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디 까지 피해야하는가.
어디까지 억압당해야 하는가.
점점 민주주의가 파괴되고 있다.
언제부턴가 언어의 자유도 억압되고있고, 오늘에서야 그 자유의 억압또한 지극히 느낀다.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넌 뭐하다 이제 오노'
난 서울사람이라 이게 정확히 맞는 사투리인지 아닌지 모른다.
근데 친근감도 있고 좋아서 예전부터 썻었다.
'아따 콩진호 머리 차암 잘쓴데이'
이딴것도 맞는지 아닌지 모른다
민주화도 ' ~~를 민주적인 환경이나 상태로 만든다'
운지라는 말도 정확한 용어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떨어진다, 낙하하다 정도로 쓰고있었다.
오늘 논란이 된 찌릉찌릉은 '쇠붙이 따위가 빠르게 울리는 소리' 라고 오늘 알게되었다.
근데, 왜 우리는 이딴걸 구분하고 있는거지?
왜 우리 한국어를 사랑하자 사랑하자 해놓고 우리끼리 한국어를 억압하고 있는거지?
언어는 사용하면서 발달되고 진화하는 유기체인데, 왜 우리 스스로가 억압을 해야되는거지?
난 그렇게 생각한다.
언어에는 좋고 나쁨이 없다고.
다만 그 안에 들어가있는 의도와 의미가 언어에 의미를 부여하는것이라고.
이미 구시대 친일파가 규정지었는지 아니면 진정한 역사 학자가 규정지었는지 모를 표준어에대한 정의는 현재 우리사회의 표준어와는 거리가 멀어졋고, 앞으로도 따라잡긴 힘들다.
교양있는 현대서울사람들이 쓰는 언어.
교양은 썩어 문드러지고 있고, 소수혹은 다수의의 지혜와 진실을 추구하는 시민들의 기지와 마음만 빛나고 있으며
이 무던히도 넓은 인터넷 세계에 거리상의 지방과 서울은 존재하지않는다.
더이상 표준어규정의 의미는 크지않다.
그가 나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나는 다만
하나의 단어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부름에 응하였을 때,
난는 그에게로 가서
의미가 되었다.
그가 나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는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김춘수 - 꽃
이라는 시가 떠올랐고.
이렇게 느꼈다.
문득, 서글퍼진다.
그는 향기가 되고싶은 뿐인데
악취나는 그곳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인데
우리는 제대로 불러준적없고 도와준적없으면서
그의 뻣는 손은 떼어내고 저멀리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나는 오염되지 않았어' 라고 위로하고 있는건 아닐까.
이제 그의 외침을 외면 하며 있고 싶지않다.
나는 그를 향기롭게 해주고싶다.
그를, 불러주겠다.
- 붙임말
평범한 눈팅족이
뭔가 울컥한 마음에 논란이되고있는 지니게에 작성하게되었습니다.
이왕 작성하게된 김에 오유에 하고싶었던 말을 좀 붙이겠습니다.
요즘 오유가 많이 아파하는것 같은데 더이상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20대 초반의 나에게 큰 스승이 되어준 오유 사랑합니다.
그리고 오유그 자체인 여러분도 사랑하고 올해 좋은 일들이 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