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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증소설]7월 22일
게시물ID : humorbest_71987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PF*any
추천 : 19
조회수 : 965회
댓글수 : 3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3/07/27 11:30:47
원본글 작성시간 : 2013/07/22 18:15:55

비 오는데 어딜 나가려고 그래.

베게 하나 받치고 벽에 기대어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어머니가 심드렁하게 말을 던졌다. 어머니에게 들은 첫마디라는 것에 조금 울컥하여 신발을 신다말고 어머니를 보았다. 그럼 나가지 말까요. 그 말이 파도위의 배처럼 올라왔다 가라 않는다. 나갈 준비를 하는 내 기척에 잠이 깬 어머니는 거실로 나와 앉았지만 잠이 가시지 않았는지 젖은 행주처럼 늘어져 있었다. TV에는 어젯밤 했던 드라마가 틀어져 있었다. 어머니는 아침을 위해 삼사의 한 달 VOD 시청권을 꼬박꼬박 지불하고 있었다. 하지만 TV속 배우가 울어도 화내도, 어머니의 눈은 핸드폰 위에 고정 되어있었다. 내 죄가 있으니 그 돈이 아깝지 않냐 묻지는 못한다. 다른 말은 못하고, 다녀오겠습니다. 인사하고 집을 나왔다.

장마였다. 어제도 엊그제도 비가 왔고 나는 나갔다. 한 발 내딛을 때마다 바지가 젖어 들었다. 등에 맨 가방이 걱정 되 우산을 뒤로 젖힌 탓인지 안경에 물이 떨어졌다. 걷기 싫을 정도의 비였다. 그렇다고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어머니가 한 말은 나가지 말라한 것이 아니라, 어딜 그렇게 다니냐 묻는 것이겠지만, 어머니도 내가 도서관에 간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다. 도서관 앞에서 담배 피는 모습을, 어머니는 출근하는 버스 안에서 여러 번 목격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너 아직도 담배 못 끊었냐고 채근 하시곤 했다. 30분 걸리는 길을, 난 매일같이 걸었다. 비가 도서관에 가지 말아야할 이유는 못 된다.

 

새로 지어진 도서관은 인기가 좋았다. 의자는 오래 앉아있기 좋게 푹신한 것들뿐이었고, 천장에 붙어있는 에어컨은 기분 좋은 공기를 내리 깔았다. 다른 오래된 도서관들 보다 작았고, 텅 빈 책장이 반 넘게 있었지만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문을 연지 30분밖에 되지 않았지만 60자리 중 30자리는 넘게 사람이 앉아 있었다. 언제나 일직 나오는 신문 보는 노인 몇 사람을 빼면, 대부분은 방학을 맞은, 대학생이나 고등학생들이었다. 대학생들은 토익 책이나 전공 책을, 고등학생은 수능 문제지를 올려놓았기에 구분하기 쉬웠다. 친구들과 삼삼오오 몰려온 고등학생의 옆자리는 아무래도 피하게 된다. 대학생의 화려한 책상 옆에, 책장에서 금방 뽑아온 소설 한 권을 올려놓았다.

길 건너 편의점으로 가 행사하는 캔 커피를 샀다. 통신사 할인도 착실하게 받았다. 처마 밑에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아침용으로 하나를 땄다. 남은 하나는 점심 몫이었다. 다시 책상으로 돌아온 나는 캔 커피를 올려두고 책을 펼쳐들었다.

어쩐지 익숙한 작가와 책 이름이었다. 익숙하기만 하다면 안 읽은 것이다. 요즘 읽히지는 않는 명작들이었다. 둘러보다 익숙한 느낌이 들면 가져와 읽었다. 이번에도 역시 틀리지 않았다. 재미있다, 라는 단어 하나로 축약할 수 있는 책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펜을 끄적이는 소리, 기침소리 같은 것들이 멀어졌다.

딸깍

집중이 형광등 아래 모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나는 당황해 고개를 들고 두리번거렸다. 원인은 옆자리에 여자였다. 내가 자리에 앉을 때만 해도 남자였었다. 언제 바뀌었는지 알 수 없었다. 여자는 조용히 한 모금 마시고 조심스럽게 자신 앞에 캔 커피를 내려놓았다. 난 멍하니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여자는 미간을 찌푸리고 날 흘겨보았다. 캔 따는 소리 하나가지고 뭘 그러냐고, 아니면 자리만 있었다면 너 같은 놈 옆엔 앉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난 다시 책으로 돌아간다. 말을 하는 게 가장 좋을 테지만 오늘은 아무 말도 하기 싫었다.

한번 자취를 감춘 집중은 다시 찾기 힘들었다. 몇 문장 못 읽고 창밖을 시계를 찾았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고 12시 언저리의 시침이 크게 변하는 일도 없었다. 간혹 여자와 눈을 마주치기도 했다. 여자는 그때마다 더 불쾌해 했다. 어떻게든 끝까지 읽고 싶었지만 결국 다른 책을 찾기로 했다. 안나 카레니나를 찾아 러시아로 갔지만 없었다. 프랑스, 독일을 둘러보고 영미 권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찾았지만 또 없었다. 누군가 영화를 본 것 같았다. 일본까지 지나쳤지만 마음에 드는 책을 찾지 못했다. 내가 너무 빨리 지나쳐 온 것이 아닌가 반성하며 중국 책장을 둘러보았다. 위화 어디서 들어본 이름 이었다. 하지만 43일 사건이란 책은 알지 못했다. 잠깐 훑어보기 위해 책을 꺼냈다. 이 책은 읽어선 안 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책이 무겁게 느껴졌다. 또 한 구석의 마음으론 더 이상의 선택권은 없다고,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불편한 마음으론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어서 대출을 받았다. 내가 우산과 가방을 들자 여자가 안도하는 게 눈에 뻔히 보였다. 선물 한 걸로 치자, 행사에 할인에 따지고 보면 오백 원도 안 되는 돈 때문에 민망을 주기도 싫었다.

 

집에 도착하니 겨우 한 시를 넘은 시각이었다. 어머니는 계시지 않았다. 세탁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청소를 하셨는지 집안이 말끔했다. 내 몫으로 남겨져 있던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걷고, 널었다. 어머니가 하지 않은 구석의 청소까지 하고나니 세시였다. TV를 틀었다. 각종 재방송들 중에 어느 것 하나 볼 것을 찾지 못했다. 어물쩍 네 시가 됐다.

컴퓨터를 켰다. 오유를 보고 게임을 했다. 이제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햄을 볶고 맥주를 찾았다. 어머니가 해놓고 간, 된장찌개는 내일 아침에 먹을 생각이었다.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아직 흐렸다. 오늘 날씨에 맞추어 MOT의 노래를 틀어 놓았다. 아침의 어머니처럼 벽에 기대어 앉아 빌려온 책을 펼쳤다.

맥주를 한 모금 마셨고 조용히 내려놓았다. 43일이 어떤 날인지 궁금해 하며 책장을 넘겼다. 한 곡이 끝나고 무작위의 다음 곡이 나왔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어제가 내 생일이었어."
 그 말을 들은 그들은 모두 벌떡 일어나더니 벌컥 화를 내며 그
에게 욕을 퍼부었다. 그러고는 어째서 알리지 않았느냐고 따졌
다. 그들은 주머니를 뒤졌다. 맥주 한 병 정도는 충분히 살 수 있
는 돈이 모였다.

맥주를 들었다. 다시 한 모금, 또 한 모금.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노래가 같은 곡을 반복한다. 맥주가 떨어졌다. 남은 돈을 보기 위해 지갑을 본다.

 제목 없음.jpg

먼저 말하기 싫었는데, 오늘 내 생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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