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오유 여러분 안녕?
난 얼마 전 장준하 선생의 자서전 <돌베개>를 읽고 멘붕한 1人이야.
난 장준하 선생을 나꼼수를 통해 처음 알았어.
하지만 그의 의문사는… 친일잔당들의 악행 중 일부일 뿐인… 이거 참 비유가 좀 이상하긴 한데
수많은 뷔페 메뉴 중 하나쯤 처럼말이야. 내 머릿속에 장준하선생의 자리의 크기는 딱 그만큼이었지.
그나마도 나꼼수만 반짝 듣고 잊어버려서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작년에 선생의 의문사를 다뤘다는 사실조차도 얼마 전에야 알았어.
장준하하면 떠오르는 것은 아래의 두개골 사진뿐이었지.
그가 누구였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하나도 모른채.
그저 장준하 하면 떠오르는 것은 그놈의 <의문사>라는 단어와 예의 그 머리뼈 사진뿐.
어떤 사람이길래 시청에서 장례를 여는지 궁금했어.
시사에 관심있는 오유인들이라면 돌베개라는 단어가 익숙할거야.
양질의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펴내는 <돌베개>출판사를 알고 있을거야.
아래 책들, 어디서 많이 봤지? ^^
특히나 유시민 오빠야를 사랑하는 내게, 돌베개 출판사는 잊지 못하는이름이지.
<쉽게읽는 돌베개>의 표지를보니,
“어….? 그 돌베개가 이 돌베개인가….?” 하는생각이 스치더라고.
맞아. 그 돌베개가 이 돌베개야.
돌베개 출판사는 이해찬 옹이 세운 출판사인데 (지금은 대표자리에서 물러난 것 같아)
소싯적에 완전 감명 깊게 읽은 책 1위가 장준하 선생의 자서전 <돌베개>였던 거지.
그래서 그가 세운 출판사 이름도 <돌베개>라는거. ^^
근데 이 책이 겉표지가 심하게 구김이 가있는 게, 파본인거야.
누군가 이 책을 일부러 찾아 왔더라도, 불량이면 안살거 아냐.
그리고 반품될 테고.
난 대형서점에서 책 보고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사람이지만 -.-
괜히 오기가 생기더라고. 그리고 몇 장 읽어봤는데 어라? 재미있는거야.
그래서 정가를 모두 치르고 구입했지. 집에 오면서 읽었는데….헐….
흡입력, 긴장감, 스토리모두 쩔어!!!
웬만한 영화 뺨친다. 진짜.
그런데 읽고 난 후 보니, 본문을 상당히 축약한 청소년용 버전이었더라고.
오리지날을 안 읽을 수가 없어.
오유 여러분들도 그냥 처음부터 오리지날로 봐.
그리고 오리지날이 훨씬 더 탄탄하고 재미있어. ^^
오리지날 돌베개엔 청소년버전에는 없는 <19금 에피소드>도 있다네. ㅋㅋㅋㅋㅋ
21세기를 살고 있는 젊은 내가 보기에도 뜨아아아아!!!!!!!!한…..ㅋㅋㅋ +ㅁ+
역시 젊은이들이란.....ㅎㄷㄷㄷㄷ
조금 두꺼운 책이긴 하지만, 장준하 선생님의 쩌는 필력과 스토리 자체가주는 긴장감과 스릴덕분에 한장한장 빠져들면서 넘기게 돼.
그리고 장준하 선생의 문학적이고 시적인 세련된 묘사와 표현들도 이 책이 주는 또 다른 묘미지. ^ㅁ^ 아아. 오라버니 완전 멋지심.
손에 땀을 쥐게 하다가도 영락없는 젊은 청년인 장준하의 모습에 피식피식 웃다가,또 울다가, 말랑말랑 했다가 또 스릴러로 급전개….
롤러코스터를 탄건지 책을 읽은건지. 정말 백문이 불여일견. 강추 강추 또 강추.
사실 내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은, 단 한명이라도 돌베개를 읽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해서야.
친일잔당들이 역사에서 지워버린 그를 기억하고자.
그들은 완벽하게 성공했어. 사람들에게 장준하라는 이름은 빛바래고 쪼개진해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었으니까 말이야.
당장가까운 내 친구들만 해도 장준하 선생이 누군지 아는 애가 단 한명도 없었다.
심지어 서울의 상위권 대학출신에 언론고시공부도 했었던 녀석조차도 모르더라고.
내가 돌베개를 다 읽고 난 후, 내가 느낀 감정은 <분노>였어.
왜 나는 이분을 교과서에서 볼 수 없었던 걸까????
왜 역사에서 완벽하게 버림 받은 걸까????
그리고 난 선생님께 너무나도 죄송스러웠어.
이제야 그분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도 죄송스러워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어.
정말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서, 이 글을 쓴다.
그분을…제발 기억해 줘…
25살의 젊은 청년 장준하, 그모습으로 간직해 줬으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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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캘빈클라인 바지를 입고 만다리나덕 가방을 들고 있을것 같은 상반신 사진. 안경은 폴스미슨가?>
1부 탈출
선생의 자서전 돌베개는 1944년7월 7일, 중국 서천(쉬저우)의 쓰카다 부대를 탈출하는 순간부터 시작해.
그리고 광복 후 김구선생님과 귀국하기까지의 약 2년간의 일만 다룬내용이야.
장준하 선생은 그 2년간 7권의일기를 썼다고 해. 그 일기를 보고 기억을 되짚어 돌베개를 집필한 것 같아.
그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잠깐 설명하자면, 장준하는(존칭 앞으로 생략) 일본유학중, 학도병에 자원해.
가끔씩 수꼴들이 다카키 마사오나 장준하나 자원입대 했다고, 그러니까 마사오욕 하지 말라고 썰을 푸는데, 정말 싸닥션을 날리고 싶다.^_^
당시 장준하의 부친은 기독교 목사로,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앞장서다가 일제의 감시를 받게 된 상태였지.
그리고 장준하가 동경 유학 전에 소학교에서 교사생활을 3년간 했는데, 그때 하숙집 아주머니와 매우 정이 들었어.
하숙집 아주머니의 남편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중국으로 도망친 상태였고.
그리고 그 하숙집 아주머니의 딸이 장준하의 제자이기도 했어. 장준하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도 하숙집 아주머니에게 자주 안부편지를 보냈다고 해.
글을 모르는 어머니 대신 딸이 답장을 썼지.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 편지가 오갔어.
그러던 어느 날, 장준하에게 어린 제자에게서 슬프고 충격적인 편지가왔어.
바로, 자기가 정신대 위안부로 끌려가게 될 것 같다는 내용인거야.
사정인즉슨, 그동안 하숙집 아주머니가 장준하가 내주는 하숙비로 생계를 꾸려갔는데 장준하 다음에 받을 하숙생이 없었던 거야.
물론 맘먹으면 구할 수 있긴 하지만, 딸 셋이 커가고 있었기 때문에 주위의 수군거림을 받지 않을만한 마땅한 하숙생이 없었어.
그래서 생활이 점점 어려워지고, 하숙집 아주머니의 딸은 상급학교를 그만둘 수 밖에 없었어.
그런데 학교를 그만두자마자 일제의 마수가 기다렸다는 듯 뻗친 거지.
아빠는 독립운동 하다가 쫒겨간 도망자, 엄마는 과부나 마찬가지. 가난으로 인한 학교중퇴.
든든한 보호자가 없는 젊고 예쁜 여성은 예나 지금이나 탐나는 먹이감이지. 휴…
<돌베개>에는 편지의 자세한 사항이 나와있지는 않지만, 내가 찾아본 자료를 종합하면 대략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아.
“선생님.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워져서 학교를 그만두었어요.
선생님이 등록금을 내주신 덕분에 상급학교에 진학하게 되어서 너무나도 기뻤었는데….죄송해요..
그런데 어떻하죠 선생님? 집에 일제관리들이 와서, 아빠가 일본제국에 지은 죄를 대신 속죄하는 의미로
저를 정신대로 보내래요. 정신대가 어떤 건지에 대해 소문이 파다해요…..
너무나도 무섭고 두려워요…”
장준하는 편지를 받고 나서 결심하지. 제자와 결혼한 후 학도병에 입대하기로.
아무리 악랄한 일제라도 유부녀는 끌고 가지 않았거든. 그리고 실상 학도병이라는 거 자체가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어.
자원하지 않으면 부모형제가 직장에서 쫒겨나게 된다거나, 가족과 친인척들이 세무조사를 당한다거나 하는 불이익이
수두룩빽빽 했었기 때문에 사실상 강제였지.
게다가 장준하의 부친 역시 반일 전력이 있는 인사라, 집안에 어떤 불행이 닥칠지 모르는 위태한 상황 이었던 거야.
장준하의 비서였던 故박경수님의 저서 <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에나온 편지를 받은 날의 상황을 옮겨 볼게.
장준하와 함께 교사로 있으면서 같이 하숙생활도 했던 김용묵의 증언이야.
<박경수 저, 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 中>
어스름한 저녁, 장형이 요쯔야 비탈길을 산책하자고 했다. 장형이 내게 뭔가 할말이있다는 것이다. 한참을 둘이는 침묵으로 걸었다.
오랜 침묵끝에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고국에 있는 애제자 로자(세례명/김희숙)의 신상 문제였다…….
그날 낮에 로자의 편지를 받은 것이었다…………
“나는 귀국하는대로 로자를 먼저 안정시켜놓고 일군에 가야겠네”
말귀를 알아들은 김용묵은 어안이 벙벙하여 잠시 그저 침묵을 지켰을 뿐이었다.
김용묵이 알기에 그동안 장준하를 연모하여 짝사랑하는 여자들이 많았다. ASKY 그 중 일본 야오야마 대학의 신모양, 정주의 조모양,
역시 정주 명문가의 딸 김모양 등의 얼굴이 김용묵의 망막에 어른거리며 스쳐 지나갔다. 장준하가 결혼을 한다면
그 세 여자 중 하나일줄 알았지 로자일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야오야마 학원은 내가 알기로 지금도 부유층 자제들이 엘리트 코스로 다니는 명문학교야.
유학 가기 전에 드는 학비도 학비지만, 그 당시에는 하녀와 가까운친척 아주머니가 따라가는 경우가 많았지.
게다가 그들만 쓰며 기거하는 집도 있어야겠지?
일제시대 때 딸을 일본유학 보냈을 정도면 어느 정도의 재력이었는지 대략 상상이 갈거야.
비록 장준하는 가난한 아이들이 다니는 소학교의 교사였을 뿐이었지만, 그당시에도 워낙 유명인사라서 고향인 정주에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
자세한 에피소드들이 궁금하다면 박경수옹의 저서를 보자. ㅎㅎ 진정한 인간 불도저가 뭔지 한번 봐봐.ㅋ
아무튼, 여러분 같으면 수백억대 재산가 집 자제들중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골라서 결혼할 수 있는 처지인데
가난 때문에 학교를 중퇴한 사람과 결혼할 수 있을 것 같아?
김용묵이 얼떨떨해서 한참 동안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있었던 게 무리가 아니지.
<박경수 저, 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 中>
다음날인가 그 다음날인가 장형은 귀국했다. 그가 귀국하여 폭탄선언(ㅋㅋㅋ)같이 터뜨린 이 혼사에 대한 양가의 반대,
주변 친척들의 놀라움 등으로 고향인 삭주와 정주 일대가 한동안 떠들썩 하였다는것은 뒤에 들은 이야기였다.
그러나 장준하가 일단 작심한 일을 막을 사람은 없었다. 더구나 자기몸을 던져 의를 행하는 일임에랴.
그리하여 몸을 던져 의를 행한 장준하는…..10년 연하의 신부를 맞이해.
김희숙은 스승이었던 장준하와 결혼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는지 차라리 그냥 수녀가 되겠다고 했나봐.
하지만 장준하는 “수녀가 되어 신께 봉사하는 것도 좋지만, 한집안의 며느리가 되어 시부모께 봉사하는 것 또한 의미가 있지 않겠냐”며설득하지.
오빠…아니, 선생님이 결혼하자면 하는거야~
거절하고 그러는거 아니야~♡
신랑 장준하 26세. 신부김희숙 17세.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가르친 꼬멩이와 결혼한 거야.
그 17세 소녀는….지금은 팔순이 넘은 할머니가 되었어. 그런데도 참 맑고 곱지?
어찌되었건, 수꼴들이 떠들듯이 장준하는 일본 학도병에 자원한 거 맞다.
그런데 말야, 천황폐하께 개와 말처럼 충성하겠다는 혈서를 써서 일본군사학교에 자원한 인간과
학도병 말단 병사였던 장준하 선생을 같은 취급하지는 말아줘.
신방을 차린지 10일만에 장준하는 입대하게 돼.
각오했던 일이었지만, 어린 아내를 두고 살아올지 죽어올지 모르는 곳으로떠나는 마음은 어땠을까.
장준하는아내에게 그들만의 암호를 줘.
“나는 중국으로 가서 일본군을 탈출하여 독립운동을 할거야. 임시정부를 찾아 갈려고 해. 주말마다 꼭 편지를 쓸게.
편지 끝에 성경구절이 적혀있거든, 내가 탈출한 것으로 알아.”
장준하는 평양에 있는 일본군 부대로 끌려가. 가서 추운 겨울에 맨손으로 마구간 청소일을 강요당하다가 엄지손가락에 동상이 걸려버려.
맨손으로 말똥도 치웠다니, 똥독에 더욱 덧났던게 아닌가 싶다.
동상치료를 하는데, 고름을 짜낸답시고 마취도 없이 일본인 군의관이 손가락을 난자질해서 그만 엄지손가락이 불구가 돼.
그때 장준하는 비명소리 한번 안내며 치료를 참아냈는데, 그는 평생그 엄지손가락을 훈장처럼 간직하지.
장준하의 예상대로, 평양 부대원 중 상당수가 중국파견을 가게 돼.
그런데 장준하는 손에 붕대를 감고 있어서 파견자 명단에서 제외될 뻔해. 장준하는 장교에게 애걸하며
“손은 금방 나으니까 꼭 중국으로 보내달라”고해. 간신히 허락을 맡은 장준하는 기차에 실려 쉬저우(서주)로 향하지.
쉬저우 일본군 부대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할게.
예나 지금이나 군대 짬밥은 맛이 없었나봐? 일본군인들은 부대 밖으로외출 나가서 현지 요리집에서 밥을 사먹고 들어오는 일이 잦았대.
그러다 보니 항상 배가 불러있어서 잔반이 남아 돌았지. 하지만 조선인 학도병들은 항상 형편없고 턱없이 적은양의 식사에 시달리고 있었고.
일본군인들은 그 남은 잔반을 그들에게 개먹이처럼 던져주면서 아귀다툼을 하는 조선청년들을 구경거리 삼아 낄낄거렸어.
이 모습을 본 장준하는 눈이 뒤집혔지.
<돌베개 中>
보다못해 나는 몇 친구들에게 말하여 잔반불식동맹까지 만들었다.
배고파 창자가 뒤틀리는 한이 있어도, 우리의 자존심만은 지켜야 하겠다는생각에서였다.
한때 우리나라 육군의 최고책임자였던 모 장군도 사실은 나와 같은 동료였다. 그러나 나는 그를 동료로 보기에 가슴이 아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친구는 고참병이 먹다 남은 밥을 던져주면, 숫제 두 손을 밥그릇에 넣어 먼저 밥만을 움켜쥐고 돌아서서그 더러운 밥을 먹곤 했다.
얼마나 배가 고파서 저러겠는가 해서 불쌍도 해보였지만, 그에게서 받은 한국인의 모욕감을 나는 지금도 참을 길이 없다.
장준하는 실명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박경수 옹은 저서 <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에서 그 인간이 장도영이었다고 가차없이 밝히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장도영은 다카키 마사오가 쿠테타를 일으킬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는데, 쿠테타를 눈치채고도 묵인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인물이야.
사진은 5.16 몇일후의 장도영과 다카키 마사오란다. 그러나 결국 몇 달 안되어서 토사구행 당하지. 이른바 쿠테타 바지사장.
미국으로 도망가서 작년에 플로리다에서 사망했대.
장도영이 장준하하고 충돌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어.
<돌베개 中>
한국인 학도병 탈영사고가 잦아지자, 우리들에 대한 눈초리는 사나워지고 생활은 편치 못했다.
장군이 된 그가 어느 날 우리 한인 초년병들 몇이 남아있는 내무반 안에서 칼을 뽑아들고 격한 어조로 소리를 질렀다. 그는 위협을 했다.
“…..이제 또 누가 도망치겠느냐??”
아무도 그에게 대꾸를 하지 않았다.
탈출병이 생길수록 한국인들이 받는 대우와 감시가 악화되기 때문에 아마 그 스트레스를 못 이긴 그가 이렇게 위협을한 것으로 해석을 해보았지만,
그러나 동족 앞에서 칼을 뽑아 들고 “이제또 도망가는 놈은 내가 찔러 죽일 테야!!” 라고 호통을 치는 것은
나로서는 도저히 묵인할 수 없는 한계선을 넘은 행동이었다.
장준하는 이런 동료들이 꼴보기싫어서라도 더욱더 탈출에 대한 의지를 굳히게 돼.
탈출 계획을 생각하던 장준하는탈출은 하되, 일본제국에 적의를 품고 감행한 것이 아니라 일본인 지휘관들의 학대와 열악한 병영 생활을
도저히 감당하지 못해 저지른 나약함으로 연극을 꾸미기로 하지.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조금이라도 피해가덜 돌아 가게끔… 그러다가 어느 날 좋은 기회가 찾아와.
“고노, 기다나이 한또진노야로메!!”
(이 더러운 반도놈아!)
어느 일본인 고참이 장준하가 깨끗이 씻어 취사장에 반납하려는 밥통에 트집을 잡으며 욕설을 퍼부어.
장준하는 다시 수도로 가서 씻는척하고 조용히 갖다줘.
잔반불식동맹을 주도한 것때문에 고참들에게 찍혀 있었나 봐.
그들로서는 조선 청년들이 쓰레기밥에 달라붙어 아귀다툼을 벌이는 모습이 아주 재미진 구경거리였을텐데,
장준하가 중간에 훼방을 놓았으니 벼르고 있었던 거겠지.
“어디 두고 보자. -_-++ ㅗㅗㅗ”
그날 저녁, 장준하는 내부반 반장인 우에다를 찾아가.
<돌베개 中>
그는 내무일지를 쓰느라고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고 있었다.
그가 권하는 대로 자리에 앉아 나는 미리 머릿속에 써놓고 온 대사를 심각한 표정 속에 또박또박 읋었다.
“저는 지금 탈출을 하려다 다시 마음을 돌려먹고 돌아왔습니다.”
“뭐라고????”
나는 이날 저녁에 취사장에서 당한 이야기를 낱낱이 고해바친다음, 이렇게 대사를 이어나갔다.
“…반장님. 반장님이나 내무반의 여러 고참병들은 너무나도 친절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조금도 내가 조선 사람인 것을 의식하지 못했을 뿐더러 병영 생활이 즐거웠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뜻밖의 모욕을 받으니, 충격이 컸습니다. 아아..나는 일본인이 아니야…..이런생각에 사로잡혀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나는 이곳이 싫어졌습니다. 그래서탈출을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순간 반장님에게 인간으로서의 죄를 짓는 것 같아 차마 탈출을 못하고 돌아온 것입니다…옹서해 주세요!!!”
우에다는 장준하의 두손을덥썩 잡고, 아리가토오!! 아리가토오!! 를 외치지.
다음날, 그 고참병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매를 맞은 뒤 3일간 영창행 신세가돼. ㅎㅎㅎㅎㅎ
그 사건 이후, 그 동안 발생했던 학도병 탈출사건도 어느 정도 이유 있는 해석으로 기울어지지.
그런데, 어느날 한국인 학도병들에게 같은 쉬저우 내의 쓰카다 부대로 이동하라는 지시가 내려져.
쓰카다 부대는 학도병 탈출사고가단 1건만 있는 철통보안의 부대로, 잇따르는 탈출병을 막고자내린 조치였어.
탈출자 1명 조차도 부대 안에서 탈출한 게아니고 파견지에서 도망 갔을 만큼 보안이 철저한 곳이었어. 장준하로서는 공든탑이 무너지는 순간이었지.
쓰카다 부대에서는 전투훈련을 쉴새 없이 혹독하게 시켰어. 마치 뭣을 생각하고 의논하고 모의할 시간적, 정신적 여유를 주지 않겠다는 거였지.
하지만 그럴수록 장준하는 탈출에대한 의지를 불태워. 휴식시간이면 오히려 교관옆에 다가가서 현재의 적(중국군)의 상황을 물어보며
그들의 분포현황을 캐내었지. 장준하는 같이 탈출하기로한 동료들과 동북방향 120리(47km)에 있는 중국군으로 목표지를 정해.
<돌베개 中>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끝에 로마서 9장 3절을 인용했다. 나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나는 가만히 엽서를 내 뺨에 비벼대었다……
동족을 위해 자신의 멸망을기꺼이 감내하겠다는 모세의 다짐을 인용한 거였지.
앞서 말했듯이 이 성경구절은 고향의 가족에게 자신의 탈출을 알리는 암호였어.
드디어 1944년 7월 7일.
장준하는 탈출을 실행해. 그날은 중일전쟁 7주년 기념일이었어.
아무리 전쟁 말기에 전세가 기울어져 있어도, 천황이 직접 하사하는 보급품은 호사스러웠지.
다들 술기운에 비틀거렸고, 점호마저도 생략할 정도였다니까.
장준하는 목욕을 가는 척, 탈출용으로 꾸려두었던 보따리를 대야에 담아서 막사를 나와.
9시 15분까지 철조망 밖에있는 느티나무에서 나머지 동료 3명(윤경빈,홍석훈,김영록)과 만나기로했거든.
<돌베개 中>
나는 내가 보아둔 서쪽 구석으로 몸을 굽혀 달려갔다. 누가 지금 나를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누가 지금 나를 따라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쯤 누가 주번사관에게 달려가고 있는건 아닐까. 비상이 걸리는 찰나가 아닐까…….
차디찬 철조망의 냉기가 등골까지 전달되었다.철조망은 상상보다 높았다. 왜 나는 이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따따따땅 하고 총소리가 나의 심장을 뒤에서부터 뚫어오는 듯한 착각의 그 순간,나의 몸이 훌쩍 기울어진 철조망 위로 굴렀다…..
장준하는 무사히 철조망을 넘었어. 그런데 철조망 바로 아래에 방어호가 파져있는거야.
만약 그리로 떨어졌으면 어딘가 부러져도 단단히 부러졌을거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장준하는 약속장소로 내달리지.
장준하는 선천적인 지병으로 심장이 좋지 않았어. 몇일전 훈련을 받다가 졸도하는 일까지 있었지.
제발 내 몸이 이 순간을 버텨주기를 기도하며….
느티나무 아래에는 다행히세 동료가 기다리고 있었어.
그리고 눈앞의 돌산을 기어서넘기로 해. 한 시간 동안 정신 없이 기어올랐어. 산 중턱에서겨우 한숨 돌려.
<돌베개 中>
버리고 온 병영의 불빛이 내려다보였다. 시커먼 병영의 윤곽이, 파충류 물짐승처럼 음흉하게 우리를 손짓하는듯했다. 오싹 소름이 끼쳤다.
막상 산을 내려가고 나니, 운하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지 뭐야.
헤엄에 비교적 익숙한 윤경빈(당시 25세)이 앞장서서 일행을 이끌었어.
참고로, 윤경빈 옹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사돈이야. ^^ 김홍일씨의 장인이지.
현재 살아계셔. 김구선생님의 경호실장을 지내기도 하셨대.
맥주병인 장준하는 동료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운하를 건너.
그런데 운하를 건너면서 그만 방향을 잃어버려. 헤엄에 정신이 팔려서 비스듬히 건넜나봐.
나침반을 보려고 했지만 성냥이 물에 쫄딱 젖어서 불이 켜지질 않았어.
설상가상으로 밤하늘에 구름도 잔뜩 끼여있어서 북극성을 찾기도 힘들었다고 해.
할 수 없이 가끔씩 구름사이로 보일 듯 말듯한 북극성을 참고해서 길을 달려.
어스름한 새벽이 오긴 했지만 안개가 자욱해서 방향을 짐작할 수가 없었지.
결국 날이 밝고 일행은 밭에 몸을 숨기고 잠에 골아 떨어져버려.
장준하는 뜨거운 햇살에 잠에서깨어나.
그런데, 귓가에 자동차 소리가 들리는거야!!!!
일본군들이 중국 주민들을 닥달해서 탈출병들을 찾고 있는 거였어.
다행히 중국 농민이 건성으로 찾았는지, 보고도 못 본 척 했는지 코앞에서 무사히 넘어갔어.
가슴을 쓸어내린 일행은 해가질때까지 은신해 있기로 해.
그런데 해가 중천에 떠오르면서, 지옥의 고생이 시작돼.
<돌베개 中>
타는 것은 목뿐만이 아니었다.그것은 가공할 만한 더위였다. 우리를 가려주었던 조 포기들은 차츰 말라 비틀어졌고,
살갗에 닿는 직사광선은 그대로 불덩어리였다. 온몸이 지글지글 타오르는듯했다.
우리는 군복을 벗어던지고 홀랑 알몸이 되어 조금이라도 축축한 곳을 찾아 다니며 마치 지렁이들처럼 엎드렸다 누웠다 하며 시간을 보냈다.
드디어 해가 지고, 일행은 다시 옷을 주워입고 길을 떠나.
천근같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얼마나 갔을까. 일행 중 홍석훈이 픽 쓰러져 버려.
세명이 달려들어 한참동안 몸을 흔들고 주무른 후에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어.
자신은 더 이상 못가겠으니, 너희라도 떠나라고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 하지만 그를 도저히버리고 갈수 없어서,
부축하여 질질 끌다시피 하며 다시 길을 떠났어.
장준하와 윤경빈은 근처 원두막에서 참외를 서리해 와. 그리고 홍석훈에게 먹이지.
다행히 홍석훈은 기운을 차려주었어.
그런데 일행이 기운을 차린가운데 보니, 참외가 아니고 덜익은 새끼수박이었대.
하도 배가 고프고 갈증에 시달려서 맛도 못 느끼게 된 지경이었던거야.
얼마나 걸었을까. 홍석훈이 다시 쓰러져.
마치 전염되듯이 일행 모두가 지쳐서 쓰러지지. 근처 옥수수 밭으로 간신히 기어가서 몸을 숨기고 일행은 기절하듯 잠이 들어버렸어.
마치 다시는 못 일어날 것처럼…….
<1부 탈출>을 이만 마칠게.
다음은 돌베개의 12개의 목차중 두번째인 <불로하 강변의 애국가> 편이야. ^^
2부. 불로하 강변의 애국가
반말어투를 고쳤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어서 2탄부터는 음슴체로 이어갑니다.^^
옥수수 밭에서 기절하듯 잠이 든 장준하 일행.
동이 트기 직전, 장준하는 잠결에 기차의 기적소리를 어렴풋이 듣고 기겁하며 깨어남.
왜냐면, 철길 근처라는 것은 곧 탈영부대 인근이라는거. ㅠ.ㅠ
중국군이 있는 동북방향으로 간다고 갔으나, 중간에 방향을 잃고 해매서 챗바퀴 돌 듯 제자리 걸음을 한것 같은 안좋은 예감.
일행은 낮에는 숨어있다가 밤이되면 다시 움직일지, 아니면 계속 갈지 갑론을박하고 있었는데….
숨어있는 모습을 그만 어느 중국인 농부에게 들켰음. 농부는 일본 군복을 입고 있는 세사람을 보고 놀라서 도망갔고…
장준하는 그 농부가 일본군 점령지역 주민이 아닌, 중국 치하의 주민일거라고 침착하게 마음을 가다듬음. ㅠㅠ
어쨌든 일본군복을 보고 놀라서 도망갔으니까..
장준하는 일본군 선발대 행세를 하며 행군을 계속하자고 함. 주민들을 위협;하여 먹을것을 구하거나, 아님 앗싸리 돈주고 뭐라도 사먹을 수 있으니깐.
당장 지금 너무나도 굶주린 상태라 그냥 앗싸리 대담하게 행동하기로 결심함.
<돌베개 中>
우선 밥이라도 얻어먹고 운명에 대결하자.
더 망설일 겨를도 없이 우리는 큰길로 성큼성큼 발길을 돌렸다. 큰길로 내디디는 발걸음은 그런대로 당당한 걸음이었다. -ㅅ-
얼마간 걷다보니, 새벽일을 마치고 아침참을 먹고 있는 농부무리를 만났음.
농부들은 일본군복을 입고있는 장준하 일행에게 아침참을 양보해줌.
일본군의 비위를 거슬렀다가는 무슨 보복을 당할지 모르니까….ㅠㅠ 장준하 일행에겐 그나마 다행이었음.
농부들이 먹고있던 음식은 쨈빙<지엔빙,전병>이라는 음식으로, 밀가루를 얇고 둥그렇게 부쳐서
안에 고기나 야채를 넣고 돌돌 말아서 베어먹는 음식.
농부들의 식사를 모조리 아구아구 먹어치운 일행은 엉터리 중국어와 필담으로 탈영한 일본군 부대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물어봤는데……농부왈,
“쓰까다 부대는 15리 떨어진 곳에 있음 ^ㅁ^”
1리=약 400m 이므로, 탈영부대로부터 5.9km………….뙇!!!!!!!!!!!!!
<돌베개 中>
연 사흘을 걸어, 죽을힘을 다해서 나온 것이 겨우 15리 길이라니, 아연실색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새벽의 기적소리는 내가 정확히 들은 것이다.
아무리 따져보아도 150여 리는 걸었을 터인데 불과 15리 길을 150리나 걸어서 왔다니 기가 차서 아무런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장준하 일행은 우선 중국 팔로군이 있다는 방향으로 목적지를 정하고 호주머니를 털어 모은 돈으로 농부에게 쨈빙 테이크 아웃 주문을 하는데…
농부는 흔쾌히 집에서 만들어서 금방 올 테니 기다리라고 하고 마을로 감.
혹시나 일본군에게 밀고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속에 시간은 초조히 지나가고, 이윽고 농부가 쨈빙을 들고 나타남.
하지만 이것이 사단이 되었음. 농부가 수상한 일본군인들이 나타났다고 누군가에게 밀고한 것임!!!
장준하 일행이 걸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추격자들이 나타남.
장준하는 허리에서 권총을 뽑는 체하며 보이고서는 앞만보고 냅다 달림. 추격자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고, 장준하의 귓가에 총알소리가 스치고 지나감.
한참을 달렸으나 결국 추격자들에게 포위되고…..ㅠㅠ
장준하가 추격자들을 보아하니, 일본군 같지는 않았음.
총기도 일본군의 것이 아닌데다, 확실한 중국 청년들이었음.
장준하는 나뭇가지로 바닥에 한문을 써내려 갔음. 혹시나 한국청년인걸 밝히면 일본군에게 팔아넘기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온몸을 휘감았지만,
운과 직감에 맡기기로 함. ㅠㅠ
“우리는 한국 청년. 그제 밤 일군 병영 탈출. 지금 팔로군(중공군/마오쩌둥세력) 진영을 찾아간다”
“우리가 그 팔로군이다. 우리를 따라 오라” (사실 얘네는 장제스세력의 중앙군이었음. 장준하 일행이 안따라올까봐 거짓말 한거)
장준하 일행은 안경, 손목시계등 소지품을 모조리 빼앗긴 후, 연행되다시피 그들을 따라감.
중앙군 유격대의 사령부에 도착한 장준하는 뜻밖의 사람을 만나게 됨.
<돌베개 中>
초조하게 어느 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중, 이윽고 한 사람이 나타났다.
중국 군복을 입은 한 홍안의 미청년 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는 우리를 보자마자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는 와락 달려들듯이
“한국 분들이죠?”
하고 분명한 우리말로 이렇게 물으면서 바로 우리앞에 섰다.
바로,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이었음.(2011년 국립 대전현충원 안장)
참고로, 아래 사진은 워낙 유명해서 한번쯤 본 사람들이 많을거임.
가운데에 있는 사람이 바로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님이라는~^^
잠깐 김준엽(존칭생략)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김준엽은 일본 유학시절, 장준하와 마찬가지로 학도병으로 징집되어서 중국 쓰카다 부대로 끌려감.
1편에서 쓰카다 부대의 감시가 철통같아서 탈영병이 단 1명뿐이었다고 한 거 기억들 나심?
그게 바로 김준엽임. ㅋ
김준엽이 탈출한 이후, 쓰카다 부대에서는 장준하를 비롯한 한국인 학도병들에게 이렇게 위협을 했다고 함.
“김준엽이는 중국군에게 붙잡혀서 죽창에 꼬치가 되어 너절한 죽음을 맞이했다.
우리한테 잡혔어도 그렇게 됬을테지만…그러니까 탈출따윈 꿈 깨!!”
죽은줄로만 알았던 김준엽이란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다니, 장준하는 어안이 벙벙 하면서도 기쁘기 그지 없었음.^^
앞으로 이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연인(戀人) 과도 같은 존재라고 할 정도로 평생의 베프로 남게 됨.
김준엽은 탈출후, 중국군 내에서 사무보조 및 한인 학도병들의 탈영을 주장하는 전단지를 만들어서 배포하는 일을 했었음.
김준엽:드디어 내 전단지를 본 한국인 학도병이 탈출 했구나~♡ 유-후! 준하횽, 내 전단지 보고 탈영했지? ㅎㅎㅎㅎ
장준하: ....?? 아닌데????????
김준엽: ………..OTL
어쨌든 활짝핀 이야기꽃은 새벽 2시까지 이어지고…
그런데 갑자기 김준엽은 장준하 일행에게 잠시의 작별을 고함.
김준엽: 사실 나 있다가 어디 좀 다녀와야해.
장준하: 어딜?
김준엽: 쉬저우 인근에 탄광이 하나 있는데, 일본군들이 중국인을 노예처럼 헐값에 부려먹고 있거든.
사령관이랑 같이 가서 임금을 인상하지 않으면 폭파해 버릴거라고 교섭하러 가. 난 통역으로 가는거야.
장준하:………ㅠ.ㅜ
장준하는 하루종일 눈이 빠지도록 초조하게 김준엽을 기다리고, 김준엽은 예정시간보다 훨씬 늦은 오후에나 돌아옴.
그런데, 장준하가 김준엽의 얼굴을 살펴보니, 안색이 매우 좋지 않은 거였음.
장준하: 무슨일이야?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얼굴표정 바꾸지 마.ㅠㅠ
김준엽:………오늘 우리는 다시 쓰카다 부대로 끌려갈 뻔했어……
장준하:………………………뙇!!!!!!!!!!!!!!!!!!
일본군측에서 장준하 일행과 김준엽이 중국군 유격대에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을 알고, 중국인 포로 30명과 맞바꾸자고 한 것.
다행히 한치륭 사령관이 응하지 않고 거짓으로 둘러대서 무사할 수 있었던 거임.
<돌베개 中>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충칭(임시정부)으로 가자. 죽어도 그곳서….”
5대 30명의 비중은 우리를 괴롭혔다. 도저히 인간 한치륭이 겪었을 그 인간적인 고민에 보답할 길이 없을 것같이 생각되었다.
부드득 이가 갈렸다. 또 앞으로 어떤 조건을 제시해 올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만일 우리가 그들에게 인도된다면 우리는 “탈출병의 최후”라는
그들의 연극에 시체의 연기자로 등장할 것이다. 중국군의 만행이라는 변명 속에 온갖 짓을 다 당하여 죽어서 우리 한인 학도병 앞에 전시될 것이다.
만일 이 부대가 우리 조국의 군대이고 한 사령관이 우리 민족이었다면 우리가 그 은혜에 대해서 이렇게 괴로워하고 또 불안해 할 리가 있겠는가.
우리는 나라없는 슬픔을 짓씹어야만 했다.
조국애를 몰라서 조국을 귀하게 여기지 못했고, 조국을 귀중하게 여기지 못하여 우리의 선조들은 조국을 팔았던가.
우리는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으련다. 나는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이 가슴의 피눈물을 삼키며 투쟁하련다.
나의 인생의 과정은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라는 이정표의 푯말을 꼿고 나를 안내할 것이다.
훗날 장준하의 좌우명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는 이때 다져진 의지였음.
평화시의 호텔방이나 정당 연구소에서 만든 정치구호하고는 태생의 근본 자체가 틀림. ㅠ_ㅜ
우리는 지금 못난 조상이 되고 있는 건 아닌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고 봄.
중국군 유격대는 일본군에게 어느정도 거처가 드러났는지라, 급히 짐을 꾸려서 본거지를 옮김.
장준하와 일행은 밤새 걸어서 새 사령부에 도착함.
사령부 인근에는 불로하(不老河)라는 강이 있었는데, 사시사철 마르지 않고 흐른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
일행은 일본 군복을 버려 버리고 강에서 목욕을 마친 후…….난생 처름 커다란 목소리로 떳떳이 조국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지. ㅠㅠ
불로하 강변 사진
<돌베개 中>
우리는 조국을 향하여 경건하게 머리를 숙였다. 두고 온 산, 강 뛰놀던 고향이며 부모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욱이 머리에 떠올랐다.
“우리 다 같이 애국가를 부릅시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목메인 애국가는, 이 다섯 청년의 가슴을 울리면서, 낮선 중국땅에 한국의 언어를 뿌려놓았다.
끝내 울지 않고는 후렴을 부를 수가 없었다. 아, 조국이란 진정 이런 것이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중국의 아침 햇살이 우리들 눈망울마다에서 빛났다. 한포기 풀잎의 이슬방울처럼 우리들의 순수가, 눈망울마다에 맺혔던 것이다.
지고의 순수는 우리를 그토록 감동시켜주었다. 아직도 나는 그 불로하 강변의 숭고한 아름다움을 잊지 못한다.
가슴에 아로새겨진 그 조국애의 결의. 애국가의 힘이 그처럼 벅찬 것임은, 아직도 감격스러운 회상의 과제로 내 가슴에 남아있다.
내가 한반도의 자손임은 애국가를 부를 때마다 새삼스러워진다. 그 강변에 선 이후부터.
장준하 기념사업회에서는 1년에 한번 대학생,대학원생을 모집하여 장준하의 2400km 여정을 10박 11일 일정으로 답사하는
<장준하 구국장정 6000리>프로그램을 운영함. (본인부담 50%, 95만원)
아래 캡쳐는 장준하 기념사업회의 이준영 국장이 불로하 강변에서 대원들에게 강의하는 모습임.
이런거 있는줄 알았음 따라갔을텐데 크엉!! ㅠㅠㅠㅠㅠ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후손들이 또 다시 이 산을 넘지 않게 하기 위하여”(돌베개 中)
우리는 어느새 못난 후손이 되었어. 그리고 이대로 라면 못난 조상이 되겠지.
우리, 잊지 말자. 저들이 역사를 가르쳐 주지 않고 우리를 망각의 늪에 빠뜨리고 있어.
우리들이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분들을 역사책에서 지우고 있어. 그들은 성실하고 부지런한데다 돈과 시간까지 많아.
안타깝지만 우리 스스로 깨어나야 해.
우리가 장준하 선생에 대해각성 한다는 건 다카키 마사오와 친일잔당들 에게는 오금이 저릴 만큼 무섭고 끔찍한 일이야.
젠장!! 젠장!! 젠장!! 조낸빡세게 지워놨더니!!
돌베개는 일본군 탈출에서김구선생님과 국내에 입국하기까지 딱 2년간만의 이야기를 다룬 거니까.
<장준하 평전>과 <장준하, 민족주의자의 길(박경수저)>가 있는데, 내가 읽은 것은 후자야.
둘다 서평이 좋으니까 선택해서읽도록^^ 전혀 지루하지 않아.
그리고 장준하의 일대기를알고나면, 자연히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에 손이 가지.
책을 읽을 시간이 없어? 책을 살 돈이 없어? 도서관도 멀어?
그러면 이거라도 해줘. 오유뿐만 아니라, 삼국,여시, 뽐뿌, 82cook 등으로 이 글을 퍼날라 줘.
아니면 장준하 기념사업회에후원이라도 부탁해. http://www.peacewave.or.kr
정기 자동이체면 좋지만 단발성후원 1000원이라도 좋아.
직장인이신 분들은 연말에 10만원까지도 소득공제 하게끔 영수증도 발행해 주고 있어.
나중에 다 돌려 받아.
장준하 기념사업회는 참 바보야. 보훈처에서 주는 보조금으로 적당히 몇 명 직원입네 이름 올려놓고 돈만 타먹어도 될것같은데말야…..
에휴. 누구 기념사업회 아니랄까봐 사서 고생을 해요 하여튼.
<사서고생.jpg>
기념사업회는 매년 대학, 대학원생들을 모아서 장준하 선생이 쉬저우~충칭 임시정부까지 도보로걸은 2400km 코스를 10박 11일정으로
답사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해. 수많은 항일운동 유적지를 돌아볼 수 있어.
항일 유적지 상당수가 현재중국의 군사시설이야. 민간 관광객의 신분으로 가면 입장하지 못하는 곳도 있어.
오직 장준하기념사업회에서 이끄는 프로그램을 통해야만 갈수 있다네~
본인부담 95만원이고 나머지는 기념사업회와 후원으로 충당해.
내가 볼땐 여기에단 한 사람 이라도 더 데려 갈려고 국장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하며 아둥바둥 하고 있는 것 같아…
참고로 올해 장정 선발대는 지금 이시각, 중국에 있다네. ^^ 참가하고픈 분은 내년기회에...ㅎ
https://www.facebook.com/peacewave21
http://www.twitter.com/peacewave_jjh
이거저거 다 귀찮으면 좋아요버튼 한번이라도 눌러주고 팔로잉이라도 해줘. 기념사업회엔 그거라도 큰 힘과 응원이 될거야.
그것마저 귀찮으면 그저 이 글을 대충이라도 한번만 읽어줘.
그것또한 귀찮으면 장준하라는이름 세글자 만이라도 기억해줘…..
선생의 영혼이 하늘에서라도웃을 수 있도록.
우리는 그가 물려준 더 나은세상에서 살고 있음을 잊지 말자.
그리고 우리에겐 후손에게더 나은 세상을 물려줄 의무가 있다는 것 또한 잊지 말자.
그들이 쳐놓은 망각의 늪에서빠져 나오자.
젊은이들의 기억에서 장준하를 모조리 지웠다고 여기며 안심하고 있을 그들에게 보여주자. 우리는 그를 잊지 않았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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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디찬 철조망의 냉기가 등골까지 전달되었다.철조망은 상상보다 높았다. 왜 나는 이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따따따땅 하고 총소리가 나의 심장을 뒤에서부터 뚫어오는 듯한 착각의 그 순간,나의 몸이 훌쩍 기울어진 철조망 위로 굴렀다….."
인물과의 갈등구조와 전개 또한 눈여겨 보아야 할 점입니다.
예를들면 장도영이 일본도를 한인 학도병들에게 휘두루며 위협하는 모습도 일반적인 위인전이라면 장도영이 마냥 쓰레기인것처럼 묘사했겠죠.
하지만 장준하는 그 와중에도 장도영이 겪었을 에로사항과 고민에 대해 인간적인 시선을 보냅니다.
탈출병이 생길수록 한국인들이 받는 대우와 감시가 악화되기 때문에 아마 그 스트레스를 못 이긴 그가 이렇게 위협을한 것으로 해석을 해보았지만,
그러나 동족 앞에서 칼을 뽑아 들고 “이제또 도망가는 놈은 내가 찔러 죽일 테야!!” 라고 호통을 치는 것은
나로서는 도저히 묵인할 수 없는 한계선을 넘은 행동이었다.
한마디로,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을 아는 분이셨던거죠.
돌베개를 읽다보면 이런 예시가 수도없이 많습니다.
사람을 향한 그의 따뜻한 시선. 그러나 자신에게는 한치의 그릇됨도 허락치 않는 강인함.
약자에겐 약하고 강자에겐 더 강한 사람.
당신은 그런 사람.
장준하 선생의 돌배게를 읽으면, 마치 젊은 장준하의 몸에 잠시 기대었던 것처럼
그의 따뜻한 체온이, 그의 더운 숨결이 당신곁에 머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