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헌정질서의 문란과 퇴보를 걱정하는 아주대학교 교수 일동’은 국가정보원 사태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과 국회의 대응에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 국정원이 인터넷 댓글을 통하여 조직적으로 국내 정치와 선거에 개입하고 합법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하여 헌법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는데도, 수수방관을 넘어 심지어 옹호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먼저, 국정원이 벌인 여론조작과 정치개입의 문제가 정파적 입장이나 이념의 잣대로 접근할 사안이 결코 아님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우리는 국정원의 불법행위가 1961년 중앙정보부 창설 이래 26년간 독재정권에 복무했던 시절로의 회귀이자, 1987년 민주화 헌법 이래 26년간 이루어온 민주주의 헌정질서를 훼손하고 법치의 근간을 파괴한 국기문란이라고 판단한다. 하지만 사안의 엄중함과 이를 지적하는 각계의 선언이 이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법행위의 당사자인 국정원은 물론 국회와 대통령은 정파적 혹은 정치적 이해에 함몰되어 사태의 심각성에 상응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갈림길에 서 있다. 비밀정보기관을 앞세운 부정선거의 독재시대로 후퇴하는 것을 용인할 것인지, 아니면 공정선거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도록 책임을 다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아직은 대통령과 국회에게 선택의 기회가 남아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국정원 사태의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 대통령은 국정의 최고책임자로서 “국가의 계속성과 헌법을 수호할 책무”(헌법 제66조 제2항)를 지고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국정원은 대통령의 지시와 감독을 받는 직속기관이고, 국정원장은 대통령이 임명하며, 국정원 조직은 국정원장이 대통령 승인을 받아 정하고 있다. 따라서 대통령은 들끓는 국민의 여론과 관련 전문가의 의견을 수용하여, 국회의 입법조치가 있기 전이라도 적정한 권한 행사를 통하여 관련 인사에 대하여 책임을 묻고 국정원에 대한 근본적이고 전반적인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
또한 국회는 하루빨리 국정조사위원회를 가동하여 적극적으로 국정조사에 나서야 한다. 조사위원회 구성에서의 소소한 시비를 거두고 공정하고 객관적이며 철저하게 진상을 조사하여야 한다. 국회는 삼권분립의 주체로서 행정부를 견제해야 할 헌법적 책무가 있다. 여기에 여야가 다를 수 없다.
국회의 책무는 국정조사의 결과에 따라 국정원을 비롯한 각종 정보기구, 더 나아가 경찰과 검찰 같은 권력기구의 개혁을 추진하는 데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각 권력적 국가기관이 본연의 임무를 다하지 못한 것은 무엇보다도 법적 통제의 흠결 때문이므로 대대적인 법적 개혁을 통해 이를 풀어내야 한다. 그것은 국민과 헌법이 부여한 국회의 권한이자 책무이다. 국정원 같은 비밀정보기관은 그 임무의 속성상 인권 또는 민주주의와 친할 수 없는 국가기관이다. 따라서 이러한 기관에는 국가안전보장과 민주주의 수호라는 대체 불가능한 가치들이 상충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엄격하고 명확한 법적 기준에 따른 권한과 업무만을 주어야 한다.
작금의 국정원의 행태를 보면서 국민들은 과거 중앙정보부와 안전기획부의 반인권적․반민주적 행태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국민들은 과거 26년간 민주화의 성과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국정원의 철저한 개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의견 표명 또한 민주화를 위해 엄청난 희생을 감수한 한국 현대사의 곡절에도 불구하고, 정착된 줄 알았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위협받는 현 상황에 대해 경종을 울리기 위함이며, 민주주의가 더 이상 유린되어서는 안 된다는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며, 국정 운영자들의 공정한 일 처리, 법치의 실현을 염원하는 목소리이다.
대통령과 국회는 이러한 시국의 엄중함에 상응하는 명확한 개혁의 길을 제시해야 한다. 만약 의혹을 낱낱이 밝히고 법규 위반자를 처벌하고 국정원을 정상화시키는 개혁을 단행하기는커녕 국정원의 국헌문란행위를 은폐하려 한다면, 대통령과 국회 또한 자유민주주의를 위험에 빠뜨려 국기문란에 동조하려 한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이제라도 우리의 우려를 이렇게 표하는 까닭은 대통령과 국회의 적정한 조치가 지체될 경우 1919년 3․1운동, 1960년 4․19혁명,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월항쟁의 뒤를 잇는 국민의 엄중한 심판이 있을 것임을 경고하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