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선거 이야기입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 대선 사상 최초의 매카시즘, 흔히 색깔론이라 불리는 공세가 격렬했던 제 5대 대통령 선거의 이야기입니다. 1963년 10월 15일에 치러졌지요. 매카시즘의 기원이 된 조지프 매카시에 대한 글은 카카오 세계사 채널에 올려놓은 게 있으니 한 번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다음 링크를 통해 넘어가실 수 있습니다. https://story.kakao.com/ch/historyhuman/fPCo5KMtc70 (클릭) ----------------------------------------- 5.16군사정변 직후 쿠데타 세력은 군사혁명위원회라는 초법적 기관을 설치합니다. 위원장은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장도영이었으나 그는 어디까지나 바지사장에 불과했고, 군사혁명위원회의 실질적인 수장은 부위원장인 박정희였지요. 박정희는 군정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이고 적절한 시기에 민간인에게 정권을 넘겨준다는 민정이양을 약속하였습니다. 뭐 약속을 지키기는 했습니다. 군정이 끝나기 전에 예편하고 민간인의 신분으로서 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거든요. 대선에 출마한 박정희는 선거활동을 시작하기 전부터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5.16 이후 국내의 모든 정당이 해산 당했고 이 조치는 1962년 12월 31일까지 이어졌지만, 박정희는 그 이전부터 정당 창당 계획을 차근차근 밟아나가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정치를 하려면 돈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당시만 해도 한국은 매우 가난한 나라였고 권력을 잡은 군부라도 합법적으로 많은 돈을 끌어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일어난 게 ‘4대 의혹 사건’입니다. 일본의 빠찡꼬와 일제 택시 도입, 워커힐 호텔 건설 자금 유용, 그리고 주가 조작을 통한 증권파동. 이 사건들은 청렴한 군인의 이미지를 강조하던 군부의 도덕성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으나 김종필이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났기에 어찌어찌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생긴 불법수익은 모두 창당 자금으로 들어갔지요. 이 자금을 바탕으로 탄생한 것이 공화당입니다. 반면 공화당에 소속되지 못한 다른 정치가들은 준비활동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대선이 1년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야 정당 활동이 가능해졌으니까요. 게다가 당시 군부가 개정한 헌법에는 국회의원 후보건 대통령 후보건 반드시 소속 정당의 추천이 있어야만 출마가 가능하다고 못박아놓은 상태였습니다. 즉 무소속 출마가 불가능했지요. 이로 인해 정당 창당이 가능해진 1963년 1월 1일부터 군소정당이 우후죽순 나타났습니다. 정치를 하고 싶은 사람은 언제나 많은 법이고 그들이 의견을 합칠 시간은 부족했으니까요. 안 그래도 사전준비 작업을 거친 거대여당 공화당과는 상대가 안 되는데 그 미약한 세력들이 서로 싸우게 된 것이지요. 결국 7개 당에서 대통령 후보를 냈습니다. 이중 가장 유력한 후보는 공화당의 박정희와 2공화국의 대통령 출신인 윤보선이었지요. 기본적인 구도는 다른 여섯 후보가 박정희의 군정을 비판하는 것이었지만 윤보선 역시 5.16을 방조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어 공격받았습니다. 이대로면 공화당의 승리가 분명해보였기에 또 다른 야권 후보인 허정, 송요찬이 윤보선을 지지하며 후보에서 사퇴합니다. 1963년 9월부터 박정희 vs 윤보선의 구도로 흘러갔지요. 이때부터 5대 대선의 백미인 사상논쟁이 시작됩니다. 잘 아시겠지만 훗날 박정희는 반공을 국시로 삼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5대 대선에서 매카시즘 공세를 이어간 건 박정희가 아닙니다. 오히려 윤보선이 박정희의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발언을 이어갔지요. 윤보선은 “여순반란사건의 관련자가 정부 안에 있다.”는 발언을 시작으로 박정희의 남조선노동당 활동 경력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니까 ‘저놈 사실 빨갱이’라는 매카시즘 공세를 펼친 겁니다. 당시 박정희는 윤보선이 가식적인 민족주의자라며, 본인이야말로 진정한 민족적 민주주의자임을 자처하곤 했습니다. 윤보선은 ‘박정희가 말하는 민족적 민주주의란 공산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주장하며 맹공을 펼쳤지요. 당연히 박정희는 반발했습니다. 그가 여순사건에 개입한 것은 아니나 남로당 군사총책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된 것은 사실이지요. 박정희는 자신이 이미 전향했음을 밝히며 <동아일보>에 다음과 같은 광고를 냈습니다. “우리들은 이제 이 나라 사회의 근대화작업을 끈덕지게 방해하고 있는 일체의 매카시즘을 타도 청소해야 할 공동의 전선에 섰습니다. 무슨 일이 있던지 우리는 한국적 매카시즘의 신봉자를 우리사회에서 일소시키기 위해 분연히 궐기하여 과감히 투쟁합시다.” -<동아일보>, 1963년 10월 5일, 공화당의 선거 광고 중 훗날 박정희의 행적을 감안하면 정말 흥미로운 내용이지요. 이때의 사상논쟁 때문에 박정희가 대통령 시절 더욱 반공을 강조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러나 윤보선의 매카시즘 공세는 오히려 본인의 지지율을 낮추는 악수로 작용했습니다. 대구 10.1사건, 제주4.3사건, 여순사건, 국민보도연맹원 학살 등등의 아픔이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좌익으로 몰려 많은 사람이 죽고 그 가족들도 연좌제에 몰려 고통 받던 상황에서 윤보선의 주장을 들은 사람들은 생각했지요. ‘윤보선 당선되면 우리 또 죽는다.’ 특히 이념갈등에 의한 학살을 직접적으로 겪은 전라남도와 경상도, 제주도의 유권자들은 박정희를 전폭적으로 지지했습니다. 제주도에서 박정희의 득표율은 70%에 육박할 정도였지요. 또한 박정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던 진보적인 혁신계열 인사들도 윤보선을 극우인사로 판단하고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합니다. 결국 46.6%의 득표율을 기록한 박정희가 45.1%의 득표율을 기록한 윤보선을 제치고 당선됩니다. 역대 최저수준인 15만 표 차이였으며 대한민국 대선 역사에서 가장 치열한 승부로 평가받지요. 사실 윤보선에게 그렇게 불리하기만 한 선거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에 대한 인식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고, 군정 중 화폐개혁 실패와 가뭄이 겹쳐서 박정희의 행정 능력에 의문을 품은 사람도 많았지요. 거기다가 4대 의혹사건 및 일본육사 출신이란 친일 행적까지. 이것들을 잘 공략했다면 윤보선에게도 승리의 가능성이 있었겠으나 그는 박정희의 사상문제에만 집중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본인의 발목을 잡은 꼴이 되었지만요. 참고로 대통령 선거 한 달 뒤에 총선이 치러졌는데 이때 공화당은 33.5%의 매우 낮은 득표율을 기록합니다. 그럼에도 175석 중 110석이라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지요. 야권이 서로 반목하고 분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공화당 이상의 삽질을 반복한거지요. 야권은 대선에서의 패배를 만회하는 데 실패했고, 이후 정국은 박정희 대통령과 공화당 중심으로 흘러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