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혜원, 그대 내 앞에 서 있던 날
수줍게 돋아나는
봄날의 잎새들 마냥
내 사랑은 시작되었습니다
풋풋하고 청순한 그대
내 앞에 서 있던 날
하늘이 내려준 사랑이라 믿었습니다
삶의 길에서 모두들
그토록 애타게 찾는 사랑의 길에서
우리는 서로 마주쳤습니다
그대를 본 순간부터
그대의 얼굴이 내 가슴에
자꾸만 자꾸만 들이닥쳤습니다
그대는 내 마음을
와락 끌어당겨
오직 그대에게만 고정시켜버리고 말았습니다
살아가며 모든 아픔들이 삭혀지고 나면
우리 사랑은 더 아름다워지고
더 가까워지고만 싶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이 낙엽지는 날까지
그대 내 앞에 서 있던 날처럼
사랑하고만 싶습니다
이복현, 너를 위해 비워 둔 의자
기다림이 하도 오래어서
몸의 구석 구석에 녹이 슬기 시작한다
가늠할 수 없는 적막 깊이
이룰 수 없는 꿈부스러기들
빈 가슴 가득히 쌓인 먼지를
그리고
낙엽이 쌓여가는 공원 한 구석을
지키고 있는 빛바랜 벤치를
어찌 다 기억하겠는가만
마음에도 이제 해 질 때가 된 것인지
풀벌레가 서러움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하루 하루를 늘상
구름으로 흐르면서
어찌
어둠이 앉았다 떠난 자리
지친 별빛을 다
헤아릴 수 있을까만은
누군가
어두운 가슴에 횃불을 켜 드는
손이 있다는 걸 알고 있지
타다가 꺼져버린 숨 막히는 순간에도
늘 그댈 위해 남겨 둔
빈 자리 하나
돌아오라고, 언제까지나 가슴 한켠에
너를 위해 비워 둔
의자 하나 있다
원태연, 사랑의 크기
사랑해요
할 때는 모릅니다
얼마나 사랑하는지
사랑했어요
할 때야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이 내려 앉은 다음에야
사랑
그 크기를 알 수 있습니다
조현숙, 그리움
하얀 종이위에
눈물로 써내려간 내 슬픔의 시
네가 떠난 날부터 써온 시들은 어느덧 쌓이고
그 위에 내 눈물도 쌓인다
고운 빛깔 향내나는 종이로
접어온 작고 예쁜 종이학
네가 떠난 날부터 접어온 종이학은 어느덧 쌓이고
나의 슬픔도 쌓인다
내가 써온 시들을
투명 빛깔 봉투에 넣어
사랑이란 이름으로 그리움이란 우표를 붙여
너에게 보낼 수만 있다면
그 수많은 종이학들을
한 마리 한 마리 모두 사랑의 입김을 불어
너에게로 날릴 수만 있다면
나는 이순간 죽어도 좋을 것만 같아
너를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조병화, 늘 혹은 때때로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생기로운 일인가
늘, 혹은 때때로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카랑카랑 세상을 떠나는
시간들 속에서
늘, 혹은 때때로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인생다운 일인가
그로 인하여
적적히 비어 있는 이 인생을
가득히 채워가며 살아갈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가까이, 멀리, 때로는 아주 멀리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라도
끊임없이 생각나고 보고 싶고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지금, 내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명확한 확인인가
아, 그러한 네가 있다는 건
얼마나 따사로운 나의 저녁 노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