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 안녕히
이 햇빛 속에 이제
그녀는 없다
햇빛보다 훨씬 강한 것이
그녀를 데려갔다
이제 더 이상 더 그녀를 저버리지 않아도 된다
내가 너무 저버려서
그녀는 모든 곳에 있고
어디에도 없다
저를 용서하세요
당신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
당신을 이해할 생각도 없었던 것들
무례하고 매정한 것들을
그녀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그녀가 무엇을 좋아했을까
그녀에게 쥐어드려야 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아, 나도 무엇 하나 가진 것이 없었다
마음조차도. 그녀에겐 마음이 있었는데
그녀가 빈손을 맥없이 뻗어
죽음은 그녀의 손을 꼭 쥘 수 있었다
아무도 잡아주지 않은 텅 빈 손으로
당신은 그 손을 꼬옥 쥐었다
안녕히, 안녕히, 안녕히
가세요
이현애, 기다려 주는 이가 있다
파름한 하늘 깊은 곳
야산 기슭 풀꽃 사이에
오래된 나무의자 목비처럼 앉혀놓고
기다림도 없이
기다려 주는 이가 있다
어쩌다 사치스러운 아픔으로 가슴 미어질 때라든가
작은 소망 앞에 몸이 떨릴 때
필연처럼
토닥여주는 이가 있다
뜻없이 스러져가는 나날 나날들을
생의 어디쯤에선가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게
상위가치의 불씨 다독다독
묻어주는 이가 있다
울 넘어 초록불 밝히고
앙금으로 서러움 삭여내는
그런 이
사람의 가슴마다 숨어 있다
강효수, 정 떼기
누군가에게서
멀어진다는 것은
준비가 필요한데
어느 날 갑자기
겨울 숲
메마른 밤송이처럼
차갑고 까칠해진
그대
다가설 수 없는
위험표지판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표정
무표정으로
한 곳만 바라보네
엉뚱한 낙서만 하네
칼바람 몰아치는 가슴
심장이 떨어지네
한 사람이
떠나간다는 것은
연습이 필요 없다는 듯
별과 태양의 거리만큼
무관심한 사람 되어
그대
깨진 유리구슬처럼
아프게 하네
곽상희, 너를 기다리며
나는
내 속에 아득 깃들어 있는
너를 기다린다
조금 전 하늘에서는
너의 살점 뚝뚝 뜯어내듯 함박눈이 쏟아졌다
지금 뜬금없이 네가 가버린 저녁 하늘
저 편 어딘가에서는
붉은 장미꽃의 잔치가 한창일 것이다
흰 복사 꽃 등불이 꺼진 이 편 하늘이
누군가를 위해 앓고 있다
한평생 말 못하는 벙어리의 가슴
저랬을까
배달부가 미처 끝내지 못한
내 우편함 속에는 너를 기다리는
내 편지들의 눈물방울이
장미를 피우기 위해
가시기둥을 만들어
가즈런히 땅으로 내려와 꽂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