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연재] 奇談 - 여섯번째 기이한 이야기 : 처녀귀신 (3)-完
게시물ID : panic_6274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글곰
추천 : 20
조회수 : 1773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4/01/13 09:15:26
  여자는 방 한쪽 구석에서 반투명한 모습으로 스르륵 나타났다. 예상하고 있었던 해원은 딱히 놀라지 않았지만, 희민은 당황해하며 양손을 펴서 휘둘렀다.

  “뭐, 뭐야. 이렇게 갑자기 나오면......”

  “아 시끄러워 좀. 그냥 입 다물고 있어.”

  여자가 짜증난다는 듯 쏘아붙이자 뜻밖에도 희민이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여자는 해원과 비슷하거나 조금 어린 나이로 보였다. 조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몸에 딱 달라붙는 민소매 셔츠에다 무릎 위로 한참 올라가는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었는데 스스로 몸매에는 자신이 있어 보였고 실재로도 그랬다. 얼굴은 미인상에 다소 날카로운 생김새인 데다 색기가 살짝 흘렀지만, 크고 둥근 눈이 인상을 나쁘지 않게 해 주고 있었다. 키는 늘씬하니 큰 편이었다. 그녀는 희민을 한 번 째려보더니 해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희민이가 뭐 나를 쫓아낼 사람을 데려오겠다고 기세가 등등하더니, 그게 그쪽인가 보죠? 웬 꼬마랑 같이 온 모양이네요.”

  “누가 꼬마예요?”

  해원이 말릴 틈도 없이 바리가 순식간에 몸을 드러냈다. 희민이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면서 해원은 한숨을 쉬었다.

  “하아. 바리야.”

  “아차차. 미안해요. 그만......”

  바리는 한 손으로 입을 막은 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해원을 보았다. 해원은 픽 웃어버렸다.  

  “뭐, 이미 나왔으니 어쩔 수 없지.”

  해원은 바리의 머리 근처를 쓰다듬으며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쫓아내거나 하려는 건 아닙니다. 그럴 능력도 없고요. 통성명부터 하실까요? 저는 이해원입니다. 이쪽은 석바리.”

  “난 성아예요. 김성아.”

  여자가 애교스럽게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해원은 의자에 앉은 채 허리를 폈다.

  “애초에 잡귀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돌아가신 지 그렇게 오래 되진 않은 것 같은데요?”

  “뭐, 이제 서너 달 되었나...... 교통사고였어요. 술 먹고 무단횡단하다가 그만.”

  “저런. 사고였군요.”

  성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무단횡단을 한 내 잘못도 있으니까요. 그날은 너무 마셔서 필름이 완전히 끊겼거든요. 그래도 아직 서른도 안 된 나이에 벌써 저 세상으로 가려니 아무래도 억울해서 그냥저냥 이승에 남아 있는 거예요.”

  거침없는 말투로 자신의 죽음을 마치 남의 일처럼 이야기하는 성아였다.

  “어쩌다 희민 씨와 만나게 되신 겁니까?”

  “뭐,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 보니 남자 기숙사라는 데가 궁금하더라고요. 생전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니까 죽어서라도 한 번 가 보자는 그런 기분이었어요. 그런데 막상 와 보니 원, 기대했던 잘 빠진 남자는 없고 대신 통통한 꼬맹이 하나가 야동에 빠져 가지고 헤벌레하고 있더라고요. 한 번 놀려줄까 싶어서 귓가에 대고 한 번 하악거려 줬더니 아주 그냥 깜짝 놀라서는...... 하도 귀여워서 밤에 한 번 서비스를 해 준 거예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하는데 그런 거 백 번 보는 것보다 한 번 해 보는 게 더 좋지 않겠어요? 얼마나 좋아하던지. 게다가 숫총각이더라고요? 히히히.”

  지나치게 노골적인 이야기가 나오니 아무래도 해원은 바리가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저어, 너무 노골적인 이야기는 피차 민망하니 넘어가도록 하시지요.”

  하지만 성아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응? 저는 별로 안 민망한데요.”

  키득거리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해원은 어이가 없었다. 이런 희한한 영을 만난 건 난생 처음이었다. 바리도 뭐라 할 말을 잃은 모습이었다. 언뜻 보았지만 얼굴이 살짝 달아오른 듯도 했다. 다시 정신줄을 잡은 해원이 물었다.

  “확인차 여쭤보겠습니다만, 계속 강제로 관계를 가진 건 아니죠?”

  “말도 안 돼요! 물론 맨 처음에야 꼼짝 못 하게 해 놓고 제가 덮친 셈이니까 그건 인정해요. 하지만 그 이후로는 저 꼬맹이가 자꾸 덤벼들었다고요.”

  여자는 희민을 흘겨보았다.

  “자기 입으로 평소 운동을 해서 체력에는 자신이 있다고 하더니 원. 두 달 만에 저 꼴이지 뭐예요. 그런데 저 상태가 되어서도 당최 쉴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그래 놓고는 갑자기 무슨, 내가 자기 정기를 빨아먹는 게 아니냐면서 의심하는데 허 참. 저도 열이 뻗쳐서 그래 어디 맘대로 생각해라 그랬더니 지 혼자 화를 내면서 자기를 속였다고 난리를 치더라고요.”

  희민은 유구무언이었다. 해원은 기가 찼다.

  “겨우 두 달 동안 어떻게 삼백 몇십 번이나 관계를 가질 수 있었던 겁니까?”

  “삼백이십여섯 번이에요. 수업도 안 가고 그냥 온종일 방에만 있더라고요. 그러다 같이 사는 사람들이 다 나가기만 하면 보채는 거예요. 뭐 잘 아시겠지만 나는 아무래도 햇빛이 있으면 움직이기가 곤란하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이야기했더니 허, 어디 가서 엄청 두툼한 커튼을 사 오더니 자기 손으로 달아버리잖아요. 그러고는 이제 햇빛이 안 들어오니 상관없지 않느냐고 하대요. 그 정성이 어찌 보면 가상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한심하기도 하고.”

  “......수업을 못 들은 게 몸이 안 좋아서가 아니라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였나요?”

  “어디 몸이 처음부터 안 좋았겠어요? 첫날 이후로 수업이고 뭐고 재껴 놓고 계속 방에만 있었어요. 남들 수업 들어가기만 기다리고 있는 거죠. 밤에야 다른 사람들이 다 같이 있으니 그걸 못 하지만, 낮에는 사람만 없으면 일단 커튼부터 치고 보드라니까요.”

  해원은 하도 한심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희민은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고 아예 머리를 아래로 처박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 뒤통수를 한 대 후려치려다가, 그래도 의뢰인이라는 생각에 해원은 간신히 참으며 다시 성아를 보았다.

  “그런데 계속 희민 씨가 달려들었다면 왜 계속 승낙하신 겁니까? 거절하기가 어렵진 않았을 텐데요.”

  처음으로 성아의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잠시 주저하더니 고개를 들지 않고 발끝을 내려다보며 더듬거리듯 말했다.

  “아니 뭐 못해줄 것도 없으니까요. 우리가 뭐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하지만 곧 그녀의 말투가 다시 빠르게 바뀌었다.

  “흥, 하지만 이제 그것도 끝이네요.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나를 쫓아내려고 사람까지 데려왔으니 말이에요. 애초에 내가 쓸데없는 짓을 한 거죠 뭐. 저런 꼬맹이한테.”

  성아의 말을 듣던 해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 성아의 말투에 왠지 서운함 같은 게 묻어났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새삼스레 바리의 이야기도 생각났다.

  ‘삐친 거예요.’

  그게 그렇게 된 건가...... 해원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간신히 웃음을 참은 그가 다시 무어라 입을 열려는 순간, 갑자기 바리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오호라. 쟤를 좋아하나 봐요? 나이가 한참 차이날 것 같은데.”

  바리가 놀리는 투로 말했다. 성아가 발끈했다.

  “야! 쪼그만 게 무슨......”

  바리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뭐? 누가 쪼그만데?”

  “여기 쪼그만 게 또 누가 있는데? 보아하니 아직 고등학생밖에 안 되어......”

  “야! 너 몇 년도 생이야! 어?”

  바리가 허리에 손을 얹고 서슬 푸르게 고함쳤다. 하아. 해원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한숨을 내쉬었다. 미치겠다는 한탄이 절로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언뜻 희민을 보니 목청 높여 싸우고 있는 두 여자 사이에서 허둥대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해원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희민 씨. 아직 정리가 안 된 게 하나 있습니다만.”

  “예?”

  희민이 지옥에서 부처라도 만난 듯 해원을 쳐다보았다. 부끄러워서인지 아니면 피가 몰려서인지, 얼굴이 완전히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의뢰전화를 받았을 때 조금 희한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의뢰전화가 오면 보통 이렇게들 말씀하십니다. ‘귀신을 쫓아내 달라’거나 ‘귀신을 퇴치해 달라’, ‘없애 달라’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희민 씨는 그냥 ‘어떻게 해 달라’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다시 한 번 물어봤지만 그저 ‘어떻게든 해 달라’고만 하셨죠. 그렇지요?”

  “아, 예......”

  희민이 말꼬리를 길게 끌며 해원의 눈치를 보았다. 해원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대강 상황은 파악되신 것 같은데, 그럼 이제 ‘어떻게’ 해 주길 바라십니까?”

  희민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한참을 망설이고만 있었다. 해원은 그런 그를 기다려 주었다. 잠시 후, 희민이 쥐꼬리처럼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냥 아무것도 안 하셔도......”

  “의뢰는 다 해결되신 겁니까?”

  해원이 추궁하듯 묻자 희민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해원은 한숨을 쉬며 명함을 꺼내 펜으로 두어 줄 휘갈겨 희민에게 건내 주었다.

  “제 계좌입니다. 의뢰는 완수되었으니 입금해주시면 됩니다.”

  희민은 멍한 표정으로 명함을 받아들었다. 해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세 싸움이 끝났는지 바리는 말없이 씩씩거리고만 있었다.

  “가자, 바리야. 의뢰 끝났어.”

  “얼레. 그냥 가는 거예요?”

  신기하다는 듯 물어보는 쪽은 성아였다.

  “예. 이제 나머지는 두 분이 다시 잘 말씀을 나눠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해원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후 문을 열어젖히고 나섰다. 바리가 급하게 해원을 따라왔다. 나가는 길에도 경비원은 역시 머리를 주억거리며 졸고만 있었다. 밤길은 어두웠지만 드문드문 가로등이 켜져 있어서 걷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래서, 누가 언니였는데?”

  바리는 침묵하다 한참 후에야 간신히 대답했다.

  “나보다 일 년, 아니, 일곱 달 먼저 태어났더라고요.”

  “저런.”

  해원은 웃음을 참으려 애썼다. 바리는 뾰로통하니 말했다.  

  “하지만 이쪽 세상으로 치면 내가 선배예요. 한 십 년은 차이나잖아요?”

  “군대도 아닌데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한가.”

  “중요해욧!”

  “아, 알았어. 그래. 그런 것도 중요하지.”

  해원이 동의하자 바리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해원도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둘은 조용히 오솔길을 걸어갔다. 한참을 걸어 큰길이 나올 때쯤, 바리가 다소 주저하며 말했다.

  “근데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응? 뭔데?”

  “아까 말한 거 있잖아요.”

  “어떤 거 말이야?”

  “그러니까 그, 영적인 존재랑 사람이 같이 있으면 안 좋다는 거......”

  “난 또 뭐라고.”

  해원은 씩 웃었다.

  “신경 쓸 필요 없어. 별로 큰 영향이 있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그래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날 봐. 팔팔하잖아?”

  해원은 자신의 가슴을 툭툭 쳐 보았다. 바리가 픽 웃는 기색이 느껴졌다. 아마 안심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원은 생각했다. 일단은 그걸로 충분했다.

  잠시 후 다시 그녀가 물었다.

  “그리고 또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오늘은 궁금한 게 많네. 어떤 거?”

  “그거, 하면 그렇게 좋은 거예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는 데 대략 사오 초가 필요했다. 그리고 해원은 당황해하며 고함치듯 외쳤다.

  “몰라! 아니, 그것보다 왜 그걸 나한테 물어봐?”

  “그럼 누구한테 물어봐요? 엄마한테 물어볼 순 없잖아요.”

  “모른다니까! 나중에 다른 사람한테 물어봐!”

  “그러니까 누구한테요?”  

  “몰라! 아무튼 난 몰라!”



  며칠이 흘렀다. 통장을 확인해본 해원은 처음에 이야기했던 의뢰 금액보다 더 많이 입금되어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무슨 대학생이 돈이 있겠느냐고 애초부터 별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능력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기야, 나름 명문대에 다니고 있으니 과외라도 하나 보지?”

  “아직 학생인데 돈 잘 버나 봐요. 우리보다 더 잘 버는 거 아닌지 몰라요.”

  “......뭐, 그럴 지도.”

  해원은 못마땅하게 말했다. 그 때 해원의 전화기가 울렸다. 귀신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다름 아닌 희민이었다. 해원이 전화를 받자 뜻밖에도 활기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쩌렁쩌렁하니 울려서 귀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형님! 접니다! 예전에 뵈었던 희민이요! 여보세요?”

  전화번호를 다시 확인한 해원이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  

  “......누가 희민 씨 형님입니까?”

  “아 형님 왜 그러세요. 그 때 하도 정신이 없어서 감사하단 말씀도 제대로 못 드리고 해서요. 잘 지내시죠?”

  “......예. 잘 지냅니다만.”

  해원이 떨떠름하게 대답했지만 희민의 목소리는 여전히 활기찼다. 그 때의 희민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때 형님 덕분에 일이 잘 해결되었네요. 누나한테 제가 너무 애처럼 굴었던 것 같아서 미안하다고 했고요. 그리고 하핫, 이거 참 민망하지만 좀 자제하기로 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만성피로였던 것 같아요. 횟수를 줄이니 확실히 몸이 거뜬하네요!”

  본인 스스로 민망하다면서 전혀 민망함을 느끼지 못하는 듯 거침없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곤혹스러운 기분이었다. 그래서 해원은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아무튼 그래서 말인데요, 형님 저희랑 식사 한 번 같이 하시죠! 제가 신세진 것도 있고 하니 대접하겠습니다. 아, 물론 밤에 만나 뵈어야죠! 사람 별로 안 오는 어둑한 곳이 있는데 딱입니다. 누나도 거기가 좋다고 하더라고요. 아마 그 때 그 누구냐...... 바리 씨? 아무튼 그분도 좋아하실 거예요. 이런 일을 괜히 미룰 필요도 없고 당장 오늘 밤 어떠세요? 괜찮으시죠?”

  옆에서 같이 전화를 듣고 있던 바리가 눈을 빛냈다. 해원은 이마를 짚었다. 갑자기 두통이 몰려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끝-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