 그 사람....그들이 내가 도달할 정상이었구나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이 산길에 나 하나를 못 믿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