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여러 상황 속에서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중, 정이의 목소리는 날 현실세계로 끌어내렸다. 쩡이의 입에 붙었던 오빠가 선배로 돌아왔다. 목이 타서 침을 삼키자 유난히 꿀꺽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똑바로 마주보기가 민망해서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조심스레 물었다.
"응 쩡아.. 아 미안 귀찮게 두 번이나.. 그거 네가 챙겼구나. 근데 그 안에.."
"네 선배."
"그 ..그 선물 혹시 뜯어봤니?"
말을 끝내고 눈치를 살피려 슬쩍 얼굴을 바라보니 가로등에 비친 얼굴이 미묘하게 읽기 힘든 표정이었다. 쩡이는 한 번에 말을 끝맺지 못하고 말을 어물거리는 내게 생각보다 순순히 대답해주며 되물었다.
"이거 선물이에요?"
"어? 아니 그러니까 선물이 아니고. 아니 선물은 선물인데 선물이 아냐."
"..무슨 소릴 하시는 거에요?"
나는 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말을 정리하려 애썼다. "그거 그러니까 너 줄게 아니고.."
쩡이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금세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쵸?! 아 진짜 깜짝이야. 전 저한테 주는 줄 알고 뜯었다가 깜짝 놀랐잖아요!! 엄마 아빠 앞에서 뜯었으면 어쩔뻔했어요 진짜!!!"
"어? 어....그 그러게 미안하다 야;"
"진짜 다행이다. 전 솔직히 설마 설마 했어요. 선배가 그럴 사람이 아닌걸 알지만 너무 당황스러워서... 미안해요 겉 포장을 제가 뜯었네.. 그래도 내용물은 다시 티 안 나게 잘 접어 놨어요."
갑자기 머리가 띵해온다. 나는 그 내용물이 정확히 뭔지 모르겠지만, 그게 내 상상 이상의 속옷인건 분명하다. 형은 그런 사람이니까. 쩡이가 건네주는 까만 봉지를 받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쩡이는 그제서야 킥킥 웃으며 날 놀리기 시작했다.
"선배 근데 진짜 대단하시네요.. 여친이 있는 줄 몰랐는데 심지어 그런 선물까지.."
"엥? 그게 무슨..."
"고등학생인데 여자친구한테 그런 선물을 하시다니 진짜 장난 아니네요 그런거 고르면서 눈치 안보였어요? 보기만 해도 진짜 민망하던데 킥킥.. 선배 생각보다 엄청 야한 사람이네요~~~~에비~~~~~"
"야 아냐 무슨 소리야 나 여친 없어!!!!"
상황은 정리되는 듯 하다가 도리어 더 복잡해져갔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요 쩡이양반 내가 커플이라니.. 내가 커플이라니.. 나는 아니라며, 이 속옷은 형이 여자친구를 선물해주려고 맡겨둔걸 내가 들려서 받아뒀을 뿐이라고 극구 변명을 하였다. 변명이 아닌 사실이었지만, 쩡이는 '여자친구 있는 게 부끄러워요?'라며 그러면 안 된다고 내게 '사랑'에 대해 짤막한 강의를 하였다. 그럼에도 끝까지 아니라고 말하자 '오빠 그렇게 안 봤는데 여자친구분이 지금 이러는 거 알면 엄청 슬퍼할 거에요. 같은 여자로써 쫌 실망이다.. 왜 당당하질 못해요?' 라는 말까지 나왔다. 미치고 환장할 것 같았다. 얼굴을 감싸 쥔 내게 쩡이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한마디를 뒤로 하고 집에 들어간다며 휙 돌아가 버렸다.
"오빠! 소문은 안 낼게요~ 그래도 청소년답게 건전하게~~~~꺄하하하하. 연습할 때 봐요~~~"
당시에 나는 음주나 흡연을 모르는 고교생이었는데, 만약 지금이었다면 그날 깡소주가 혈액이 될 때까지 부었을 것 같다. 멘붕상태인 머릿속을 정리하기를 포기한 채, 축 쳐진 어깨로 포장이 벗겨진 속옷상자가 담긴 까만 봉다리를 들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갔다. 집이 이렇게 멀었었나..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괜시리 형이 원망스러웠다. 핸드폰을 열어보니 쩡이에게 한 통의 문자가 와 있었다. "오빠, 근데 오빠 애인 연상이죠? 그거 학생이 입을만한 건 아닌거 같던데 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 ....답장을 차마 할 수 없었다. 애인이 있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았을 텐데. 차라리 너한테 줄 선물이라고 했으면 뺨이라도 맞으며 차이기라도 했지 이게 뭐야. 차이기 전에 차인 느낌이야.
그렇게 풍랑이 휘몰아치던 하루를 보내고, 나는 그 주와 그 다음주 연습을 모두 가지 않았다. 특별히 이유가 명확하게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기운이 빠졌다. 쩡이에게 내가 '애인'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도 싫었고 그런 모습을 보이고 난 뒤 쩡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까다로웠다. 모든게 귀찮고 맞닥뜨리기 싫어졌다. 그건 일종의 방어기제처럼 여겨졌다. 그 사이 쩡이는 서너번 내게 문자를 보냈다. 왜 연습을 오지 않느냐고. 그냥 시간이 없다거나, 피곤하다거나, 몸이 안 좋다는 식으로 적당히 넘겼다. 베이스를 치는 친구는 종종 우리 반에 찾아와 벌써 차였냐며 놀려대었고, 난 고등학교에 와서 처음으로 어릴 때 도장에서 배운 이단옆차기를 사람에게 날렸다. 바닥으로 풀썩 하고 날아간 그 놈은, "여자한테 차인 분노를 왜 나한테 풀어 병신아!" 라고 외치고는 "까였다고 왜 말을 못하냐!!" 를 외치며 쫄래쫄래 도망갔다. 이가 뿌드득 갈렸지만, 마음이 지칠대로 지쳐서 쫒아 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어떻게 하기도 전에 차여버린'거나 다름없었으니까.
이대로 조용히 청춘은 끝나는가 했지만 아직 풍랑은 멈추지 않았다. 우리는 주로 방과후 도서관에 모여 이야기를 했었는데,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년에 다들 고교 3학년이 되었기에, 이번 공연을 좀 크게 하자는 건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브 보컬인 나는 보통 공연에는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애들의 이야기를 반쯤 빈둥빈둥 흘려 듣고 있었다. 그 때, 메인 보컬의 친구가 별 일 아니라는 듯 내게 '툭'하고 말했다. '야 너 이번에 공연 같이 뛰어야 되.'
갑자기 공연을 뛰라는 이야기에 나는 다짜고짜 퇴짜를 놓았다. 싫어, 해, 니가 하는데 내가 뭐하러 해, 이번엔 공연 길게 할거야 한 시간 반 넘게 나 혼자 그걸 어떻게 다해. 야 우리 수준에 어떻게 그 많은 곡들을 소화하냐 말이 되는 소릴 해 그리고 공연장이랑 시설은 어쩔 건데. 공연장도 큰 데서 할거야 중고등학교 친구에 친구들 다 불러다 놓고. 그리고 두 달이나 남았잖아 너랑 나랑 나누면 되. 예전에 하던 곡들도 넣고 하면 이번에 새로 연습할 곡 많지 않아. 그리고 니가 요새 연습 안 나와서 그렇지 애들 이제 작년만큼 허접 하지 않아. 아 몰라 나 연습 요새 안 나가는거 알잖아. 너 진짜 공연 한번 안 해도 만족스럽냐? 왜 그래. 같이 하자. 너도 우리 멤버야.
너도 우리 멤버야. 하는 건조한 한 마디에 말문이 탁 막혔다. 그 때만큼은 장난기 많은 베이스도 아무 말이 없었다. 솔직히 나는 무지 공연이 하고 싶었다. 처음에야 비교 당하는 게 싫었지만 지금은 나름 실력도 붙은데다가, 이왕 고교생활의 많은 시간을 이 친구들과 함께했는데 무언가라도 함께 남기고 싶은 건 당연했다. 나는 스스로의 쪼잔함이 정말 싫어졌다. 문제는 다른 게 아니었다. 쩡이. 쩡이가 걸렸다.
"아 그러니까.."
"오빠!"
결국 스스로의 밴댕이 같은 마음을 이기지 못한 채 공연은 싫다고 하려고 말하려던 찰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쩡이다. 아 맞다, 도서관은 여고도 같이 쓰는 장소였지. 쩡이는 멤버들에게 꾸벅 인사를 하더니 날 붙들고 잠깐 나와보라며 끌어내었다. 오랜만에 마주치자마자 있는 힘껏 팔을 쥐고 끌어내는 바람에 나는 이렇다 할 말도 못한 채 일방적으로 끌려나갔다.
"오빠 뭐에요? 왜 계속 연습 안 나와요?"
도서관 밖으로 날 끌고 나온 쩡이는 굉장히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며 말했다.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급격히 다가온 쩡이에게 슬쩍 멀어지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다행히 생각한 대로 변명을 할 수 있었다.
"어? 아 뭐..나는 서브고 굳이 연습 꼬박꼬박 안 해도 되는 거잖아."
쩡이는 그 순간,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을 앙다물고 날 째려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오빠 그럼 진짜 공연같이 안 해요?" 라고 물었다. 그 눈빛이 너무 진지해서, 차마 쉽게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스스로에게 어지간히도 솔직하지 못한 자신에, 쥐구멍이라도 찾아가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결국 쩡이의 눈은 마주치지 못한 채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쩡이는 그런 나에게 화가 난 목소리도, 차가운 목소리도 아닌 처음 듣는 안타까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조용히 말을 건넸다.
"..내가 하자고 했어요. 오빠도 같이. 난 오빠도 충분히 무대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같이 하고 싶어요. 같이 해요.."
말문이 막힌 채 머리 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말을 뒤적거렸다. 싫어. 좋아. 그래. 아냐. 대체 뭐가 걸리는지 나는 쉽게 말을 내뱉지 못했다. 쩡이는 답답하다는 듯 한 걸음 더 내게 다가와 빠르게 말하기 시작했다.
"오빠 설마 그때 그것 때문에 내가 불편해요? 왜 그래요? 나 그거 아무렇지도 않아요. 오빠가 나쁜 짓 한것도 아니고."
"그게 아니라..."
"아님 뭐에요 그 때 이후로 갑자기 그러잖아요. 연습도 안 나오고 뒷풀이도 안 오고 문자도 안하고."
"오빠 공연 안 하면, 나 다시는 오빠 안 봐요. 나만 나쁜 애 되는 거 같고, 솔직히 기분 나빠질 거 같아요. 난 오빠랑 같이 공연하고 싶고, 같은 동료라고 생각해요. 그냥 단순한 선후배가 아니라요."
점점 빨라지는 말에 여전히 쩡이의 눈을 차마 마주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키자, 어느새 나온 밴드 친구들이 어깨를 탁 치며 말했다. "뭘 그렇게 비싸게 굴어!" 나는 그제서야, 머리 속에서 고집스레 쥐고 있던 '체면'과 같은 쓸데 없는 것이 꽁꽁 싼 내 마음을 작게나마 마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쩡이를 만난 이후 가장 편하게 웃으며 말했다. "야, 너네 내 노래에 맞추려면 고생 좀 할꺼다." 비록 쩡이의 말은 나와 쩡이와의 관계가 너무나 먼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 마음이 욱신거렸지만, 그 때만큼은 그런 것과 상관없이 뿌듯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친구들이 너무나 고마웠다. 울컥하고 목이 시큰거리는게 기쁨의 눈물이 흐를 것 같았지만 겨우 참았다. 아마 그 때 눈물을 보였다면 두고두고 놀림감이 되었으리라.
우리는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맹연습에 들어갔다. 나는 공연의 후반부 약 삼십분과 마무리 듀엣, 3인공연을 맡았다. 연습해야 할 6개의 곡은 익숙한 노래들이었는데, 그럼에도 막상 공연을 하면 가사를 까먹거나 호흡을 놓칠까 두려웠다. 혼자 노래방까지 다니며 죽어라 연습을 했다. 기말고사가 지나고 방학이 끝날 때까지 남은 약 한달 동안, 우린 매일같이 모여 연습실을 들락거렸다. 매번 합주실 빌리는 비용을 부담할 수 있을까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메인 보컬의 아는 음악선배가 겨울에 지방에 내려가는 사이 자기들 합주실을 쓰라고 하였다. 관리비만 내면 된다는 말에 우리는 조금씩 돈을 모아 연습비를 충당할 수 있었다. 공연까지 수많은 난관이 기다렸지만, 돈이라는 큰 문제를 쉽게 해결했기에 더욱 연습에 힘이 붙었다.
겨울방학은 12월 19일에 시작했다. 우리는 방학을 하자마자 매일같이 연습실에 모였는데 그것은 크리스마스에도 마찬가지였다.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던 공연까지의 문제들 중에는 포함되어있지 않던 누구도 예상치 못한 커다란 문제를 맞이하게 되었다. 크리스마스, 길거리에는 커플들을 위한 캐롤이 울려 퍼지고 너도 나도 사랑을 외치며 가장 많은 아이가 잉태된다는 그 날.기타를 치던 친구는 정말 뜬금없게도, 연습실에서 쩡이에게 '널 좋아해' 라며 고백을 했다. 그건,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고 그 누구도 수습할 새가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그 건조한 고백이 차라리 거짓이길 바랬지만, 그건 엄연히 벌어진 현실이었다.
사태가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단 둘이 이야기하게 해 주자며, 나는 먼저 아이들을 데리고 잠시 연습실 밖으로 나왔다. 왜 내가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이 해도 될 일을 굳이 내가 자처했다. 들키지 않기 위해 지은 환한 웃음으로, 장난꾸러기처럼 연습실 밖으로 나왔다. 겨울 밤, 찬 바람이 맨 살에 부딪히는 추위도 타는 속을 달래주지는 못했다. 친구들은 차인다, 차이지 않는다 따위의 이야기를 하며 키득거렸지만 난 그저 웃기만 했다. 입을 열었다가는 쓸데없는 말들이 나올 것 같았다. 풀어야 할 곳을 모른 채 마음속에 화가 둥둥 떠다녔다. 하얗게 피어나는 입김들을 보며 빌었다. 차여라. 차여라. 졸렬한 스스로의 기도가 통하길 빌었다.
생각보다 일은 빠르게 해결되었다. 기타를 메고 나온 친구는 다른 아이들이 어떻게 됐냐며 떠드는 호들갑에, 다음 연습에 보자며 쿨하게 돌아갔다. 평소에도 과묵하고 쿨한 녀석이었는데, 이럴 때 마저 변함이 없었다. 그래도 내심 그 뒷모습에서 왠지 '좋게는 안 끝났다'라는 기대를 갖게 했다. 연습실에 내려가서 각자 짐을 챙기며, 다들 쩡이에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하려 애썼는데 역시나 베이스는 아주 자유롭게 '야 정아 뭐라고 했어? 사귀는거야 이제? 받아줬어? 뭐야 야 얘기해주라~~' 하며 정이 주변을 맴돌면서 귀찮게 굴었다. 나는 마이크 선을 정리하면서도 청각에 온 정신을 다 집중했다. 덕분에 허공에서 마이크 선을 몇 번을 감고 풀었는지 모르겠다. 쩡이는 웃는 듯 마는 듯 그런 건 물어보는 게 아니라며 나중 되면 다 알게 될 거라고 했다. 그 순간 덜컹 하고 아랫배가 꺼진 기분이었다. 대체 어느 쪽이니?
연습실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쩡이와 나는 같은 방향이라 함께 귀가하기로 했다. 그러나 우리의 대화는 묘하게 그 화제만을 에둘러 피했다. 대신에 공연의 레파토리 라거나, 곡 순서. 노래할 때 어려운 부분들 같은 이야기만 돌고 돌았다. 솔직히 그 때만큼 베이스의 천진난만함에 가까운 재주가 부러운 적이 없었다. 나도 그런 뻔뻔함이 필요했다. 티도, 악의도 없이 거리감을 휙휙 좁혀가는 능력은 내가 갖고 있지 못한 것이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차마 쩡이에게 묻지 못하고 차창 너머로 휙휙 지나가는 풍경들에게 대신 물었다. 너도 걔가 좋니? 나는 네가 좋다. 너는 날 어떻게 생각하니? 그 말을 들은 넌 날 어떤 표정으로 바라보려나. 답이 정해지지 않은 물음들이 허공을 맴돌았다. 입으로 하는 말이 머리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은 채로 우리는 내일을 기약했다. 연습은 우리의 소용돌이치는 감정과는 상관없이 지속되는 계획된 스케쥴 이었고 그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