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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부여扶餘여...
게시물ID : history_721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고려
추천 : 10
조회수 : 1015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01/15 19:36:12

요사이 저는 부여에 빠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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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세기부터 존재했고 / 고구려와 백제의 뿌리이자 / 북만주의 강국이었고 /
고조선을 이었던 / 흰옷을 입었던 우리 조상 / 부여.

 

평원에 위치하여 반유목 반농경을 하던 부여는

서쪽으로는 선비족들이 남쪽으로는 산악에 의지한 고구려가

치고 올라오면서 쇠퇴했습니다.

 

짧은 기록상에 남은 이름이지만 저는 부여가 급속히 기운 계기였던
346년 선비족 침입 때, 생포되어 끌려갔던 부여왕 <부여현玄>이 인상에 깊게 남습니다.
그 심정과 광경이 사극의 무거운 한 장면처럼 상상이 되네요.
 
346년 선비족의 침입으로 처참히 짓밟히고 부여왕이 끌려간 이후 부여인들은
일부는 요서와 중원 등지로 끌려가고, 일부는 한반도 남부와 왜 열도로 들어갔죠.
옛 부여땅에 잔존한 세력은 498년 문자명왕 때 고구려에 귀부하고,
일부는 송화강과 눈강을 건너 두막루를 세워서 8세기까지 유지되다가 발해와 흑수말갈에 흡수됩니다.

 

자... 요서와 중국 등지로 끌려간 부여인들은

부여의 이름을 유지한 채 5호16국에서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일단 부여왕 <부여현(玄)>이 선비족에 끌려갔으나 왕실을 유지를 시켜준 것으로 짐작됩니다.

(요서지역에서 단순한 포로집단이 아닌 대규모의 부여의 집단유적유물이 발견되기도 했죠.)
그 아들인지 손자인지 <부여울(蔚)>은 후연에서 부여왕으로 책봉되어 장군으로 활동했습니다.

부여울은 전진의 침입시 선비족 전연의 수도 성문을 열어 공을 세워 전진에서도 높은 위치를 유지하고

후연 건국에도 크게 기여했던 인물이었죠. 


그 밖에 전연에서 활동한 <부여원(元)>, 남연에서 활동한 <부여치>,

후연에서 활동한 <부여화(和)>, 그리고 <부여숭(嵩)>-<부여숭(崇)> 부자(父子),

385년 후연에서 반란을 일으켜 요서지역을 장악하고 계(북경)를 약탈했던 <부여암(巖)>,

(요서를 장악했던 부여암이 3~4개월 만에 진압되고 처형된 해가

백제 침류왕의 짧은치세 급작스런 서거와 시기가 겹칩니다 ㄷㄷ)

역시 399년 모용씨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된 <부여초(超)>, 등등

(산동지방에서 활동한 벽려혼은 추측일 뿐이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왠지 모르지만 백제왕들의 이름으로
성(姓)이 <부여>인 왕들이 나타난 것도 그 이후(346년 부여의 와해)구요.
(근초고왕 부여구, 개로왕 부여경, 무령왕 부여융, 위덕왕 부여창 등)


특히, 최초로 부여씨였다는 기록이 남은 근초고왕의 즉위년도도 346년입니다. ㄷㄷ

(아마 부여유민 일부가 백제로 들어가 왕가를 교체한 것이 아닐까..합니다.

천오백여년의 천황가의 혈통도 몇몇기록에서 혈통이 교체되지 않았나 하며 중간중간 의심되듯이,

900년 고구려, 700년 백제, 1000년 신라도 역시 만세일계로만

철저히 그 혈통이 지켜져서 이어지진 않았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고구려는 <부여의 건국자 동명왕 신화>를 차용하여 <고구려의 건국자 추모왕 신화>를 꾸몄고,

백제는 성왕 때 나라이름을 <남부여>로 고쳤습니다.

서로 국왕을 한 번씩 전사시켰을 정도로 경쟁했던 고구려와 백제입니다.

(근구수태자가 고국원왕을, 장수왕이 개로왕을 전사시켰습니다.)

서로 부여의 적통임을 내세웠죠. 아.. 부여(扶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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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그냥 한번 보시라구.. 링ㅋ

http://youtu.be/2TjN0cqPyr8

http://youtu.be/2KJrVJgSq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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