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가 본격적으로 유대인을 학살하기 시작한 것은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하면서부터이다. 하인리히 히믈러는 SS특별행동부대(SS Einsatzgruppen)을 A, B, C, D의 4개 지대로 편성하여 진격하는 국방군의 뒤를 따라 소련 영내에서 각종 처형임무에 투입하였다. 이들이 처형한 이들은 유대인, 공산주의자, 정치장교, 공산청년동맹 소속 공산주의계 청년 등이었다. 처음 이들의 처형 방법은 직접 총살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사람들을 총살했지만, 한계도 분명했다. 우선 처형 속도가 문제였으며 이와 더불어 탄약 문제도 심각했다. 둘째 부대원들에게서 심리적인 부작용 현상이 발견되었다. 이런 문제에 직면한 히믈러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할 것을 지시했다. 여러가지 방법 중에 S트럭이 실험되었다. 자동차 배기가스를 이용한 S트럭은 불결한 결과(배기가스 중독에 의한 질식으로 인한 구토 및 똥 ,오줌 등의 배설)로 인해 처형대원들의 불만을 샀고, 다시 기존 강제수용소와 S트럭에서 사용한 가스를 이용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 결과가 독가스를 이용한 유대인 학살이라는 범죄이다
수감자들은 매우 좁은 크기의 방에서 생활했다. 이 방은 너무나 좁아서 일어서 있을 수가 없었다. 최초의 수용자들이 아우슈비츠에 온 것은 1940년 6월로, 폴란드 양심수 728명이 첫 수용자들이었다. 이후 아우슈비츠로 보내진 폴란드인 수용자들은 약 15만명이며, 이중 7만 5천명이 죽은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1941년 9월, 소련군 포로와 유대인 수용자들이 처음으로 독가스실에서 학살당한 만행이 아우슈비츠에서의 첫 학살이었다. 독가스실에서는 한 번에 약 2,000여명의 수용자가 학살당했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노동력이 없는 노인과 여성,그리고 어린이들이었는데, 수용소 도착즉시 선별되어 보내졌다. 독가스실은 대개 샤워실의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나치는 학살 피해자들에게 샤워를 하라고 하여 옷을 벗게 한 뒤, 가스실에 보내어 학살하였다. 사용된 독가스는 효과가 빨리 나타나는 치클론 B였는데, 제조사인 훽스트사는 전후에 나치의 유대인 학살가담전과때문에 도덕성에 상처를 받았다. 실례로 훽스트사는 1990년대 태아를 낙태시키는 약을 제조했다가 '나치독일시절에는 유대인 학살에 가담하더니, 이제는 태아를 살해할 생각이냐'는 거센 비판을 받았다.[2] 학살 피해자들의 시체는 시체 소각로에서 대량으로 불태워졌는데 하루에 약 1,500~2,000구의 시체가 소각되었고, 이들의 옷과 신발은 분류되었다. 또한 수용자들의 머리카락을 잘라 카펫과 가발을 만들었다. 이러한 나치의 만행은 현재 독일 역사교과서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기존에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한 사람은 약 400만명이며 이 중에서 약 250만명이 유대인이라고 알려져왔다. 처음에 이 수용소를 해방한 옛 소련군의 발표였다. 그러나 이 숫자에 대한 반론도 있다. "과장되고 꾸며낸 얘기가 많다"는 제목으로 씌여진 뉴스위크지 1995년 1월 18일 자의 기사[3] 에 의하면,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사람은 유대인을 포함하여 110만 ~ 150만명으로 추산했으며, 가장 많은 희생자가 유태인인 것은 분명하지만, 정확하게 몇 명이나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유태인 외에 나머지 희생자들은 폴란드 양심수, 옛 소련군 포로(주로 정치장교), 집시민족 등이었다. 이어 2005년 아우슈비츠 해방 60주년 행사를 알리는 기사에서는 유태인 희생자 수를 100만명으로 쓰고 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볼 때 세계적으로 극소수인 홀로코스트 수정주의자들을 제외하면 수백만명의 유태인이 죽었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