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문숙
공사중인 골목길
접근금지 팻말이 놓여있다
시멘트 포장을 하고
빙 둘러 줄을 쳐 놓았다
굳어지기 직전,
누군가 그 선을 넘어와
한 발을 찍고
지나갔다
너였다
기억하는가 -최승자
기억하는가
우리가 만났던 그날
환희처럼 슬픔처럼
오래 큰물 내리던 그날
네가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네가 다시는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평생을 뒤척였다
너에게 묻는다 -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꿈 -황인숙
가끔 네 꿈을 꾼다
전에는 꿈이라도 꿈인 줄 모르겠더니
이제는 너를 보면
아, 꿈이로구나
알아챈다
풀꽃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꽃 -조은
오래 울어본 사람은
체념할 때 터져 나오는
저 슬픔과도 닿을 수 있다
오, 여보! 中 -한 무명 블로거
비록 이 늙은이가 앳된 여린 감정은
전부 지난날에 묻은 거처럼 담담해 보인대도
사랑 하나 기억하는 것만큼은
막 피어난 꽃과 다를 바 없으니
꿈속을 걷는 듯 초점 없는 눈동자로
항상 먼 하늘 지키며 자네를 그리워했소
이제 시대의 사랑이 아니라 노망에 빗대
주책 맞다 쓴소리 받을지라도
결코 변함없는 기억은
내가 한 사람과 정조를 약속하며 짝을 이룬 것이고
운명을 초월한 삶의 크기를 본 것이고
과분하게도 턱없이 행복했으니
다 갚지 못해 남은 생 보내는 것으로 생각하리다
첫사랑 -이운학
그대가 꺾어준 꽃,
시들 때까지 들여다보았네
그대가 남기고 간 시든 꽃
다시 필 때까지
첫사랑 -김현태
눈을 다 감고도
갈 수 있느냐고
비탈길이 나에게 물었다
나는 답했다
두 발 없이도
아니, 길이 없어도
나 그대에게 갈 수 있다고
이런 시 -이상
내가 그다지 사랑했던 그대여
내 한 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평생 못 올 사람인 줄은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다
자 그러면 어여쁘신 그대는 내내 어여쁘소서
호수 -정지용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
눈물 (작자 미상)
만일 내가 무엇인가로 돌아온다면
눈물로 돌아오리라
너의 가슴에서 잉태되고
너의 눈에서 태어나
너의 뺨에서 살고
너의 입술에서 죽고 싶다
눈물처럼
만추 -김광선
이십년을 넘게 산 아내가
빈 지갑을 펴 보이며
나 만원만 주면 안 되느냐고 한다
낡은 금고 얼른 열어
파란 지폐 한 장 선뜻 내주고
일일 장부에 '꽃 값 만원' 이라고 적었더니
꽃은 무슨 꽃
아내의 귀밑에 감물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