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누군가가 여기 있는 건 분명해요. 그런데 뭐랄까...... 좀 특이한 느낌이예요.”
“특이하다고?”
“적어도 원한 같은 건 아니에요. 분명 뭔가 부정적인 감정이긴 한데......”
바리의 애매한 말에 해원은 좀 더 자세히 물어보려 했다. 하지만 마침 그 때 방문이 열리더니 희민이 들어오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쓰레기들을 버리고 온 모양이었다.
“죄송해요. 방이 너무 더러워서...... 누가 오는 경우가 없어서요.”
“괜찮습니다.”
해원은 뭔가 의심스러운 것이 묻어 있는 책상 의자에 살짝 걸터앉았다. 희민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앙상한 발목이 바짓단 아래로 드러났다.
“요즘 수업 듣기도 힘들다고 하셨는데, 이제 곧 기말고사 아닌가요?”
“예... 사실은 수업을 대부분 빼먹어서 곤란하게 됐네요. 아무래도 학고 뜰 거 같아요.”
“학점을 위해서라도 얼른 이걸 해결해야 하겠군요.”
해원은 양손으로 깍지를 껴서 턱을 괴었다.
“어떻게 보면 참 민망한 일인데, 룸메들이 아무 이야기도 않던가요?”
“아. 사실 아무도 몰라요.”
희민이 다행이라는 듯 웃었다.
“물론 제가 살이 빠지니까 다들 걱정하긴 하는데, 그냥 몸이 안 좋다고 하니 다들 그런가 하는 모양이에요.”
“아. 그렇습니까?
해원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아까 안 계실 때 잠시 살펴봤는데, 여기 어떤 존재가 있는 건 확실해 보입니다.”
희민이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조금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건 나중에 알아봐야 할 것 같고요. 우선 오늘 밤에 이 방이 비나요?”
“예? 아. 룸메들은 다들 안 들어올 것 같긴 한데요.”
“잘됐군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번 확인 부탁드립니다. 제가 이따 밤에 여기로 다시 오겠습니다.”
“밤에요?”
“예. 밤에 와서 확인해 보면 몇 가지가 확실해질 것 같습니다.”
해원은 희민과 약속을 잡은 후 기숙사를 나왔다. 밖으로 나와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자 머릿속까지 맑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해원은 학교 캠퍼스를 가로질러 큰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아, 해원은 마치 통화를 하는 양 휴대전화를 귀에 가져다 대고 말했다.
“이상한 거 하나. 왜 저 학생은 처음 사건 후 두 달이나 지난 후에야 나를 찾아왔을까?”
“그냥 이런 일을 해결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몰랐던 거 아니에요?”
“그랬을 수도 있지. 하지만 내 소문은 예전부터 들어왔었다고 하더라고. 물론 사기꾼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그냥 별 이유 없이 주저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래도 조금 이상한 게 사실이야. 그리고 이상한 거 두 번째.”
해원이 손가락을 꼽았다.
“두 달 동안 내내 그런 일이 있었다면 룸메이트 중 누군가가 눈치를 채지 않았을까? 듣자하니 주말에는 다들 나가는 모양이지만, 주중에는 수업 들어야 하니 기숙사에서 잘 거 아냐. 그런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저런 일이 거의 매일 있었다는 데 아무도 눈치를 못 챘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그렇긴 하네요. 하지만 다른 사람이 눈치 챘는지 아닌지가 중요한 거예요?”
“어쩌면. 그리고 세 번째. 가장 큰 의문인데, 저 고생을 하면서 왜 아직도 저 기숙사에서 살고 있는 걸까? 무서울 거 아냐. 겁도 나고.”
“방을 못 구하거나 그런 거 아닐까요?”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저런 일이 있으면 차라리 노숙을 하는 한이 있어도 제 발로 집에 돌아가지는 않을 것 같지 않아? 보아하니 외박도 비교적 자유로운 기숙사 같은데, 근처 친구 자취방이나 하다못해 찜질방이라도 갈 수 있을 거 아냐. 그런데 그러지 않고 있단 말이야. 저 모습을 보면 당장 말라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인데.”
바리가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의 특이한 느낌...... 그게 뭔지 알 것 같아요.”
“뭔데?
“특정한 사람에 대한, 원한처럼 거창한 건 아니지만 상당히 부정적인, 그러면서도 격렬하지는 않은 감정. 모르겠어요?”
“평소에는 안 그러더니 말을 돌리네?”
“에이. 그러지 말고 맞춰 봐요.”
피식 웃은 해원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짜증이라도 내는 건가?”
“땡. 정답은 삐친 거예요.”
“뭐?”
해원은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학생이 해원을 흘긋 쳐다보더니 무어라 투덜거리며 지나쳐 갔다. 해원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삐쳤다고?”
“확실해요.”
바리가 잘라 말했다.
해원은 약속시간에 맞추어 다시 기숙사를 찾아갔다. 경비는 낮와 같은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아예 머리를 푹 수그린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해원은 2층으로 올라가 기숙사 방문을 두드렸다.
“오셨네요.”
희민이 힘없이 웃으며 해원을 맞아들였다. 낮에 만났을 때보다 좀 더 비실비실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방 안은 낮과 다를 바 없이 지저분했고 퀴퀴한 냄새가 공중을 떠돌고 있었다. 해원은 흘끗 침대를 보았다.
“주무시고 계셨나요?”
“아. 아까 가신 후에 좀 잤어요. 피곤해서......”
“그냥 주무시기만 하셨나요?”
그저 슬쩍 떠본 것이었는데도 희민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아, 어 그게......”
혀를 차며 해원은 내심 중얼거렸다.
‘진짜 한심해 죽겠구먼. 내 동생 같았으면 넌 나한테 죽었어.’
그러나 해원은 잠자코 자리에 앉았다.
“시간이 별로 없었지만 아쉬운 데로 몇 가지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전문가를 만나 두어 가지 여쭤보기도 했고요.”
“조사라고요?”
“예. 아무래도 이런저런 배경 지식부터 말씀해 드리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우선 정기를 빨린다는 것 말씀입니다만........”
해원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람의 정기를 빨아먹는 귀신은 사실 드물지 않습니다. 불교의 팔부신중(八部神衆) 중 구반다(鳩槃茶)라는 귀신은 사람의 정기를 빨아먹고 산다고 합니다. 사람의 몸에 말의 머리가 달린 귀신인데, 딱히 성관계를 통해 정기를 빨아먹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일본의 유키온나, 그러니까 한자로 설녀(雪女)라고 쓰는 귀신은 때때로 지나가는 남자를 유혹해 그 정기를 빨아먹는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성적인 접촉이 개입되지요.
직접적인 성적 접촉을 전재로 하는 경우는 서양의 서큐버스와 인큐버스가 대표적입니다. 서큐버스는 남자의 꿈에 벌거벗은 여자 모습으로 나타나 관계를 통해 남자의 정액을 훔쳐간다고 합니다. 하인리히 크라머(Heinrich Kramer)라는 중세시대 이단 심문관은 서큐버스가 이렇게 남자의 정액을 훔치면, 인큐버스가 다시 여자들을 유혹해 그들을 임신시키는 데 이 정액을 사용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서큐버스가 정액을 훔쳐갔다는 건 아마 말 그대로라기보다는 오히려 상징적인 의미에 가까울 겁니다. 남자들이 몽정을 하는 이유를 서큐버스에게서 찾았다는 거지요. 그도 그럴 것이, 솔직히 귀신이 남자의 정액 따위를 가져가서 어디다 쓰겠습니까? 하다못해 흡혈귀는 인간의 피를 먹고 산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액을 먹고 사는 귀신같은 건 들어보지 못하셨을 겁니다. 당연한 거지요. 우리와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존재들에게 인간의 정액 같은 건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요.”
해원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계속했다.
“희민 씨의 의뢰를 받고 의문스러운 점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희민 씨는 두 달 동안 18킬로그램이나 살이 빠졌다고 하셨지요. 물론 귀신에게 정기가 빨렸다는 건 언뜻 생각하면 그럴듯한 해석입니다. 실재로 그런 귀신이 있다고도 하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장기간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정기를 빨아먹는 귀신은, 제가 과문한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의 구미호는 사람이 되기 위해 백 일 동안 남자와 함께 산다고 합니다. 여기에도 성적인 접촉이 내포되어 있지요. 같이 살면서 손만 잡고 자는 건 아닐 테니까요. 하지만 구미호 역시 딱히 남자의 정기를 흡수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사람이나 소의 생간을 꺼내 먹는 경우는 있습니다만 이건 애초에 논외입니다. 구미호가 희민씨의 간을 꺼내 먹었다면 지금 여기서 저와 이야기를 하고 있지도 못하실 테니까요.
사실 실재 현실에서도 유령이나 귀신같은 영적인 존재들과 함께 지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당이 가장 대표적인 예가 되겠지요?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아무래도 어느 정도 피로함을 느끼는 건 사실인 모양입니다. 흔히 영적인 존재는 음(陰)하기 때문에 사람과는 상극이라고 합니다. 살아있는 생명체들은 대부분 양(陽)의 성질을 지니니까요. 그래서 영적인 존재와 사람이 함께 있으면 자연스레 서로에게 조금씩 좋지 않은 영향이 간다는 겁니다. 마치 철이 공기에 노출되면 산화가 되어 저절로 녹이 스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지금 희민씨처럼 급격하게 몸이 상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희민 씨처럼 귀신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다면 아무래도 몸이 더 상하게 됩니다. 그런 걸 흔히 귀접(鬼接)이라고 하는데, 그걸 경험한 사람들은 보통 상당한 체력 소진과 함께 피로감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그건 정기를 흡수당한다는 개념과는 약간 다릅니다. 영어로 말하자면 액티브(Active)와 패시브(Passive)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귀신이 의도적으로 정기를 흡수하는 게 아니라 저절로 사람의 정기가 소진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일반적인 사람들 사이에서의 관계와 딱히 다르지 않습니다. 체력소진이 좀 더 크다는 점만 제외하면 말입니다.”
해원이 말하는 내내 희민은 입을 살짝 벌린 채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한참을 일방적으로 떠들고 있자니 피로가 몰려와 해원은 한 손으로 뒷목을 주물렀다.
“물론 하나의 가능성이 더 있긴 했습니다. 악의를 지닌 존재가 의도적으로 희민 씨를 해치기 위해 정기를 빨아가고 있을 가능성입니다. 그리고 아마 제 생각이지만, 희민 씨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제게 의뢰를 했을 겁니다. 그 존재를 어떻게 해 달라고요. 아닌가요?”
눈치를 보던 희민은 이윽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해원은 머리를 저었다.
“하지만 저는 이곳에 오자마자 그런 게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면 여기 있는 존재는 결코 희민 씨에게 원한이나 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요. 그러니 희민 씨가 이렇게 된 책임을 죄다 그 존재에게 돌리는 건 조금 지나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꼴이 된 건 사실이잖아요. 그런데 그 귀신의 책임이 없다고요?”
오랫동안 닫혀 있던 희민의 입이 열렸다. 그는 앙상한 팔을 들어 휘저으며 말했다.
“말이 안 돼요. 지금 뭔가 잔뜩 길게 이야기하셨지만 그저 말뿐이면 아무 소용도 없어요. 저는 실재로 정기를 빨렸다고요. 이 팔을 보세요! 겨우 두 달 만에 이렇게 말라 비틀어졌어요. 다리도 마찬가지에요. 이대로 있으면 저는 진짜 죽을지도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