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면적은 163.6 ㎢로 충청남도 태안군 안면도(113.5 ㎢)보다 약간 큰 정도이며 인구는 2012년 통계에 따르면 약 5,700명. 신비의 거석상 "모아이"로 유명하다. 유럽인들이 부활절에 발견하였으므로 영어 이스터(Easter)로 더 알려졌으며, 현재는 칠레 영토이므로 역시 부활절을 의미하는 스페인어 파스쿠아(Pascua)라고도 표기된다.
(뜬금포 서태지의 모아이)
특산물도 없고, 숲도 없는 황무지에 가까운 섬이지만, 한 가지 특이한 것들이 있다. 섬들 곳곳에 몇미터가 넘는 석상, 모아이가 있다는 것이다. 당시 이 섬의 풍부한 식생을 바탕으로 하여 채석장에서 통나무를 굴려 석상을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또한 그 기원은 폴리네시아로 추정된다.
(폴리네시아:오세아니아 동쪽 해역에 분포하는 수천 개 섬들의 총칭)
(노답크기의 모아이)
구전 전승과 고고학적 연구 결과, 얼마 안되는 서양인들의 탐험 기록에 의하면 이 섬의 역사는 고립된 곳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찬란한 문명의 성취, 그리고 수백년에 걸친 몰락과 붕괴 역사였다.
이스터 섬은 자연을 고려하지 않은 발전이 어떻게 한 사회를 붕괴시키는가 를 잘 보여주는 무시무시한 예이다.
이스터 섬의 원주민들의 정착 초기에는 풍부한 식생 숲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고래잡이, 새 잡이, 열매, 그리고 제한적 농업까지 이루어지는 섬이었고, 엄청나게 발전하였다. 대략적인 계산으론 정착 전만 해도 1억그루의 야자나무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원주민들의 종교적/주술적 이유로 경쟁적 석상쌓기(모아이)로 인하여 식생의 황폐화 → 황무지화 → 바다새의 멸종, 선박용 목재의 부족으로 인하여 주요 식량자원인 고래사냥이 불가능 → 토지의 척박화로 인한 대규모 식량부족 → 식인풍습 시작으로 이어지는 다이나믹 막장 롤러코스터를 보여준다.
이스터 섬이 동남아시아처럼 열대우림이 우거지는 곳이 아니며, 의외로 나무가 빨리 자라지 않는 기후인데다가 토양이 침식에 취약하다는 점도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섬이 워낙 척박해... 돌을 깨서 그 돌을 위에 덮는 돌뚜껑 방식의 농법이 아니면 식물이 자라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렇게 귀한 돌을 가지고 모아이 석상이란걸 만든 것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나무와 돌 등의 자원이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더욱 큰 석상을 지으려 했다는 것이고,
모아이 석상과 이스터 섬을 연구한 학자는 이 섬의 역사를 연구하면 할수록 모아이 석상을 증오하게 된다라는 말까지 했다.
(모아이는 이렇게 눈이 있었다)
실제로 모아이 석상은 원래 눈이 달렸는데, 멸망 전 생겨난 전쟁 때문에 눈이 파였다고 한다.
이 때를 기점으로 식량이 떨어져 식인 문화까지 생겼으니, 눈을 파버리고 싶을 정도로 증오할만도 할 것이다. 이스터 섬의 언어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이스터 섬의 언어에는 인육에 관련된 관용어구가 많이 남아있을 정도로 인육이 일반적이었으며 그만큼 이 섬은 피폐해져 있었다.
지구의 미래 모델형으로 여겨진다. 즉 자원낭비를 한 '닫힌 계'가 어떻게 무너지는가에 대한 중요한 증거
그 이후 당장 먹을 게 없는데도 쌈박질이나 하는 멍청한 행각은 그만두고 버드맨 의식이란 평화로운 방식으로 섬을 주도하는 부족을 1년마다 뽑고 자원을 분배했다.
물론 자원이 극단적으로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이들도 자신들의 미래를 점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최소 어느 정도의 희망은 있었다.
이 조그만 희망마저 철저히 깨부숴버린 건 바로 남아메리카에서 찾아온 페루인의 도래다.
당시 페루인들은 그나마 삶을 영위하고 있던 이들을 학살하고 노예로 데려갔으며 당연하게도 노예로 돌아온 사람 중 살아돌아온 사람은 얼마 없었다. 게다가 유럽인이 정기적으로 상륙하면서 섬에 없던 전염병이 들어섰다. 남아메리카 노예상들의 침공과 전염병의 유행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대부분이 유럽인들을 따라 섬을 탈출했고 이 결과 19세기 말 인구수는 100명 정도로 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