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변호인> 끝 부분에서, "데모로 바꿀 수 있을 만큼 세상은 그렇게 말랑말랑하지 않다"던 변호사 송우석은 스스로 데모의 선두에 선다. 부산의 1987년 6월 항쟁을 그린 장면이다. <변호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삶에서 모티브를 따온 영화이지만, 달리 보면 1987년 6월의 시대정신을 그린 영화이기도 하다. 주인공 송우석이 변화하는 과정은 광주의 외로운 저항 이후 7년 동안 한국 사회가 겪은 고통스러운 성숙의 시간을 압축한 게 아니겠는가.
<변호인>의 잔상 때문인지 요즘 새삼스레 87년 6월의 기억이 아프게 다가온다. 6월 항쟁 20주년을 기리던 2007년에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간 한국 사회가 87년 준혁명의 성과가 무색하게 퇴행에 퇴행을 거듭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박종철 열사의 기일(1월 14일)을 맞아 마음은 더욱 무겁기만 하고, 연세대학교 캠퍼스의 이한열 열사 동산이 백양로 지하 주차장 건설 소동으로 훼손되었다는 소식도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 우리의 6월이 송두리째 짓밟히는 것만 같다.
이러니 곳곳에서 87년 6월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들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그 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한 40대 이상(민주화 세대)에서 그렇다. 1987년으로 돌아가자! 6월이여, 다시 한 번!
그런데 이 대목에서 좀 딴죽을 걸고 싶어진다. 우리의 6월은 과연 영광스럽기만 한가? 87년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정말 역사의 후퇴에 맞서 싸울 수 있을까? 나의 답은 '아니요'다. 87년 6월의 시대정신은 이제 녹슨 무기일 뿐이다. 왜 그러한가?
▲ 영화 <변호인>의 한 장면. ⓒ위더스필름
무엇보다도 87년 6월의 성과가 다름 아니라 지금 우리 발목을 조이는 족쇄,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 성과란 대통령제와 국회의원 소선거구제가 결합된 정치 제도다. 요즘도 민주화 세대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으로 제6공화국을 연 것을 자신들의 역사적 성취로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있다. 이 세대가 한국 사회의 중심에서 물러나기 전까지는 대통령제에 손을 대는 개헌은 불가능하다는 게 정설이 될 정도다.
"직선제 쟁취"를 외치던 6월의 광장에서 민주주의는 곧 '대결'의 다른 말이었다. 군부 독재 정권과 그에 맞선 다수 대중 사이의 대결. 대통령 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꾸고 국회의원 선거의 중선거구제를 소선거구제로 바꾸는 것은 이 대결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정치 제도를 만드는 일이었다. 승자와 패자가 명확히 갈릴 것이고, 승자의 자리는 당연히 반독재 민주 세력이 차지할 터였다. 당시 반독재 세력의 대중적 지도자였던 김영삼, 김대중이 그렇게 생각했고, 학생 운동 내 다수파의 "직선제 쟁취" 구호가 가장 시의적절하다고 여긴 거리의 시민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쟁취한 대통령 직선제의 결과는 애초의 기대와는 다른 것이었다. 그해 말 대선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은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게임의 규칙(대결 구도를 양자 대결로 단순화해야 한다는)을 스스로 어김으로써 패배를 자초했다.
그 후 김영삼, 김대중 모두 이 규칙에 부합하기 위해 예전의 적들과 손을 잡아야 했다. 승자 독식 게임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독재 대 민주'라는 명쾌한 대결 구도와는 거리가 꽤 멀어졌다. 김영삼, 김대중 둘 다 군부 독재 잔당들과 타협한 덕분에 87년의 메아리는 점점 더 구질서의 강력한 관성에 자리를 내주었다. 가장 선명한 '대결'을 위해 선택한 정치 체제가, 역설적으로, 가장 추악한 '타협'을 강요한 것이다.
이 때문에 87년 6월에 우리가 놓친 것은 민주주의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승자 아니면 패자를 낳는 대결의 민주주의와는 다른 민주주의. 그것은 바로 합의의 민주주의, 즉 대중의 의견 분포를 비례적으로 반영하고 이들 의견의 잠정적 종합을 만들어내는 민주주의다. 이것은 완전 정당 명부 비례 대표제(독일식이든 스웨덴식이든)와 내각제(박동천 전북대학교 교수가 <프레시안>에 발표한 글 "'제왕적 대통령제', 어떻게 끝낼 것인가?"에서 주장한 것처럼 '의회제'라고 하는 게 더 맞겠지만, 일단은 널리 쓰이는 용어를 사용하겠다)가 결합된 정치 제도를 통해 가장 잘 구현된다. (☞관련 기사 : '제왕적 대통령제', 어떻게 끝낼 것인가?)
'합의'라고 해서 이것을 대결을 배제한 타협이라고만 이해하면 안 된다. 오히려 합의의 민주주의에서 현대 사회의 대결들은 훨씬 더 효과적으로 제도 정치에 반영된다. '독재 대 민주'식의 선명한 양자 대결 구도는 극히 예외적인 것일 뿐이다. 현실을 지배하는 것은 서로 교차하는 다양한 대립선들이다.
계급 대립만 하더라도 그렇다. 교조적 마르크스주의가 예상하듯이 사회가 단 둘로 쪼개지는 법은 없다. 항상 둘보다는 더 많은 계급이 존재하고, 다시 더 다양한 계층 그리고 보다 복잡하게는 이들과 교차하는 또 다른 여러 집단으로 나뉜다. 제도 정치에서 이들이 제대로 대결하자면 일단 이들 각자가 비례적으로 대표되어야 한다. 소선거구제는 그럴 수 없다. 비례 대표제에서만 이게 가능하다. 그래서 87년 이후에도 이 나라에서 정치는 항상 사회 현실과 괴리되어 왔다.
정치 무대에 제대로 대표되지 못하므로 제대로 대결할 수도 없다. 제대로 대결하지 못하므로 사실 합의도 없다. 격렬한 쟁투와 토론 끝에 도달한 잠정 결론이라는 의미의 '합의' 같은 것은 없다. 오직 승자 독식 게임에서 승리한 세력이 '다수'를 자처하며 행사한 강압이 있을 뿐이다. 이런 식으로 87년 이후의 정권들은 금융 개방을 밀어붙였고, 구조조정과 사유화를 밀어붙였으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4대강 사업을 밀어붙였고, 이제는 철도, 의료까지 포함해 사유화의 마침표를 찍으려 하고 있다.
이제 민주화 세대는 대통령 직선제 쟁취의 추억에서 벗어나야 한다. 6공화국 정치 체제, 즉 대통령제+소선거구제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한다. 정말 박근혜 정권에 치가 떨린다면 이런 정권이 등장하도록 몰아간 게임의 규칙을 뒤바꿀 생각을 해야 한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 했다. 민주화 세대가 앞장서서 내각제+완전 정당 명부 비례 대표제로 전향해야 한다. 이것 없이는 "박근혜 퇴진" 구호도 공허할 따름이다.
그러자면 결국 개헌을 해야 한다. 요즘 새누리당도, 민주당도 떠드는 개헌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87년의 또 다른 심각한 한계와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대중적인 제헌 절차가 부재한, 위로부터의 개헌이었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 헌법, 제6공화국 헌법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6월 항쟁이 있기 전에 선출된 국회가 새 헌법을 제정했다. 새 공화국의 틀을 짜는 데에 6월 항쟁의 타도 대상이었던 민주정의당이 최대 다수당으로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이야기다. 87년을 '준혁명'이라 하기도 뭣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6월 항쟁의 승전가를 처음 울리던 그 순간에 이미 반혁명이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제대로 하려면 제헌 의회가 있어야 했다. 한국에서는 학생 운동 내 소수파의 구호 정도로만 취급받은 '제헌 의회 소집'이 이뤄져야 했다. 우리와 같은 시기에 군부 독재를 끝내고 민주화를 시작한 브라질은 실제로 제헌 의회를 새로 구성해서 헌법을 제정했다. 현재 브라질 집권당인 노동자당은 바로 이 제헌 의회에서 처음 두각을 나타내 민주화 이후의 대안 세력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87년 6월 이후의 한국 사회는 이런 기회를 갖지 못했다.
사실 이제는 제헌 의회만으로도 부족하다. 핵심은 대중의 적극적인 참여로 새 헌법 질서를 짜야 한다는 것이다. 21세기의 발전 수준에 맞추자면 제헌 의회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직접적인 대중 참여도 필요할 것이다. 이런 과정 없이는 어떠한 개헌도 무의미하다. 한국 사회가 진일보하는 계기가 될 수 없다.
이게 우리의 6월이 놓쳤던 것들이다.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가 거대한 장벽에 부딪혀 우리 모두 87년을 다시 목 놓아 부르고 있지만, 이 장벽은 사실 87년의 또 다른 산물들이다.
그래서 6월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6월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박근혜 정권'으로 집약되는 현 질서도 극복할 수 있다. '87년 6월'을 넘어서야 '박근혜 정권'을 넘어설 수도 있다.
/장석준 노동당 부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