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즐겨찾아가던 글쟁이 사이트에서 간간히 뵙던 분인데...
어느순간부터인가 자취를 감추신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쓰신 단편 소설들을 스크랩하면서 간간히 즐겨보다.. 자취를 감추신 이후 잊고있었는데
우연히 제 블로그의 글들을 정리하면서 다시 읽어보니 혹시나 다른 흔적을 알고 계시는 분이 계실까 싶어
그분이 쓰셨던 단편 소설과 함께 흔적을 찾습니다.
정말 제가 좋아하는 내용과 이야기 전개를 사용하시는 분이시구요
혹시나 작가로 활동하신다면 다시금 그분의 책을 찾아 보고 싶을 정도입니다.
혹시나 이 작가분의 근래 현황을 아시는 분이 계신다면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이하 아래 본문은 그분이 쓰셨던 단편 소설중 하나와
스크랩해뒀던 그분의 단편 소설들을 남깁니다.
간격의 간격 / 조원진
1
"그게 뭐야, 프랭크?"
커피잔을 들고 오던 마이클은 잔뜩 흥미로운 표정으로 뭔가에 열중하고 있는 프랭크에게
다가갔다. 그의 책상에 놓여있는 것은 격자무늬가 쳐진 나무판. 그리고 검고 흰 작은
돌맹이들이었다.
"이거 아주 재미있는 거야... "
"그러니까, 그게 뭐지? 마치 체스판 같은 걸?"
프랭크는 고개를 돌려 친구를 바라보았다.
"이건 말야, '바둑'이라고 부르는 동양의 게임이라구. "
"그래? 체스같은 건가?"
"흠...글쎄. 오히려 체스에 가까운 것은 '장기'라고 하는 게임이 있지. 바둑은 좀 달라."
"어떻게 다른건데?"
"체스나 동양의 장기는 결국 왕을 잡는 것이 목적이지. 그리고 그를 위해서 기사나 졸과
같은 여러가지 다른 역할을 갖는 말들이 존재하잖아? 하지만 바둑은 그렇지 않아. 오직
똑같은 검은색과 흰색 돌만을 가지고 하는 게임이야."
"그러면 체커와 비슷하지 않은가?"
"아냐아냐... 그 복잡성과 다채로움이 비교가 되지 않는다구. 일설에 의하면, 유사이래
똑같은 바둑판이 재현된 적은 단 한번도 없다고 하는군."
"그래? 거 참 대단한걸!"
마이클은 들고온 커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소파에 앉았다.
프랭크는 자신의 커피잔을 들어 한모금 마시고는 얘기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 바둑이란 게임의 룰이야. "
"룰?"
"그래, 룰. 바둑은 총 9개의 규칙만 알면 되는데, 그 규칙이 참 놀랍다구."
"그래? 어떤 룰인데? "
"첫째, 둘이서 한다."
마이클은 자칫 커피를 바닥에 흘릴 뻔 했다.
"이런! 그게 룰이란 말야? 너무 당연한 거 아닌가? "
"둘째, 교대로 번갈아서 한다."
"하하...정말 원론적이로군. "
"세째, 돌은 줄과 줄의 교차점에 둔다."
"그건 무슨 말이지? "
프랭크는 돌을 하나 집어들며 설명했다.
"보라구. 체스의 경우 말은 8곱하기 8, 즉 64개의 칸위에 올려 놓잖아?
하지만 바둑은 달라. 가로 세로 19개의 줄이 있고, 이 줄들이 서로 교차해서
361개의 교차점을 만들지. 그리고 바둑돌은 그 교차점위에만 놓을 수 있어."
"그래? 그점은 체스와 정말 다르군. 체스는 칸에 놓는 것인데."
"바둑뿐만 아니야. 아까 말한 동양의 체스인 장기 역시 교차점에 놓는다구."
"동서양의 차이인 걸까?"
"그럴지도 모르지. "
"그래, 네번째 규칙은?"
"네번째는 목적에 관한 거야. '집을 많이 만든자가 이긴다'."
"집?"
"그래. 자신의 돌로 특정 영역을 둘러싸면 자기집이 되는 거지. 결국 바둑은
바둑판이라는 영역을 누가 많이 차지하느냐 하는 게임이니까."
"그렇군. 생각보다 목적은 단순한걸."
"그렇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천년간 동양최고의 게임으로 군림해 왔으니까,
단순함에서 기인할 수 있는 복잡성이란게 참 놀랍지 않아?"
"단순함에서 기인하는 복잡성이라.... 그거 마치 카오스 이론처럼 들리는데? "
"하하, 그런가?.. 그리고 남의 돌로 둘러쌓인 돌은 따낸다. 이게 다섯번째
룰이지.....이렇게."
프랭크는 검은 돌 하나를 흰돌 네개로 둘러싸서 따내며 설명했다.
"이제야 룰 다운 룰이 하나 나왔는걸... 그럼 이렇게 따먹힌 곳엔 다시 놓을 수
없는건가?"
"그게 바로 여섯번째 룰이야. 그런 곳엔 놓을 수 없다는 것."
" 아하~ 그렇군."
"그리고.. '패'라는 특별한 상황, 실력차이가 많이 날 때 패널티를 주는 법...
뭐 이런 것들에 대한 규칙이 남아있고, 사실상 정말 중요한 규칙은 이 두어가지일
뿐이라구."
" 그러게 말야. 이런 단순한 게임이 수천년간 동양최고의 게임이었다니, 믿어지지
않는걸? "
"체스는 이미 컴퓨터가 사람을 이길 수 있잖아. 하지만 바둑은 아직 어림도 없다는
거야. 컴퓨터로서는 도저히 따라할 수 없는 복잡성이 있는 거지."
"그렇군. 자네가 매료될만한 게임인가 보지. 그래, 그래서 요즘 바둑에 심취해
있는 건가?"
프랭크는 의자 깊숙히 몸을 묻으며 다시 커피를 들이켰다.
"아니... 같이 할 만한 상대가 없어서. 것보다는 게임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
"게임 자체라니?"
"바둑에는 많은 흥미로운 점이 있거든... 예를 들어보자면 이런 거야. 아까도
얘기했듯이, 바둑은 말을 점에 두고, 체스는 말을 칸에 두지않나?"
"그렇지."
"그런점에서 뭐랄까, 서양과 동양의 사상적인 차이가 드러나는거 같지 않아? "
"사상적인 차이? "
"그래. 대상을 파악하는 틀에 관한 거지. 우리는 이렇게 하나의 주어진 칸, 다시
말해 객체가 점유한 공간을 주체로 보는데 비해, 동양인들은 객체와 객체사이의
틈을 주체로 보고 있단 말야."
"객체 사이의 틈이라...."
"전통적으로 우리의 합리사상의 핵심이 되는 뉴턴 역학의 기본은, 공간과 그 공간을
점유하는 물체로 이루어져 있단 말이지. 그리고 주체는 바로 그 물체들이고 말야.
그런데 이 동양의 게임이 상징하는 것은 오히려 그 간격에 주목하고 있다는 거지.
이건 분명히 처음 게임을 만들었던 고대인들의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반영되어
있음이 분명해."
"글쎄.... 재미있는 생각이긴 한데. 좀 비약적이지 않은가?"
"이봐 마이클. 요즘 내가 중국의 문자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정말 놀랍다구. 자,
이 문자를 봐봐."
프랭크는 책상서랍을 열고는 한자가 두 글자 적혀있는 종이를 꺼내었다.
"이, 이게 무슨 뜻이지?"
"이건 중국문자로 사람, human을 뜻하는 거야. "
"그렇군... 꽤 근사한데."
"첫번째 글자는 이미 그 자체만으로 사람을 뜻해. 걸어가는 사람의 모양을 흉내낸
거지. 그리고 이 두번째 글자는 공간, space를 뜻하는 거야. "
"그래? 그런데 두번째 글자는 왜 필요한 거지?"
" 그게 중국인들의 놀라운 세계관이라는 거야. 첫번째 글자만으로도 물론 사람을
표현할 수 있지만, 두번째 글자까지 포함되어 두 개의 뜻이 모여야 비로소 진정한
인간을 나타낼 수 있다구. 즉 사람과 공간 - 다시말해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가
규정되어질때만이 정말 인간일 수 있다고 본거야."
" 호오... "
" 사실 혼자 존재하는 사람을 진정한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 사람이란 사회와
끊임없이 교류하고 복잡하게 반응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마치 어릴때
늑대들과 성장한 소년의 경우에는, 그는 분명히 유전자는 사람의 것이지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결여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어."
"하긴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란 말도 있으니까."
"결국 어쩌면 인간이란 특징을 규정짓는 중요한 핵심은, 사람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일지도 몰라.
이런걸 봤을때도 아까 바둑얘기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지. 주체를 대상 자체보다는
대상간의 공간, 즉 관계로 해석하는 방식 말이야."
"글쎄.. 제법 그럴 듯 하긴 한 거 같아. 요즘 현대과학의 발전이 오히려 선이나 도와
같은 동양의 고대 사상을 설명하려 하고 있잖아. 그런 걸 보면 이러한 시각도 어쩌면
앞으로 주목받게 될 새로운 파라다임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겠나?"
" 바로 그런거야!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사고체계에 너무나도 깊이 뿌리박혀 있는
<가시적인 대상>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온 것일지도 모른다구."
마이클은 커피잔을 프랭크를 향해 들어보였다.
"....자네와 내가 아니라. "
"자네와 나 사이의 하나의 관계로 말이지."
2
연방수사국의 빌은 한 뭉터기의 서류철에서 고개를 들었다.
" 젠장! 결국 그랬군! "
빌의 화난 목소리에 놀란 옆자리의 메리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죠, 빌? "
"똑같아... 도대체 이런 자가 몇 명이나 있는 거지? "
".... 무슨 일인데요, 빌?"
메리는 안경을 콧등위로 올리며 빌의 책상쪽으로 몸을 돌렸다.
"요즘 내가 수사하고 있던 젝슨사의 횡령건 말야. 조나단이란 명의로 되어 있던거,
계속 그 자를 추적하고 있었잖아?"
"그랬었죠. 찾아냈나요?"
빌은 어깨를 으쓱, 해보이며 대답했다.
"아니~ 찾아내기는 커녕, 놓쳐버렸어. 영원히."
"영원히? 죽기라도 했다는 건가요?"
"죽기는. 도대체 살아있기라도 했어야 죽을 수 있는 거 아니겠어?"
"그게 무슨 소리에요?"
" 가공인물이야. 조나단이란 자는 서류상으로만 존재한다는 말이지."
" 유령계좌라는 건가요? "
" 계좌뿐만이 아니야. 이자는 사회보장번호, 라이센스번호, 학적기록, 심지어는
군번까지 가지고 있다구!"
" 그럴리가! "
" 정말이야. 서류상으로는 완벽해. 게다가 전산정보와 사이버상의 기록으로는
실존하는 인간 이상이지. 수년간의 거래내역과 금융활동기록까지 남겨져 있어.
그리고 세상에나! 의료보험사용 내역까지 있군 그래! 가공인물이 아프기까지 했단
말인가! "
" 정말 그렇다면 좀 이상한걸요, 빌. 어쩌면 실재하는 사람인데 당신이 착각한건
아닌가요?"
" 그럴리는 없어. 아무도 이 조나단이란 자를 만나봤다는 사람은 없다구."
" 아무도 못 봤다고 존재하지 않는건 아니잖아요. 숨어지내는 사람일 수도 있고...
사진도 없나요, 혹시?"
"사진이야 있지. 하지만 이런것쯤이야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는 거니까. "
메리는 빌의 책상에서 조나단의 서류철을 집어들어 찬찬히 살펴보았다.
" 흠... 정말 완벽한 걸요. 누가 봐도 실존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하겠는데...."
"그렇지? 참 대단하지 않아? 그러니 이 자를 어떻게 체포하란 거야? "
" 서류상으로만 존재한다면..... 그럼 서류상으로 체포했다고 하고 복역기록을 넣으면
되겠군요. "
" 뭐? 지금 농담하는 거야? "
메리는 서류철을 다시 빌의 책상에 내려 놓으며 말했다.
" 물론 농담이죠, 빌. 하지만.... 생각해봐요. 서류상의 기록만이 사실인 인간이라면.
서류상의 체포 역시 충분한게 아닐까요? "
" 뭐, 그럴수도 있겠지만, 누군가 분명히 배후가 있을 거 아냐? "
" 그렇겠죠. 결국 추적해야하는 건 그 배후겠죠. 하지만 조나단이 가공인물이란 걸 안
이상, 우리는 얼마든지 이 자를 가공으로 체포할 수 있는 거고, 그렇게 함으로써
배후인물이 더이상 조나단이라는 인격을 사용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 아닌가요?"
" 흠....글쎄. 다른 기관들의 협조를 얻어야 겠지만, 가능한 일이겠지. 적어도 조나단이
더 이상 활개치고 다니는 것을 법적으로는 막을 수 있을 테니까."
" 금융거래도 정지되고, 출국도 못할테고."
" 의료서비스, 신용카드도 중지될테지."
빌은 다시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 이거 봐, 메리. 우리는 있지도 않은 사람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마치 누군가에 대해서
말하는 것 같군."
" 그러게 말이에요. 오늘날에는 이런 정보들과 숫자들이면 충분히 한 사람의 존재를
만들어낼 수도 있으니까요."
" 물론이야. 언제든지 정부와 금융계, 그리고 몇몇 기관들이 맘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한 사람에 대한 완벽한 기록을 만들어 낼 수 있다구."
" 마치 이 조나단처럼."
" ...반대의 경우도 있을까? 그러니까....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기의 사회보장번호,
신분증, 의료기록 등 모든 공식적인 기록들을 잃게 되었다면, 그는 존재하는 걸까?
그의 출생기록도, 성장과정도 사라지고, 그러니까 실종신고도, 사망신고도 없다면....
뭐, 물론 사람이야 존재하겠지만... 오늘날과 같은 사회에서, 에.... '행정적으로'는
사라졌다고 볼 수 있는게 아닐까? "
" 듣고 보니 그렇네요... 만약 서류상으로 한 사람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서류상으로 한 사람을 소멸시키는 것도 가능한 거겠죠."
" 예를 들어 법인이란 것도 있잖아. - 주식회사 같은 거. 그런 법인은 실체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서류상으로만 존재하지. 하지만 법인은 마치 사람처럼 계좌도 개설하고,
세금도 내고, 소송에 제기되기도 하고....법적으로는 인간처럼 대우한단 말이지. "
" 만약, 어떤 사람이 실체는 없지만, 행정적으로는 존재하고, 정상적으로 모든 사회기관과
활동을 유지하고 있다면.... "
" ....그렇다면, 그가 존재하는가 아닌가 하는 물음은 무의미해질지도 모르지."
" 적어도 신용카드회사에서는 존재한다고 말할걸요."
" 백화점에서도. "
빌은 묘한 기분이 온몸에 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지금껏 생각해왔던 인간의
존재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묘한 낯설음이었다.
" 봐... 사람은 이 사회에서 살면서 많은 공공기관이나 기업, 혹은 다른 사람과의 연결을
가지면서 살아가잖아? ..마치 하나의 전신주에서 수많은 다른 전신주들로 전선으로
연결되어 있듯이 말야. 마치 가시가 잔뜩 뻗어있는 성게처럼."
" 그런데요? "
" 그런데 뭐랄까.... 정작 그 전신주를 뽑아버려도, 그 전선들만 남아 있으면 아무런 문제
없이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단 말야. 그러니까.... 사람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 다른 기관과의 관계가 어쩌면 그 사람의 존재를 규정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져."
" 그렇지요. 다른 전신주들로써는, 그 전신주가 아직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겠죠."
빌은 천천히 고개를 갸우뚱했다.
" 만약에 말이야... 모든 전신주가 다 없다면 어떻게 될까...그러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존재하지 않고, 행정적인 관계들만 존재하는 거야. 그리고 자동화된 시스템에
의해서 모든 법적인, 행정적인 사안들이 운영되는 거지."
" 오, 빌. 그건 너무 무서운 생각인걸요!"
" 만약 그러고도 시스템이 잘 돌아갈 수 있다면.... 도대체 인간이란 뭐지?"
" 그만해요, 빌. 너무 이상한 생각을 하는군요. 당신은 우선 조나단의 배후를 찾아야 하지
않겠어요? "
" 참, 그렇지.... 그래, 너무 생각이 새어버린 거 같군. "
" 커피라도 한잔 하면서 잠시 쉬는게 어때요?"
" 그럴까? "
빌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나 메리와 함께 휴게실로 향했다.
3
"모든 건 끝났네, 케네스."
침통한 목소리로, 칼 박사는 화상전화로 비치는 동료 케네스에게 말했다.
" <그들>에게 접촉할 수단조차 없는건가? "
" <그들>은 우리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아.... 인류에게 남은 건 종말뿐이네."
" 상부에서는 뭐라고 하던가?"
" 상부에서의 반응도 비슷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개념이란 거지. 상부에서도
나름대로 방법을 찾고는 있겠지만.... 아마 곧 현실을 받아들이게 될 걸세."
"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그래! 수천년간 지구의 지배자라고 생각해 온 인류가,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배경에 불과했다니 말일세."
스크린속의 케네스는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 아니....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라. 그건 거대한 진화의 한 흐름일세. 우리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방심했던 것이지."
" 알고 있었다니, <그들>이 방문할 것을 말인가? "
" 아니.....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 말일세. 호모 사피엔스는 단지 도구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사실 20세기부터 알 수 있었던 사실일세."
" 그게 무슨 소린가? "
칼은 천천히 서랍에서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 자네, <이기적인 유전자>라는 개념을 알고 있겠지? "
" 그야 물론이지. 사실은 우리 세포속의 유전자가 생명의 주인공이고, 표현형인 우리는
그 유전자를 보호하고 전파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이론 아닌가? "
" 그렇지... 말하자면, '닭은 또 하나의 달걀을 만들기 위한 달걀 자신의 수단에 불과
하다'라는 격언으로 표현되기도 하지. 즉, 우리가 볼 수 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사실상
그 속에 숨겨진 유전자들을 위한 '생존기계'에 지나지 않는 거야. "
" 한때 그 이론 때문에 나도 많이 인생에 회의를 품었었다네. "
칼은 천천히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주체가 유전자라는 건 아니네. 우리는 애초에 유전자를 보호
하기 위해서 만들어졌지만, 우리의 정신과 이성은 그러한 태생적 속박에서 벗어나서
유전자의 의도가 아닌, 우리 자신의 의지에 의해 문명을 건설해 온 것이 아니겠나. "
" 그렇지..... 물론 '본능'이란게 남아있긴 하지만, 인간은 유전자의 명령으로부터 많이
자유로와진 유일한 종족이니까. "
" 인류는 그런 식으로 우리가 스스로 유전자를 소외시켜왔다고 생각해 왔다네. 물론
생명의 근본단위가 유전자인것은 확실하겠지만, 그리고 우리는 그 유전자로부터 비롯
되었지만, 우리 인류는 그 단순한 DNA분자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능력을 발달시켜
왔고, 결국 지구의 지배자가 된 것이잖는가..."
" 사실 유전자는 아무 생각없는 고분자에 불과하니까....."
" ....바로 그와 같은 일이 우리에게 벌어진 거라네."
화면속의 케네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 그게 무슨 뜻이지? "
"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보게나. <그들>은 태양계의 붕괴로부터 지구인을 구하기
위해 지구에 왔지만, 정작 우리 인류를 지구인으로 인정하지는 않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인정하는 건 우리가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낸 네트워크, 시스템, 보이지도 않는
상호관계들이란 말이야! .... 그들이 보호해야 할 대상이라고 여겨지는 건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기반으로 해서 이루어진 <추상>들 뿐이라고!..... 그들은 '나'를 원치
않아. 그들이 인정하는 건 나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관계들, 나를 포함한 사회의 네트
워크, 그리고 그 연결들간의 상호방식일 뿐일세.... 우리가 없으면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문명의 부산물들을 그들은 지구인으로 받아들이고 있단 말이야. "
" ........."
" 마치 유전자들에게 우리가 한 짓과 똑같지 않은가? 유전자들도 인간따위는 자신들이
없으면 존재하지도 못하는, 단순한 도구라고 여기겠지만.....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지금 인류의 기술은 단 하나의 세포도 사용하지 않고도 지능을 구현할 수도 있네.
우리는 더이상 유전자를 필요로 하지 않아. 우리가 유전자를 완전히 따돌려 버린 거지.
-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일어난 일도 똑같은 거야. 우리의 문명이, 우리의 사회구조,
인간들로 이루어진 복잡한 네트워크가 스스로 지능을 얻고 정체성을 찾아내어 결국
우리를 따돌려 버린 거라네. - 이제 그들에게 인류는 필요 없는 거야. 언제부턴가
우리의 네트워크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지구의 대표자가 되어 버린거라네."
" 정말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야....."
" 이미 '그들'은 <우리사이에 존재하는 지구인>들과 협상을 다 끝냈다는군..."
" 하하.. 그렇지. 우리사이에 존재하는 지구인 - 그러고 보니 지금도 같이 있군 그래.."
칼은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 마치 기억이, 정보가 뇌세포 하나하나에 저장되는 게 아니라 그 연결패턴에 저장되는
것처럼..... 이 전지구적 지능에 있어서 우리들 하나하나는 중요한게 아닌 거라네. 오직
우리들 사이의 연결 패턴만이 중요한 거지. - 그리고 '그들'은 영리하게도, 그 패턴만을
추출해 갈 생각을 한 거지...."
" 우리는 버려두고 말이지. "
" 우리가 죽은 사람의 뇌로부터 기억을 추출해 컴퓨터에 담는 것과 똑같다네. 연결 패턴이
추출된 뇌는 더이상 필요하지 않으니까... 뇌는 버려지는 거지."
케네스는 할 말을 잃었다.
칼 박사는 두번째 담배에 불을 붙히고는,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 정말 믿어지지가 않아.... 사람들의 관계가... 지능을 형성할 수 있다니..."
" 유전자들도 그랬겠지, 케네스. "
" ....우리에게 남은건 기다림 뿐이로군, 칼? "
" 그렇지. 하지만 너무 절망하지 말게. 이건 새로운 형태로의 진화이니까."
" 우리가 없어지는데도 그게 의미가 있을까? "
" 세포가 죽는다고 생명이 사라지진 않지. - 마치 체스판과 비슷한 거라네. 우리가 선을
그음으로써 비로소 칸이 생기지만, 일단 칸에 시선을 돌리는 순간 선들은 사라지고 마는
거지. 다시 선으로 눈을 돌리면 칸은 사라지듯이. 이건 칸과 선의 문제와 같은 거라네.
칸이 있어서 선이 있고, 선이 있어서 칸이 있을 수 있는 거야. 다만 그 바라보는 시선이,
한때는 칸에 있었다가 선으로 옮겨졌고, 이제 다시 칸으로 옮겨지는 것 뿐인걸세...."
" 그런 걸까..... 선과 칸은 그대로일 뿐인데 말야."
" 그런 거야, 케네스. 변하는 건 없다구. "
" 그래....하지만 어째 좀 서글프군. "
" 이야기의 나머지부분에 참여하지 못하는 서글픔이겠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네."
" 그렇군....."
케네스의 화면에서 뭔가 소리가 들리더니, 케네스는 고개를 잠시 돌렸다.
" 이런. 애들이 날 찾는구먼."
" 가보게, 케네스. 마지막까지 평안하기를."
" 그래, 칼. 자네도. "
" 그래. "
잠시 침묵이 흘렀다.
" 이보게 칼. 우리는 사라지더라도..... 자네와 나의 '관계'는 보존되는 거겠지? "
" ....그렇지. '그들'이 가져갈테니까."
" 나와 내 가족들과의 관계도....'
" 물론이야. "
" 묘하군. 우리는 사라지고 관계만 남는다...."
" 사라지지 않는다구. 체스의 흰칸만 제외하고 검은칸을 그릴수 없듯이."
" ....그래. "
케네스의 얼굴이 화면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