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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 과거] 산문 - 그남자 그여자
게시물ID : humorbest_70522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GwangGaeTo
추천 : 25
조회수 : 1346회
댓글수 : 4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3/06/30 11:00:11
원본글 작성시간 : 2013/06/28 22:03:06
 
  
 
그녀의 시선이 사진 한 장에 멈췄다. 낡고 빛바랜 앨범 속에 들어있는 한 장의 사진에 멈췄다.
사진 속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열과 오를 맞춰서 웃고 있었다.
여자 옆에서 남자가, 남자 옆에서 여자가, 얼추 대여섯 명은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저마다 기쁨에 겨운 표정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서 웃고 있었다.
남자들은 모두 머리를 바짝 깎고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
여자들은 단발머리로 곱게 빗어 넘기고 흰색 블라우스와 검은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왼쪽 가슴팍의 하얀 명찰이 그들이 고등학생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남자와 여자들의 뒤편으로는 한관짜리 극장이 보이고 최고로 아름다운 여배우의 달콤한 사랑이야기라는 수식어가 붙은 영화의 포스터가 크게 붙어있다.
여자의 눈이 사진을 훑는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사진을 보던 여자의 시선이 한 남자의 얼굴에 멈춘다.
검고 진한 눈썹에 훤칠한 이목구비, 유독 뽀얀 피부가 미남형에 가까운
그 남자는 여자의 옆에 뒷짐을 지고 서있다.
겉으로 태연한척 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그는 옆에 있는 여자를 흘깃하면서 잔뜩 긴장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남자는 여자의 첫사랑이었다. 시골에서 살던 여자는 부모님의 성화 속에 도시로 고등학교를 오게 되었다.
시골에서 다니던 중학교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크고 복잡한 도시 생활에 쉬이 적응을 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시기에 같이 하숙하는 친구의 소개로 빵집에서 처음 남자를 만났다.
남자는 처음 본 순간부터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자신의 생에 처음으로 보는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았다는 그 말에 여자는 부끄럼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여자는 처음엔 남자를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끈질겼다.
학교도 땡땡이치고 비오는 여자의 학교 앞에서 우산도 없이 몇 시간을 기다렸다.
마침내 수업을 파하고 우산을 쓰고 나오는 여자에게 헐레벌떡 달려와서는
젖지 않게 품안에 고이 간직한 꽃그림이 그려진 편지를 황급히 여자의 가방 안에 우겨넣고서는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얼굴을 붉히며 돌아 뛰어갔다. 여자는 어쩔 줄 몰랐다.
주위에서 다른 학우들이 수군대는 틈에 정신이 혼미해지고 집에 어떻게 왔는지 조차 모를 정도였다.
집에 와서 꺼내본 편지에는 그야말로 소년의 감성이 짙게 베긴 글귀들이 적혀있었다.
‘나의 심장은 오직 그대만을 위해 뛰는 것임을 알았기에……. 싱그러이 햇살을 머금은 아침이슬처럼 그대의 미소는 아름다워 눈길을 거둘 수가 없습니다. 난 오늘도 그대의 목소리를 생각하며 잠들고 그대의 미소를 꿈꾸며 눈을 뜹니다. 이제 내게 그대가 없다는 것은 앙꼬 없는 찐빵마냥 부질없는 것입니다.’
남자가 밤새워 제 딴에는 멋있고 아름다운 말이라고 기쁨에 겨워 한 글자 한 글자 적어가는 모습이 소녀의 머릿속에 그려지자 여자는 입가에 지긋이 미소를 머금었다. 그때부터 남자와 여자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남자와 여자는 하루에도 수십 통의 편지를 쓰고 학교가 파하고 난 뒤에는 남자는 항상 여자의 학교 앞으로 여자를 데리러 왔다. 남자와 여자는 시내 곳곳을 누비며 점점 더 가까워졌다.
롤러장도 가고 콜라텍도 가고 여자는 처음으로 디스코도 배우고 트위스트도 배웠다.
이제 시골에서 올라와서 도시의 흐름에 치이던 여자는 한명의 당당한 도시여자로써 거듭났다.
남자도 갈수록 여자에게 극진했다. 방학 중에는 여자의 시골집에 친구들을 이끌고 내려와 농사일을 돕고 마을의 낡은 집들을 고치기도 했다.
남자는 여자의 동네에서는 이미 여자의 사윗감이었고, 든든한 청년이었다.
여자도 남자의 집에 가서 집안일을 거들고 눈도장을 찍기 시작했다.
남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미 큰 공장에 취직이 약속돼 있었기 때문에 여자와 남자의 부모님은 은근히 결혼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게 여자가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일이었다. 여자와 남자는 이제 학교에서도 유명 인사였다.
잘생긴 미남형의 귀공자와 시골여자의 로맨스는 마침내 신데렐라의 화신이 되어 후배들은 누구나 꿈꾸는 전설이 되었다.
여자와 남자는 매일이 새롭고 행복했다. 남자와 여자는 이제 도시를 벗어나서 여기저기 여행도 다니기 시작했다. 무엇도 거릴낄 것도 없었고, 남들의 눈치도 필요 없었다.
남자는 만난 지 2년이 지나 3년이 가는 과정에서 더욱 더 여자를 아끼고 보살피며 존중했다.
여자도 남자를 존중하고 대우하며 그 감정의 우물을 더욱 깊게 파들어 나갔다.
어느덧 시간을 흘러 꽃이 피었다가 지고 청록의 나뭇잎들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중간고사를 한주 앞두고 남자와 여자는 친구들을 불러 모아 하루를 신나게 놀자고 계획했다.
아침을 먹고 나온 무리들은 시내의 빵집에서 모여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동갑의 남자와 여자가 만났기에 거리낄 것도 없고, 맘 놓고 놀다오라고 남자의 부모님이 두둑이 챙겨준 용돈도 충분했기에
그들은 콜라텍도 가고 롤러장도 가면서 다가올 시험에 대한 걱정을 뿌리치기 위해서 더욱 미친 듯이 놀았다.
그리고 해가 저물고 무리들은 영화관으로 향했다. 남자의 친구 하나가 검은 가방 속에서 사진기를 꺼내들었다.
‘우리 이참에 사진하나 남기자.’
영화관 포스터를 배경으로 남자와 여자를 가운데 세우고 무리들은 사진을 찍었다. 남자의 눈에는 포스터 속의 소피마르소보다 옆의 여자가 더욱 아름답고 우아했다.
그렇게 한주가 지나갔다. 여자는 단정히 옷을 입고 학교로 향했다. 그런데 거리의 분위기가 전과 달리 어둡고 무거웠다. 학교에 가니 선생님들이 오는 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의 학교로도 가보았다. 남자도 여자의 학교로 향했고, 둘은 중간에서 마주쳤다.
여자의 눈은 생전보지 못한 상황에 두려움과 긴장감에 물들었다.
남자는 짐짓 헛기침을 크게 하고는 여자를 시골집으로 가는 버스정류장으로 데리고 가서 여자를 버스에 태워 집으로 보냈다. 남자는 손을 크게 흔들며 환하게 웃어보였다.
여자도 손을 크게 흔들며 웃으면서 떠나갔다. 여자는 집에서 며칠을 머물렀다. 이상하게도 여자가 머물던 도시의 하숙에서 여자의 짐을 보냈고 남자의 친구가 인화한 사진을 편지로 보내왔다.
그 뒤로 도시로 가는 길이 막히고 여자는 하릴없이 시간을 집에서 보냈다.
얼마나 지났을까? 여자는 마침내 다시 학교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디를 둘러봐도 여자는 남자를 만날 수가 없었다. 여자는 남자의 집으로 찾아가보았지만, 빈 집만 덩그러니 남은 체 남자의 가족들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남자의 친구들에게도 물었지만 남자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수백 명의 학생들에게 물어물어 여자가 얻은 소식은 몇 주 전에 남자가 사람들에 섞여서 도청으로 가고 있었다는 것 말고는 없었다. 그렇게 남자와 여자는 헤어졌다. 여자는 낡은 앨범에서 낡은 사진을 꺼내 올렸다.
사진의 뒤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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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5일 광주극장 앞 라 붐을 보기 전에. 우리의 추억을 남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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