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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1980년 5월 28일 수요일이다
게시물ID : sisa_6824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eneloop
추천 : 14/3
조회수 : 492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09/05/18 09:14:37

일력상으로는 평범한 하루일 뿐이고 우주의 시한으로 보면 자취조차 찾을 수 없는 마디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나는 오늘 너무 격한 충격을 받았다. 그 충격의 심도나 무게를 나 스스로 감당할 길이 없고 주체할 방법이 없어서 이 글을 적는다
그저께 광주시가 계엄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진압”이란 말은 무법자 전두환의 입장에서 차용된 말에 불과하다. 임금의 입장에서 볼 때 동학혁명이 “난”이 듯이 말이다. 광주시는 게엄군에 의해 짓밟힌 것이다.
그날 새벽 세시의 암흑 속에서 광주시민이 팔백 명이나 죽었다는 것이다.
일본의 신문들이 그렇게 보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신문은 칠백 명 어느 신문은 팔백 명으로 보도했다는 것이다
이 나라 신문들은 하나같이 계엄사령부 발표라는 사족을 붙여 민간인 17명 사망 계엄군 2명 순직으로 보도하고 있다
어느 것을 믿어야 할까
슬프고 서럽게도 나는 일본의 보도를 믿을 수밖에 없다.
이 나라 신문들은 일찍이 이승만 치하에서 병들었고 박정희 치하에서 죽었으며 이제 전두환의 비상계엄하에서는 썩는 냄새를 푹푹 풍기고 있다. 
팔 일간 계속된 피로 물든 그 엄청난 항쟁을 보면서 신문들은 단 한 토막의 취재기사도 내보내지 못하고 말았다.
어찌하랴. 이 절망의 늪에서 비참하고 암울한 채로 일본 신문들의 보도를 믿을 수밖에.
학생 시민이 야밤 두 시간 사이에 팔백 명이나 죽었다. 광주시민은 팔십만이다. 그러면 몇분의 일인가
-중략-
이때 작가라는 이름을 가진 나는 과연오늘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이 시점에서 만해 한용운 선생이나 시인 이육사가 살아 있었다면 어찌했을 것인가. 결코 좌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분들이 쟁취하고자 했던 것도 “자유”이며 오늘 쟁취하고자 하는 것도 “자유”가 아닌가. 차이가 있다면 이민족과 동족이라는 것뿐이다
그분들의 혼은 역시 위대했다
나는 오늘 용서받을 수 없는 비겁자가 되었다. 더 살고 싶지 않은 이 암담한 좌절감 환멸.


-조 정 래-



그때의 언론과 지금의 언론에서 큰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데
미디어법까지 통과된다면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영영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민주주의를 수호하며 518로 숨져간 고인들의 명복을 빌며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후세이길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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