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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압]할아버지께서 해 주신 이야기
게시물ID : sisa_47506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AWL
추천 : 7
조회수 : 388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3/12/28 22:17:47
할애비가 6.25에 소위계급으로 참전한건 너도 잘 알고 있을 거다..
스물 하나의 젊은 나이에 사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임관되었지.
당시 장교들이 하도 죽어서 내 나이에 그런 계급이 꽤 많았어.
휴전을 몇 달 앞두고 이 할애비는 인민군에게 포로로 끌려갔어.
그 때가 5월쯤이었지.
보릿고개였는데다가
전시상황이고하니 수용소에서 밥 한끼 제대로 먹는게 힘들었어.

사실 할애비가 5월에 수용소에 들어가고 7월에 휴전이 이뤄져서 
실제로 포로생활을 한 기간은 얼마되지도 않어.

그런데 내가 몇 달안되는 포로 생활 중에
60년이 지난 아직까지 기억에 남았던 사건이 있었지..

수용소 건물은 모두 세 개의 동으로 이뤄져있었어.
내가 있었던 동은 남한쪽.. 그러니까 국방군 포로들만 수용되어있던 건물이었고
한 동은 미군포로들이 수용되어있었지

마지막 한 동에는 인민군 간부들과 수용소 관리인원이 상주하고 있었어.

수용소에서는 하루에 두 번씩 감자나 옥수수를 배급했단다.
보통 아침에 감자를,
사역(일 하는것)이 끝나고 해질녘에 옥수수를 받는데
우리 국방군 포로들은 항상 밤에 받은 옥수수를 배게맡에 숨겨두었어.
점심에 밥을 안주고 아침 저녁에만 주니까
일 하는 도중에 너무 힘들더라고..
그래서 사람들이 옥수수를 숨겨뒀다가
일 하다 점심쯤에 꺼내먹었어.
감시하던 인민군들도 이런 우리들을 보고 별 말 안하더구만.
그리고 같이 작업하던 미군포로들도 점심에 옥수수를 꺼내먹길래
저녁 옥수수를 항상 숨겨놓는것은
포로 수용소의 관행이 되었지.

그날도 우리 국방군 포로들은 여지없이 인민군들의 지시에 따라
일을 하는 중이었어.
그 때 되게 재밌는 일이 일어났는데
미군포로들이 일을 하러 나오지않고
다 숙소에서 배째라는 식으로 앉아있는거야.

할애비는 어리둥절해서 미군포로들이 있는 숙소를 쳐다봤지.
자세히 보니 미군포로들이 손짓 발짓으로 옥수수를 주는 배식통을 가리키고 있었어.
뭔 일인가 싶었지만 한시라도 일을 늦추면 국방군 포로들은 가차없이 맞았기 때문에
일에 다시 집중했지.

그날 배정받은 일이 다 끝날때까지도 미군포로들은 작업장에 코빼기도 안보였어.
그래서 우리 국방군 포로중에 가장 계급이 높았던 김 중위님이
인민군 숙소에 찾아가서 항의했어.
왜 국방군만 일을 하고 미군은 일을 하지 않느냐고.

얼마 후 김 중위님이 돌아오셨어.
그리고 김 중위님이 해주신 얘기는 충격적이었어.
미군 포로들이 비인간적으로 적은 식량배급을 문제삼아
앞으로도 계속 일을 나오지 않겠다고 말했다는 것이었지.

우리는 미군 포로들이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어.
여차하면 인민군 포로들이 그저 포로를 학살할 수도 있는데
제네바 협약을 근거로 정정당당히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두고
미국이란 나라의 민주주의는 정말 대단하구나 생각했단다.

이때 포로수용소에 2년가까이 갇혀있던 이 중사가 흥분하기 시작했어.
우리도 일에 나가지 말아야한다고 말이지.
2년 동안 감자만 먹고 살다보니
이제 감자만 보면 비린내가 난다며 
우리도 일하지 말자고
김 중위께 건의했지만 대다수 국방군 포로들은 반대했어.
인민군들이 너무 무서웠으니...


그렇게 한바탕 갑론을박이 끝나고
벌써 옥수수 배급 시간이더라고.
그런데 그날은 옥수수 수레를 낯선 사람이 끌고왔단다.
자신을 정치장교라 소개하던 그 사람은
사람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어.

"동무들. 동무들까지 노작활동에 나오지 않으면 어떡하네?
 저 미제 돼지새끼들은 아침 점심 저녁 계속 우리가 밥을 주는데도
 노동쟁의를 한다는데 참말로 기가 막히는 일이지 않간?
 이렇게 아침 저녁에만 밥을 줘도 열심히 일하는 우리 국방군 동무들도 있는데...
 여튼 왠만하면 낼부터 일 나오라우. 우리도 내일 12시.. 정오를 기해서
 그 때까지 나오지 않는 미군들은 배급을 끊아야지."

그리고 그 정치장교는 홀연히 인민군 건물로 들어갔어.
미군들이 일하다 도중에 먹는 옥수수가
저녁에 숨겨놓은 옥수수가 아닌
점심에 따로 배급받아먹는 옥수수임을 알게 된 우리들은 어안이 벙벙했지.
숙소에는 몇 분간 적막이 흘렀어.


적막을 깨고 박 병장이 한마디했어.
박 병장도 이 중사님과 함께 수용소에 들어와서 수용소 감자는 질릴대로 먹은 사람이었지.

"저런 우라질놈들의 미군새끼들. 우리는 하루 두 끼밖에 못 먹는데 지들이 감히 불만을 내?
 김 중위님. 이 중사님. 우리 이 미군 돼지새끼들을 다 조져버려야하지 말입니다."

분노에 찬 박 병장에게 김 중위는 그만 진정하라며 모두들 일찍 취침해야 내일 일을 하지 않겠냐며
분위기를 진정시켰단다.


그 날 새벽에 오줌이 마려워 밖으로 나온 이 할애비는 밖에 나오자마자 
평생 잊지 못할 광경을 보았다.

"무슨 광경이었길래요 할아버지?"

하... 불이 나고 있었어.
미군 숙소가 불이나서
거의 다 타버렸지.
미군들은 다 불에 타 죽었고.

그리고 그 앞에서는 박 병장이 낄낄대고 있었는데
그 웃음소리와 함께 불길의 바알간 빛이 얼굴에 비친
박 병장의 얼굴은 너무도 그로테스크했었다...

아침이 되어 박 병장은 인민군에게 자신이 한 짓을 모두 자백했어.
우린 모두 박 병장이 사형당할거라 생각했어.
그런데 오히려 인민군은 박 병장에게 큰 상을 내리더구만.
박 병장이 인민군들 대신 골칫거리를 해결해주었으니 그들 입장에서는 고마웠겠지.
휴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우리는 계속 하루에 세 끼를 먹었어.
다들 너무 기뻤지.
우리보다 훨씬 많이 먹던 미군들에 대해 다들 여전히 분노가 치밀었지..

하지만 우리는 고작 밥 한끼 더먹는 댓가로는 가혹한 처분을 받았지.
휴전협정이 끝나기 전까지 우리는 미군들 몫의 일을 대신했다.
미군들 몫의 일까지 더하다보니
한 끼를 더 받아도 먹을 시간이 없어서 
사실상 여전히 하루 두 끼밖에 먹지 못했어.

"박 병장이라는 사람은 나중에 어떻게 되었나요?"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북한은 우리들더러 남, 북, 또는 중립국을 택하라고 했어.
박 병장은 자신이 벌인 일이 남한에서 처벌받을까 두려워 북에 남겠다고했어.


나는 남으로 가겠다고했고 나중에 남으로 가는 트럭에 타보니
박 병장이 두려움에 떨며 앉아있는거 아니겠어?
알고보니 미군측이 이 모든 일을 알고 
북측에 박 병장을 무조건 송환시켜 달라는 강한 압박을 넣어서
북한이 박 병장을 남으로 보낸거였어.
쉽게말해 이용만 당하고 버림받은거야..
남으로 내려가서 박 병장은 군법재판에 회부되어 사형당했어.

그 당시 기억은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많은 고민을 갖게 만들었고
살면서 쉽사리할 수 없는 결정을 여러번 내리게되는 원동력이 되었단다.

"어떤 결정이요?"

전쟁이 끝나고 30년 뒤에 전두환이라는 군인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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