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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담론>의 노인감방 이야기, 그리고 현재
게시물ID : sisa_70251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런던콜링
추천 : 4
조회수 : 48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03/31 00:5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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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담론> 中 

우리 감방의 왼쪽이 일본인 야쿠자 감방이었고 오른쪽은 노인 감방이었습니다. (중략) 노인 방과 야쿠자 방 사이에 있는 우리 방에서는 자연히 두 방을 비교하게 됩니다. 두 방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싸움의 방식'이었습니다. 노인 방은 주로 말로 싸웁니다. 시끄럽기 짝이 없고 밤낮을 가리지 않습니다. 갖은 욕설에 멱살잡이로 가끔씩은 머리가 벽에 부딪치는 소리를 내기도 합니다. 문제는 시도 때도 없이 한밤중에도 싸움질을 해대는 것입니다. 이제 끝났나 싶으면 또 시작합니다. 저쪽 감방에서 발로 벽을 차면서 이 꼰대들 잠 좀 자자고 고함지르기도 합니다. 젖은 장작처럼 불은 붙지 않고 연기만 꾸역꾸역 내뿜는 격입니다.

일본인 야쿠자들의 싸움은 순간에 끝납니다. 욕설 한마디 들리지 않습니다. 다다다다닥 마룻바닥 울리는 발소리만 들립니다. 그러다가 1~2분 후면 딱 그칩니다. 쥐죽은 듯 고요합니다. 승부가 난 것입니다. 흡사 화약 폭발입니다. 야쿠자 방과 노인 방을 좌청룡 우백호로 좌우에 두고 있는 우리 방에서는 자연 두 방의 차이에 무심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노인 방과 야쿠자 방의 싸움을 두고 논쟁이 붙었습니다. 대세는 노인 방에 대한 성토로 끝났습니다. 그 논쟁은 한국인과 일본인의 차이로까지 발전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아싸리' 하다는 것이지요. 깨끗하고 솔직하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한국 사람들은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 우리 방의 대세였습니다. 일본인 예찬과 한국인 비하는 노인 방 때문에 받는 피해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 방 사람들이 모두 일요일 총집교회總集敎誨에 가고 나와 노촌老村 선생(이구영, 1920~2006) 둘만 남은 적이 있습니다. 노촌 선생은 전형적인 양반 가문의 선비입니다. 노촌 선생께서 나한테 물었습니다. 신 선생도 한국 사람들이 구질구질하다고 생각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내가 노인 방이 시끄럽고 구질구질해서 지겹다고 했던가 봅니다. 노촌 선생께서 정색하고 이야기했습니다. 문화적인 수준으로 본다면 노인 방이 야쿠자 방보다 훨씬 높다는 것이었습니다.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이었습니다. 노촌 선생님 말씀은, 야쿠자 방은 한마디로 얘기해서 폭력 투쟁이고 노인 방은 이론투쟁이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폭력 투쟁은 문제의 핵심에 접근 하지 못하고 폭력으로 승패가 납니다. 누가 옳고 그른가는 가려지지 않고 힘센 놈이 이깁니다.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본질이 억압될 뿐입니다. 다행히 정당한 쪽이 이기는 경우라도 그 정당성이 논의되는 과정은 부재합니다. 지겹지만 서로 욕지거리 섞어가면 주장에 주장을 거듭하는 이른바 이론 투쟁(?)은 우여곡절을 겪어가지만 그래도 쟁점에 근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략)


얼마전에 읽은 故 신영복 선생님의 담론이라는 책을 읽다가 울림을 주는 구절이 있어서 전문을 그대로 옮겨 왔습니다. 저는 현재 오유의 시사게 상황이 교도소의 '노인 방'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토론이 오고가고 심지어는 상대방에 대한 비난과 한 개인의 커뮤니티 활동이력과 정통성을 거론하기도 합니다.

시계를 조금만 앞으로 돌려봅시다. 몇 가지 굵직굴직한 사건들만 이야기 해봅니다. 2월말~3월초에는 필리버스터로 인한 아주 밝은 분위기가 이어졌습니다. 거의 처음으로 몇몇분들로 인해 국회의원이라는 직업인에 대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고 그들을 조금 더 인간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전래없는 사건이었죠. 하지만, 필리버스터 중단 결정으로 인해 다시금 논쟁이 불을 붙기 시작했습니다. 일과를 마치고 밤 늦게 접속하여 베오베 게시판을 볼라치면 3~4페이지가 새롭게 갱신되어 있을 정도로 뜨거웠죠. 

필리버스터가 끝날무렵에 김종인대표가 제기했던 통합제안은 또 어떻습니까? 국민의당에 대한 성토와 이미 당을 탈당한 사람들을 다시 받아주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또 며칠간 시끄러웠습니다. 이 후 더민주의 1,2차 컷오프사태와 성토의 절정이었던 비례대표 공천 파동으로 많은 사람들과 유저들이 정당 지지에 대한 회의감과 혼란을 겪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신영복 선생님의 노인 방처럼 시끄럽기 짝이없고 밤낮을 가리지 않았으며, 때로는 젖은 장작처럼 불은 붙지 않고 연기만 꾸역꾸역 내뿜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저는 감히 현재의 모든 논쟁의 미시사는 이론투쟁이며, 우여곡절을 겪어가지만 그래도 쟁점에 근접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의심스러운 유저를 저격하고, 터무니 없는 의견에 반대하며, 또는 이율배반의 의견에 첨예하게 대립하는 일련의 현상은 조금 더 나은 총선의 결과를 이루기 위한 느릿느릿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현상이 51% 긍정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국정원과 분란을 조장하는 수 많은 세력들의 모진 풍파에도 아직까지는 자정작용이 고장나지 않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불과 1주일 전 비례대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가졌던 김종인 대표에 대한 원망과 애증의 감정은 조금씩 봉합되어 '그래 결국 지금 중요한건 야권 단일화고, 모 후보의 낙선운동이고 안보 프레임이 아닌 경제 프레임이지' 라는ㅡ100퍼센트 만족스럽진 않지만ㅡ내면적인 합의가 되어가고 있는 듯 합니다. (물론 이 합의도 앞으로 이어질 수 많은 논쟁으로 조금씩 수정될 것입니다.)

우리는 저쪽 방의 조용한 야쿠자가 아닙니다. (야쿠자를 이야기하니 어떤 당이 떠오르는 것은 기분 탓입니다.) 권력의 절대자, 혹은 목소리가 크거나 위세가 대단한 강자가 힘의 논리로 다양한 의견을 억압하려 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겠지요. 지겹지만 서로 욕지거리 섞어가면 주장에 주장을 거듭하는 이른바 이론 투쟁(?)은 우여곡절을 겪어가지만 그래도 쟁점에 근접합니다. 

불구경 하듯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조금 더 첨예한 토론이 일어났으면 합니다. '옆 방의 벽을 부수지 않는' 선에서 지겨운 말싸움이 계속 일어났으면 합니다. 그것이 제가 오유를 좋아하는 이유이며, 총선이 다가올수록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더 나은 길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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