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연재] 奇談 - 여섯번째 기이한 이야기 : 처녀귀신 (1)
게시물ID : panic_6262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글곰
추천 : 22
조회수 : 2250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4/01/09 09:11:27
  “예?”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은 건 아니었다. 어이가 없어서, 혹은 당황스러워서 나오는 감탄사였다. 그러나 의뢰인은 해원이 못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시무룩한 표정으로 되풀이했다.

  “처녀귀신이 밤마다 정기를 빨아간다니까요.”  

  “아, 예......”

  웃고 싶었지만 웃을 수 없어서 해원은 괜히 테이블에 놓인 커피 잔을 만지작거렸다. 의뢰인은 젊은 남자였다. 키는 조금 큰 편이었는데 비쩍 말라서 볼품이 하나도 없었다. 눈은 움푹 들어가 퀭해 보였고 피부에는 윤기가 없었다. 머리털은 부스스했다. 본인은 스물한 살이라고 말했지만,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 잡혀서 그런지 적어도 삼십대로 보였다. 그가 헐렁한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듯 말했다.

  “제가 177에 72킬로그랩이었거든요. 두 달 전에요.”

  “지금은요?”

  “54킬로그램요.”

  “두 달 만에 말입니까?”

  “예.”

  남자는 버거운 듯 자신의 커피잔을 힘겹게 들어 올려 입가로 가져갔다.

  “정말 하루하루가 힘들어요. 전 농구하는 걸 좋아하는데, 요즘은 농구는커녕 이렇게 밖에서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거든요. 게다가 살이 없어져서 딱딱한 의자에 앉으면 엉덩이가 아파 견딜 수가 없어요. 그러다보니 학교 수업 듣는 것도 곤욕이에요.”

  해원은 그가 커피숍의 작은 나무의자 위에 깔고 앉은 두툼한 방석을 흘끗 곁눈질했다. 남자가 주섬주섬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사진을 띄워 내밀었다.

  “여기 보세요. 여기 이게 저거든요. 완전 못 알아보겠죠?”

  지금보다 20킬로그램쯤 살이 쪘다는 사실을 감안하고 나서야 간신히 사진 속의 남자가 의뢰인이란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사진 속의 의뢰인은 비교적 통통한 얼굴에 함박웃음을 띤 채 카메라를 향해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장마철 홑이불처럼 축 늘어진 지금의 모습과는 천양지차였다. 해원은 휴대전화를 돌려주었다. 밤마다 관계를 맺으며 남자의 정기를 빨아들이는 처녀귀신 이야기야 해원도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남자들끼리 낄낄대며 주고받는 농담에서나 나오는 이야기로 생각했던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라면 심각한 문제가 분명했다. 그리고 눈앞의 의뢰인은 분명히 심각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해원은 딱딱한 카페 의자에 등을 기댔다.

  “좀 더 자세하게 듣고 싶습니다.”

  의뢰인은 잠시 주변을 살펴보며 망설이다 이내 한숨을 쉬며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씀드릴게요.”



  의뢰인 희민은 올해 대학교 2학년이었다. 지방에서 올라와서 신입생 때부터 내내 4인 1실인 기숙사에 살고 있었다. 햇살 따뜻한 5월 중순, 길었던 중간고사가 끝나자 희민의 룸메이트들은 제각기 고향에 내려가거나 데이트를 하러 외출허가를 받아 일찌감치 사라진 터였다. 얼마 전에 여자친구와 헤어진 희민만이 남아 주말 저녁의 기숙사 방을 하릴없이 지키고 있었다. 온종일 컴퓨터나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내던 희민은 별 생각 없이 숨겨둔 폴더를 열고 야동을 재생시켰다.



  “뭐, 별다른 이유가 있었던 아니고요. 그냥 생각이 나서요.”

  희민이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말했다. 물론 해원은 스물한 살의 희민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에 말없이 살짝 고개만 끄덕였다.  

  “......하아. 남자들이란 정말.”

  바리가 넌더리를 내며 속삭였지만 해원은 못 들은 척했다.



  화면 속의 차츰 남녀가 절정에 다다르면서 희민도 덩달아 흥분하던 차였다.

  ‘아읏......’

  갑작스레 귓가에서 여자의 나지막한 신음 소리가 들렸다. 희민은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혹시라도 소리가 새어나갈까 싶어 아예 스피커를 꺼 놓은 채 화면만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잘못 들었나?’

  희민은 다시 화면으로 눈길을 돌렸다. 남녀는 자세를 바꿔 가며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희민은 이내 다시 영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남자가 격렬하게 허리를 움직이며 여자가 몸을 활처럼 휘는 찰나,

  ‘아흥......’

  희민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절대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가 희민의 귓가에 대고 속삭인 것처럼 확실하게 들린 신음소리였다. 희민은 영상을 정지시킨 후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하지만 방 안에는 분명 혼자뿐이었다.

  ‘뭐야 이거?’

  혹시 옆방에서 누가 여자를 데려왔나 싶기도 했다. 당연히 규정상 금지되어 있었지만, 기숙사 생활을 오래 한 선배들은 주말에 남몰래 여자친구를 기숙사 방으로 데려오곤 했다. 희민도 침대에 누워 졸다가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에 야릇한 기분이 들었던 적이 두어 번 있었다. 하지만 방금 전에 들려온 소리는 그때와는 달랐다. 벽 너머가 아니라 바로 귓가에서 들리는 것처럼 또렷한 소리였다.

  그러나 한참 동안 기다렸지만 그 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역시 잘못 들은 건가......’

  하지만 그 바람에 희민의 흥분도 가라앉은 상태였다. 그는 투덜거리며 컴퓨터를 종료시킨 후 침대로 다가가 몸을 던졌다. 그리고 얇은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흥이 깨진 김에 할 일도 없으니 잠이나 자려는 심산이었다.



  “그 때 분명히 불을 안 껐어요. 눕고 나서야 생각이 났지만, 이불 밖으로 나가기가 귀찮더라고요. 불이 켜져 있다고 못 자는 성격도 아니니 그냥 이불을 뒤집어썼죠.”

  희민이 확실하다며 장담했다.

  “하지만 눈을 떠 보니 어느새 불이 꺼져 있더라고요.”



  문득 희민은 잠에서 반쯤 깨어났다. 워낙 잠이 많은 그가 자던 중에 깨어나는 건 드문 일이었다. 불이 꺼진 방은 어두웠다. 작은 창문에서 어슴푸레하게 비쳐드는 누런 가로등 불빛에 기대어 간신히 주변의 윤곽 정도만 구분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몰려드는 졸음에도 불구하고 희민은 불이 꺼져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분명히 불을 켜고 잤는데...... 누가 왔나? 오늘 아무도 안 들어올 텐데.’

  희민은 잠시 귀를 기울여 보았다. 하지만 방 안에서 다른 사람의 숨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갑작스럽게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바로 귓가에서 속삭이는 듯한 여자의 목소리가.

  ‘안녕.’



  “‘안녕.’이라고 했어요. 분명 그렇게 말했어요.”

   ‘꺄악‘이나 ’살려줘‘ 정도를 예상하고 있었던 해원은 뜨악한 기분에 다시 한 번 확인을 했다.

  “인사를 했단 말씀인가요?”

  “예. 인사를 했어요.”

  희민이 끄덕였다.



  희민은 잠이 확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상체를 일으키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가위에 눌린 것 같았다. 전에는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희민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어떻게든 움직여보려 애쓰며 눈알을 굴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절대 잘못 들은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그 목소리는 익숙했다. 희민이 낮에 들은 것과 같은 목소리였다.

  ‘이익, 움직여!’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희민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손끝조차 움직일 수 없었다. 덮고 있던 이불이 갑작스럽게 펄럭였다. 냉장고를 열어놓기라도 한 듯 차가운 공기가 발 아래쪽에서부터 밀려오더니, 문득 묘한 느낌이 하체를 감쌌다.



  “그리고......”

  희민은 말을 멈추더니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딱히 더 듣고 싶은 생각도 없었던 해원이 확인차 질문을 던졌다.

  “귀신으로 추정되는 존재와 관계를 가졌다는 말입니까?”  

  얼굴이 달아오른 희민이 말없이 긍정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계속이요?”

  “예. 거의 매일요.”

  희민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침묵이 흘렀다. 해원은 당혹스러움과 곤혹스러움 사이의 어딘가쯤에 우두커니 서 있는 기분이었다. 하필이면 바리가 함께 있는 상황에서 여자의 신음소리를 들었다느니, 관계를 가졌다느니 하는 듣고 있는 건 민망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만일 이런 이야기가 나올 것을 알았더라면 무슨 핑계를 대서든 바리를 떼어놓고 왔을 해원이었다.

  ‘이걸 어떡해야 하나.’

  이런 곤란한 의뢰는 거절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주머니 사정이 빤한 대학생에게 사례금을 제대로 받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해원을 바라보는 희민의 퀭한 눈에 어린 간절한 눈빛을 보니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이 일을 맡도록 하겠습니다.”

  희민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을 보며 해원은 내심 쓰게 웃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해원은 바로 희민의 기숙사 방으로 향했다. 지어진 지 꽤 되어 보이는 4층짜리 건물이었다. 입구에는 경비실이 있었지만, 희민이 친척 형이라고 말하자 경비는 무관심한 표정으로 흘끗 해원을 보더니 다시 TV로 눈을 돌렸다. 희민은 중앙 계단을 올라가 2층 왼쪽 복도로 해원을 안내했다. 난간을 양손으로 부여잡고 계단을 오르는 희민의 모습이 마치 노인처럼 힘겨워 보였다. 206호가 희민의 방이었다.

  “혹시 누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희민의 걱정과는 달리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토요일 낮이라 그런지 다들 외출을 나간 모양이었다.

  “음. 희민씨 침대가 어느 쪽인가요?”

  “저기, 오른쪽 2층요. 책상은 제일 오른쪽 거고요.”

  희민이 침대를 가리켰다. 좁은 기숙사 방 양쪽으로 2층 침대가 하나씩 놓여 있었고, 그 뒤쪽으로 책상 네 개가 가지런히 벽에 붙어 있었다. 침대도 책상도 건물만큼이나 오래되었는지 여기저기 때가 타서 꼬질꼬질해 보였다. 벽에는 창문이 두 개 나 있어서 햇빛이 비쳐 들어왔다. 갈색 창틀에 유리가 끼워진 낡은 여닫이창이었다. 천이 덧대어져 두툼한 커튼은 그나마 새 걸로 보였다.

  남자들이 사는 방답게 전체적으로 난잡해 보였는데 특히 책상 위가 심했다. 어느 책상이라고 할 것도 없이 온통 교과서와 필기도구, 빈 깡통과 과자봉지 따위가 뒤섞여 혼돈 그 자체였다. 희민의 노트북 위에는 컵라면이 놓여 있었는데 심지어 국물도 남아 있는 상태였다. 희민이 책상 위의 쓰레기를 주섬주섬 그러모으며 조금은 민망한 듯 중얼거렸다.

  “요즘 청소를 못해서......”

  요즘은커녕 기숙사에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청소를 하지 않았다는 데 해원은 돈이라도 걸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방 안에는 온통 퀴퀴한 냄새가 감돌고 있었다. 뭔가가 썩는 냄새 같아 해원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잠시만요. 이거 좀 버리고 올게요.”

  희민이 컵라면을 들고 황급히 방 밖으로 나갔다. 해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야 원.”

  “흐응. 여기가 남자 기숙사란 말이죠?”

  바리가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볼 만하지?”

  “진짜 더럽네요.”

  “......너무 직설적이네.”

  “사실이잖아요.”

  “하여튼. 그나저나 미안해.”

  “뭐가요?”

  “뭐랄까...... 좀 그런 일을 맡게 되어서.”

  바리가 쿡쿡거리며 웃었다.

  “아, 뭐예요 진짜. 가끔씩 너무 아저씨 같다니까. 내가 언제까지 고등학생인 줄 알아요?”

  그래, 라고 해원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바리가 아이 취급받는 걸 싫어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바리가 고등학생 때 죽은 이후로 벌써 십 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살아있었더라면 진즉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어딘가에 취업해서 직장에 다니고 있을 나이였다. 어쩌면 벌써 결혼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원은 여전히 바리가 처음 만난 그 때의 어리고 발랄한 고등학생으로만 여겨졌다.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바리가 모습을 드러낼 때도 항상 그 때의 모습 그대로였기에 더욱더 그럴지도 몰랐다. 그래서 이런 난처한 사건에 바리를 데려오고 싶지 않았던 게 해원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떼 놓고 오면 화를 낼 테지.’

  해원은 쓴웃음을 짓고는 말을 돌렸다.


(계속)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