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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ID : readers_702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앤유
추천 : 0
조회수 : 377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3/04/21 16:08:44

아빠가 죽었다.

 

 

장례식장은 가식에 가득찬 얼굴들로 북적였다. 모두들 애써 슬픈 표정을 지으며 부조통에 봉투들을 넣고 차려진 밥상에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술을 들이부으며 시끄럽게 지껄였다.

어린 상주라고 다른 건 없었다. 이미 예고되었던 죽음이었는지 그들은 묵묵히 영정 사진 옆 벽에 기대어 슬픈 표정을 유지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 살아생전 보*상조를 직접 보게되다니...'

어이없게 한숨을 내뱉으며 머리에 꽂힌 흰색 리본핀을 다시 고쳐매었다. 상조에서 온 사람들이 이것은 장례 기간동안 절대로 떨어지거나 빼서는 안 된다고 했었다.

 

허무하다.

천년만년 살아서 우리 가족을 행복하게 지켜줄 것만 같던 노송이었는데

이렇게 무너지는 걸 목격하고 말았다.

물론 그가 항상 건강했던 건 아니다. 십여년 전 부터 잔병치레도 많았고 지병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죽게 될 줄이야?

 

항상 생각했었던 건,

가족이 죽게 되면 내가 울게 될까 하는 문제였다.

사실 확신은 없었으나, 아마도 슬플 것이다-고는 생각했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오질 않는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군가 토닥이기만 해도 왈칵 하고 쏟아질 만도 한데

 

등을 두드리며 힘들지?하고 묻는 물음에도

누구나 한번 쯤 겪게 될 일이야고 하는 말에도

내 눈물샘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난 사실 사이코패스였던걸까.

 

 

 

 

영정사진을 게시해놓은 방 옆에는 으레 가족들을 위한 작은 방이 하나 있다.

옷매무새를 고치러 잠깐 들어갔더니 고모들과 할머니가 육개장을 한 숟갈 떠먹다가 멈칫한다.

십분 전 만 해도 통곡에 통곡을 하며 네가 죽으면 나도 죽을련다 하고 소리치던 그네들이

태연하게, 밥을 먹고 있다.

어이가 없어진 난 그대로 방을 나와버렸다. 당황한 그네들의 핑계를 뒤로하고.

 

 

 

장례식장에서의 이틀째 밤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아빠의 친구라는 사람들

아빠의 회사 동료라는 사람들

엄마의 회사 동료들

엄마의 친구들

내 친구들

 

다들 쉴새없이 왔다가 밥을 먹고 떠나갔다

 

 

손님들이 다 빠져나가고 친척들만 남아서 술잔을 기울였다.

이틀 째 밥을 먹질 않았더니 배가 고팠다.

안주거리를 갖다준다는 핑계로 그들 사이에 꼈다.

 

고모들과 작은엄마들은 내일의 일거리를 걱정해서인지 다들 자러 들어갔고

나머지 고모부들과 삼촌, 그리고 사촌오빠가 그 자리에 있었고

사촌오빠는 심심했던지 나의 손을 끌어 자기 옆자리에 앉혔다.

그리곤 한 잔 받으라며 재촉하기 시작했다.

이 오빠도 참 오랜만에 본다. 오랜만에 보는 일이 이런 일이라니

사촌간에 참 왕래도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어릴 적엔 그가 좀 반반하게 생겨먹은 탓에 연모했던 적도 있는 터라

반가웠다. 물론 초등학생 때의 일이지만...

 

술기운이 조금 올라오기 시작하고 삼촌들은 담배를 꺼내 물기 시작했다.

담배를 극도로 혐오하는 나는 그 자릴 떠서 바람을 쐰다고 하고 밖에 나와버렸다.

이어폰을 꽂고서 벤치에 앉아 있었는데

어느샌가 툭. 하고 내 머리에 올라오는 따뜻한 손은 사촌오빠였다.

 

"춥네"

 

"추운데 왜 나와 있어"

 

"술기운 돌아서"

 

자신도 그렇다고 하던 그는 갑자기 내 무릎을 베개삼아 누워버렸다.

이십오 년간 그와 나 사이에 오간 스킨십은 전무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급전개가 되니 나도 혼란스러웠다.

 

"왜 이래"

 

"피곤해서 그런다 왜"

 

"많이 마셨으면 들어가서 자"

 

"여기가 더 편한데?"

 

사실 고백하자면 떨림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어릴 적 한때는 좋아했었던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그가 묘한 눈으로 나를 응시한다.

 

달콤한 말로 나를 현혹한다.

 

눈앞이 흐려졌다, 맑아졌다를 반복한다.

술기운때문이겠지..

 

그의 손이 내 심장과 가까운 곳에 점점 엄습해온다....

 

 

순간 정신이 들어 그의 손을 내리쳤다.

 

"이게 무슨짓이야"

"사촌끼리는 이런것도 하는거야"

"미쳤어? 오늘 우리아빠 장례식인건 알고하는거야?"

"그럼 오늘만 아니면 된다는거네"

 

미친놈. 어릴적의 맑은영혼은 다 어디가고 이렇게 썩어빠진 영혼만 남아있는걸까.

순간 그가 불쌍해졌다.

"여친없는거 인증하지말고 들어가서 자"

"난 여기서 잘래"

 

맘대로 해라.

무릎위의 머리를 잠시 그대로 놔두기로 했다. 어쨌든 거절했으니까. 최소한의 윤리는 지켜냈다.

사촌지간에 이정도는 허용되겠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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