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이란 어떤 이유 때문에 저 세상으로 떠나지 못하고 이승에 남아 있는 영(靈)들입니다.
한참을 고민하던 해원이 말문을 열었다.
“그래서 그 이유가 없어진다면 대부분 저 세상으로 떠나게 됩니다.”
“너무 오래 전의 일이라 설령 귀신이라 해도 지금은 없을 것이다...... 그런 말인가?”
“예.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영들이 그렇게 오래도록 이승에 남아 있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회장이 반문했다.
“거의 없다는 건, 가끔은 그런 경우도 있다는 이야기도 되겠군. 아닌가?”
“일단 그렇긴 합니다만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해원이 다소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회장은 오히려 안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은 있다는 거군. 그럼 이 일을 맡아주었으면 하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내 의뢰비는 듬뿍 내겠네.”
해원은 잠시 대답하지 않고 회장의 기색을 살폈다.
“......하나 여쭤 봐도 괜찮겠습니까?”
“당연하지. 뭔가?”
“그토록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인데, 왜 지금 와서 찾으려 하시는 겁니까?”
회장은 미소 짓더니 자신의 가슴과 배 사이를 툭툭 쳐 보였다.
“지난주에 바로 여기를 수술했네. 간암이었지. 간을 절반 이상 잘라냈어.”
“큰 수술이었겠군요.”
“그래. 사실은 지금도 아파 죽을 지경이네. 여기 이 진통제 덕분에 간신히 살아있는 거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회장은 침대 곁에 걸려 있는 작은 플라스틱 통을 가리켰다. 통에서 뻗어 나온 고무줄이 바늘을 통해 회장의 왼손등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 것치고는 정정해 보이십니다.”
해원이 솔직하게 말했다. 회장이 웃었다.
“하하. 나는 아무것도 없이 시작해서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이 지위까지 올라왔네. 그 동안 배운 것이라면 남자는 그 어떤 경우에도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 약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 내 뒤통수를 후려칠 사람들이 적어도 일개 중대는 있으니 말일세.”
“그렇습니까. 저는 상상하기 어려운 세계군요.”
“아마 그럴 걸세. 아무튼 지금은 다행히도 다른 부분에 전이가 안 되었다고 하더군. 하지만 그걸 거꾸로 말하면 어떤 뜻이겠나?”
해원은 잠시 망설였지만 곧 솔직하게 대답했다.
“앞으로 전이될 가능성도 있다......는 뜻입니까?”
“맞았어. 그리고 그렇게 되면 나는 아마 더 이상 살아있기 어렵겠지.”
회장은 담담한 말투였다.
“그래서 생각했네. 내가 죽기 전에 꼭 알고 싶다고. 그 때 내가 만난 아가씨가 대체 누구였는지.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귀신이었는지. 그 남자친구라던 작자는 어떻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녀는 그 때 왜 그런 곳에 있었는지를 말일세.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야. 단지 궁금할 뿐이야. 어떤가, 대답이 되었나?”
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일을 맡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네.”
회장은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해원도 마주 손을 내밀어 악수를 나누었다. 회장의 손은 의외로 수척하여 피부 아래의 뼈가 느껴질 정도였다.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내 비서에게 연락하게. 어제 연락받았을 테니 전화번호는 알고 있을 테지? 가능한 범위 내에서라면 적극적으로 자네를 도우라고 이야기해 두겠네.”
“예. 그럼 중간보고도 그쪽을 통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그럴 필요가 없네. 이게 내 직통전화이니 경과에 대해서는 이쪽으로 연락 주게.”
회장은 침대 곁의 협탁 서랍에서 자신의 명함과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내 명함하고 착수금이네. 활동비가 더 필요해지면 언제든지 연락 주게.”
봉투는 매우 얇은 것이 아무래도 현금이 아닌 수표인 모양이었다. 얼마일까 하는 궁금함이 소록소록 피어올랐지만 회장의 앞에서 봉투를 열어볼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이 두꺼운 해원은 아니었다. 그는 말없이 명함과 봉투를 양복 안주머니에 간직한 후 회장에게 작별을 고했다. 해원이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회장이 다시 한 번 다짐하듯 말했다.
“잘 부탁하네.”
병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기사가 깍듯한 태도로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기사의 정수리에 보이는 희끗한 머리카락 때문에 해원은 마주 고개를 숙이면서도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해원은 잠시 생각하다 공손히 거절했다.
“아닙니다. 도중에 들를 데가 있어서요.”
“말씀하시면 그쪽으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개인적인 일이라......”
나온 김에 마트에 들려 장을 볼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왠지 부끄러운 해원이었다. 그 거창한 차를 타고 마트 주차장에서 꾀죄죄한 몰골로 내린다는 생각만 해도 얼굴이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다행히 기사는 더 권하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혹시라도 차가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비서를 통해 연락을 주십시오. 회장님께서 본인처럼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예. 그러겠습니다.”
기사는 말없이 다시 한 번 허리를 구십 도 가까이 접어 작별인사를 대신했다. 해원은 무척 부담스러운 마음으로 병원을 나왔다. 바리가 살짝 놀리는 투로 말했다.
“흐응. 이렇게 깍듯 깍듯한 사람이 또 있네요.”
“뭔 소리야. 나는 그 정도는 아냐.”
“정말요?”
“......”
해원은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외로 꼬았다. 바리는 한참을 킥킥거렸다.
“엄마가 웬일로 일거리를 가져다주었네요.”
“감사드려야지.”
아마 큰무당 본인이 처리하기는 번거로웠기 때문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지만, 의도야 어찌 되었든 간에 일거리를 준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그것도 평소보다 훨씬 큰 사례가 기다리고 있는 건수였다. 물론 의뢰를 해결한다는 전제 하에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희한한 경험이네, 저런 부자를 만난 건.”
“부자여서 부러워요?”
“응? 아니.”
절반도 남아 있지 않다는 간과 손등에 꽂고 있던 진통제, 그리고 본인 스스로 인정한 허세를 생각하면 부럽다기보다는 오히려 안쓰러운 심정이었다. 해원으로서는 차라리 아프면 아프다고 울 수라도 있는 삶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런 이야기를 하자 바리도 동감을 표했다.
“세상을 편하게 사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저 나이면 회장님치고는 젊은 거 아니에요?”
“이제 사십대 초반이니 많이 젊은 거지. 어제 좀 찾아봤는데 그쪽 업계에서 진짜 유명한 사람이야. 말 그대로 자수성가했는데 우리나라 부자 순위에서 백 위 안에 든다더라. 하지만 그 나이에 그 자리까지 갔다면 스트레스도 엄청나게 받았겠지?”
“그래서 암에 걸린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아마도.”
‘남자는 그 어떤 경우에도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 회장의 굵은 목소리가 여전히 해원의 귓가에서 울리고 있었다. 해원은 안타까운 마음에 혀를 찼다. 기껏해야 근근이 먹고 사는 처지의 자신이 그런 부자를 동정해도 되는지 의문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원은 회장이 안쓰러웠다. 바리가 잠시 후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동감이에요.”
“그래. 뭐, 아무튼 장이나 보러 가자. 오랜만에 의뢰가 들어왔으니 일단 냉장고부터 좀 채워놔야겠어.”
바리가 동의했다.
“맞아요. 요 며칠 콘프레이크만 먹었잖아요. 그러고 보니 아까 착수금 받지 않았어요? 그걸로 장부터 보면 되겠네요.”
“아. 잊고 있었네. 수표 같던데......”
해원은 품속에서 봉투를 꺼내 살짝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숫자를 확인한 후 훅 숨을 들이켰다. 바리가 궁금한 듯 채근했다.
“얼마예요? 얼마?”
“......안되겠다. 이걸로는 장을 못 보겠어. 거스름돈을 못 받겠네.”
“그 정도예요?”
“......중고차나 한 대 사러 갈까.”
커피숍 문이 열리더니 후줄근하게 차려입은 익숙한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해원은 앉은 채 손을 흔들어 그를 불렀다. 곧 해원을 발견한 원순이 성큼성큼 다가와 맞은편에 앉았다.
“아 이 자식 진짜. 어려운 일만 시킨다니까.”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기도 전에 욕설부터 먼저 날아왔다.
“커피 산다니까.”
“커피 정도로 될 게 아냐. 하도 옛날 일이라서 먼지 한 뭉텅이씩 먹어 가며 이틀이나 자료실에 처박혀 있었다고.”
“알았어. 그럼 밥 살게.”
“소고기다. 한우로.”
원순이 다짐하며 십여 장쯤 되는 출력물 더미를 내밀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옛날 자료라서 내가 따로 요약한 거야.”
해원이 요청한 것은 의뢰인이 그 여자를 만났을 때를 전후하여 그 도로에서 발생한 교통사고 이력이었다. 회장이 사고를 당한 건 아니었지만, 만일 그 여자가 사람이 아닌 영이었다면 설령 그 자신의 의도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높았다. 교통사고 다발지역에는 사망한 사람들의 영이 주변을 맴돌곤 하는데, 의도와는 관계없이 그들의 존재 자체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쳐 다시 사고를 일으키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경우가 많았다.
원순의 자료를 확인한 해원은 자신의 생각이 맞아들었다고 생각했다. 그 때를 전후하여 이런저런 사고가 지나칠 정도로 많았다. 사고는 주로 저녁 무렵부터 다음날 새벽에 걸쳐 발생했는데 사망사고도 두 건이나 있었고 중상이 네 건이었다. 사고는 주로 도로를 이탈하여 나무를 들이받거나 가드레일 너머로 추락하는 형태였다.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자잘한 것까지 합치면 사고는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거기 터널이 개설된 건 네가 말한 날에서 이 년 전이야.”
잠시 목을 축인 원순이 설명을 시작했다.
“터널이 뚫린 이후로 그 산길 도로의 교통량은 대폭 줄어들었어. 사실 유지비를 생각하면 그 도로를 아예 폐쇄해도 무방할 정도였지만, 멀쩡한 길을 왜 없애느냐는 이야기가 있어서 그냥 두었던 모양이야.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차가 안 다니니까 사고도 없었지. 그런데 여길 봐봐.”
원순은 날짜가 늘어선 목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터널 개통 후 일 년하고도 넉 달 만에 이 도로에서 사고가 났어. 그 날에서 팔 개월 전이었지. 사망사고였어. 내리막을 내려가던 차가 반대편 가드레일을 뚫고 호수로 추락한 거야.”
“사망자는?”
“한 명. 운전자 혼자 타고 있었어. 서울 모 대학의 조교수였는데 나이는 사십대 초반. 추락의 충격으로 기절 후 익사했지. 사고 원인은 졸음운전으로 추정되었어. 뭐 말 그대로 추정일 뿐이지만 사고가 난 게 한밤중이었으니까. 아내의 말에 따르면 지방에 종종 출장을 갔었던 모양이야.”
“사망사고가 하나 더 있었다며?”
“응. 그러니까 어디 보자...... 이 사고에서 오 개월 후네.”
회장이 여자를 만나기 석 달 전이었다.
“승용차가 길 가의 나무를 정면으로 들이받았어. 젊은 남자 셋이서 어디 놀러가다 변을 당했더군. 셋 다 대학생이야. 굵은 나무가 절반쯤 꺾일 정도로 세게 들이받았는데 아무도 안전벨트를 안 하고 있었다는군. 운전자와 조수석에 있던 친구는 즉사했고 뒷자리에 타고 있던 학생은 중상. 요즘처럼 안전벨트 착용이 강조되던 시절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뭐랄까, 기록을 보면 조금 특이한 점이 있어.”
“뭔데?”
“다친 학생의 증언에 따르면 어두운 밤에 차가 내리막을 달리면서 꽤 과속을 했던 모양이야. 그런데 그 때 갑자기 사람이 앞에 나타났다는군. 그 사람을 피하려고 운전자가 급히 핸들을 꺾다가 옆의 나무를 들이받았다는 이야기지.”
“사람? 어떤 사람?”
해원은 미간을 좁혔다.
“경황이 없어서 자기도 자세히는 못 봤지만, 여자 같았다고 증언했어. 하지만 거기는 사람이 걸어 다닐만한 길이 아니야. 조사해 봤지만 역시 사람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고.”
해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여자가 바로 회장이 만난 여자일까? 하지만 근거는 없었다.
“다른 사고는?”
“어디 보자...... 첫 번째 사고 이후로 꾸준하게 사고가 발생했어. 삼 년 동안 열한 건이나 발생했으니 석 달에 한 번 꼴인가. 서울시내 한복판 도로라면 몰라도, 그곳의 교통량을 고려해 볼 때 상당히 많은 셈이지. 패턴은 다 비슷비슷해. 구불구불한 길에서 미끄러져 어딘가를 들이받는 식이지. 그런데 기록을 보면 운전 도중 사람을 봤다는 증언이 종종 나와. 네 번이나.”
“그래. 대강 알 것 같다.”
해원이 말했다. 하지만 원순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게 남았어.”
“뭔데?”
“네가 부탁한 걸 조사하다 부가적으로 발견한 거야.”
“뻐기는 걸 보아하니 뭔가 그럴듯한 걸 찾은 모양이네. 대체 뭔데?”
“한우에 플러스 참치 회까지.”
“......콜.”
“좋아.”
원순은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그리고 자못 뜸을 들이더니 젠체하며 입을 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