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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비잔티움 제국사(4) - 디오클과 아이들
게시물ID : history_722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리볼버오셀롯
추천 : 4
조회수 : 499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01/15 20:42:25

http://cafe.daum.net/shogun의 마법의활 님이 쓰신 글입니다.

 

 

 

로마 정치판에 새로운 혁명을 몰고온 ‘디오클과 아이들’

그러나 이들이 처음부터 4인조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애초에는 듀엣이었고,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한 때는 3인조로 편성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서태지와 아이들이 그랬듯, 디오클과 아이들이 등장하기 전에도 그들이 등장할 분위기를 무르익게 한 박남정, 현진영, 소방차, 심신 같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 로마의 박남정들이 무슨 일을 하였는지는 전편을 참조하시면 되겠합니다. )

이번과 다음 시리즈 편에서는 디오클과 아이들의 데뷔부터 은퇴까지의 활약사를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한 사람이 작곡도 하고 편곡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악기도 연주하는 체제가 지극히 비효율적이라는 판단을 하였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에 막시미아누스라는 친구와 함께 듀엣을 조직하여 나타나게 됩니다. 그는 286년에 막시미아누스를 자신과 동격인 “아우구스투스”로 승격시켰습니다.

사실 공동 황제 제도는 예전에도 전례는 있었으나, 그때의 공동 황제는 선임 황제 뒤에서 물이나 갖다주거나, 아니면 가르침이나 받는 제자 정도의 위치였습니다.

그러나 이 막시미아누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당당히 디오클레티아누스와 한 무대에서 춤을 추고 노래도 불렀고 안무도 나름껏 했던 것입니다. 작곡 편곡 및 리더 역할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여전히 담당했구요.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 그룹의 이름도 지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자신은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요비우스 - 제우스라는 뜻” 가 되었고, 막시미아누스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헤르쿨레스”가 되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제우스와 헤라클레스”라고 해야할까? 요즘보면 이것같이 촌스런 이름이 없지만, 당대에는 꽤나 진지하게 받아들여진 조치였습니다.

이 듀엣 그룹의 활약은 아주 대단했습니다. 그 전 프로부스나 아우렐리아누스 때에는 한 곳에서 문제를 해결하면 한 곳에서 곧바로 문제가 터져서 황제가 헐레벌떡 제국 전역을 뛰어다니다가 측근에게 암살당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래놓고는 또 황제 자리를 놓고 다투는 사태가 벌어지는 등의 악순환이 벌어졌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아예 황제를 둘로 만들어 담당 지역을 나누고 행동 반경을 줄임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 이것으로 인해, 전전편 아우게아스의 외양간에서 언급한 악순환의 기계에서, "정치 불안정"을 어느 정도 해결하게 됩니다.)

‘디오클과 아이들’의 전신인 ‘제우스와 헤라클레스’가 선보인 첫 공연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당시는 극에 다다른 착취 때문에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갈리아에서 “바가우다이 반란”이라는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프랑크 족은 후대의 노르만족이 그랬던 것처럼 배를 타고 도버 해협까지도 돌파하여 지브롤터까지 진출해가며 해변 지역을 닥치는 데로 약탈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프랑크족들이 당하는 입장이 되지만)

우선은 헤라클레스께서 먼저 출동하셔서 바가우다이 반란을 무참하도록 짓밟았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준 지침을 문자 그대로 실현하여, 어찌나 심하게 진압을 하고 현지 유력자들을 심하게 다루었던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막시미아누스를 “아니, 죽이란다고 다 죽여버렸어?” 하는 투로 나무랄 정도였습니다.

한편 프랑크 해적 문제는, 제국 해군을 대거 재편성하여 볼로뉴항에 해군 기지를 건설하고 브리타니아 군을 확충하는 것으로 해결하였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측은 파르티아가 그의 선임자 카루스 황제의 출격으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받은 바도 있어서, 당분간은 막시미아누스를 지원하며 기존 방어선을 재확인하는 데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제우스와 헤라클레스 그룹은 뜻하지 않은 액운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듀엣이 데뷔한 지 겨우 2년밖에 안되는 288년, 브리타니아와 갈리아 북변이 제국의 통제로부터 이탈하는 일이 벌어지고야 맙니다. 카라우시우스라는 자에 의한 일이었는데...

앞서 애기한 바와 같이, 막시미아누스는 볼로뉴에 해군 기지를 창설하여 그 대장으로 자기 부하였던 카라우시우스라는 갈리아인을 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카라우시우스는 재테크에도 특별한 관심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프랑크 해적이 도버 해협을 통과해서 노략질을 하도록 방임한 뒤, 재물과 사람을 싣고 돌아가려 하면 그제야 출동해서 해적 소탕을 하고 재물도 모두 빼앗아 자기 것으로 하는 기막힌 재테크 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카라우시우스의 이 행각을 들은 막시미아누스는 분노하여 앞뒤 재지도 않고 “사형!” 이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카라우시우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간 열심히 재테크해서 쌓아놓은 재산으로, 상여금을 대거 풀어 휘하 장병들의 환심을 샀습니다. 그리고는 그길로 곧장 배를 타고 브리타니아에 도착하여, 그곳의 부대를 모두 자기 밑으로 흡수하고야 맙니다.

(성경에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그대로였습니다.)

카라우시우스는 곧 보랏빛 옷을 입고 아우구스투스를 자칭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브리타니아와 갈리아 북부 해변가는 제국으로부터 사실상 떨어져나가게 되었던 것이죠.

그러나..... 막시미아누스는 아마도 강경한 제압을 시도하고 싶었겠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 쪽에서 막았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 건방진 친구를 황제로 승인하여, 일단 이 사람을 그룹에 끌어들였습니다. 이것으로 인해 제국은 한동안 “분열되지 않은 유산”이라는 말을 지켜나갈 수 있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로써는 안정적으로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제국을 재건할 시간 여유만 가질 수 있다면, 2인조든 3인조든 썩 괜찮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더욱 중요합니다. 막시미아누스 밑에 있었을 때의 카라우시우스는 그저 부패한 여러 제국 관료나 장군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었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지 디오클레티아누스로부터 마지 못한 인정을 받은 후에는 통치자로써 상당한 역량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북방 칼레도니아로부터의 침략을 매우 성공적으로 방어하였고, 노략질을 하던 프랑크 족들을 포섭하여 제국 군대 (사실은 자기 휘하 군대겠지만) 에 끌어들였습니다. 그리고 각지의 조폐창을 건립하여 자기 얼굴과 이름이 새겨진 동전도 찍어내면서 매우 훌륭히 황제 노릇도 흉내냈습니다.

한편 시간을 번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많은 작업을 수행합니다만...... 그것에 대해서는 다음 다음 편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카라우시우스 쪽으로 돌아와보겠습니다. 어느덧 세월은 7년이 흘렀고, 점점 브리타니아는 카라우시우스의 왕국처럼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카라우시우스는 한 가지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저 음흉하고도 지혜로운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아예 새로운 판을 짜기로 마음먹고 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는 그동안 한가지 진리를 깨우치고 있었습니다.

“기왕 할바엔 역시 떼거지로 몰려나오는 게 낫겠어.”

카라우시우스가 성공에 도취하고 있는 사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새로운 멤버, 새로운 그룹 체계를 연구하고 있었던 겁니다.

서기 293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요비우스”라는 칭호 대신 “세니오르 - 선임” 칭호를 취했고, 막시미아누스는 “유니오르 - 후임” 황제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제우스와 헤라클레스” 그룹은 갑작스레 해체되었고, 드디어 “디오클과 아이들”이라는 그룹 체제가 선을 보이게 됩니다

사실 앞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선보인 동등한 두 황제가 위기 관리를 하는 체제는, 약 몇천년 앞서 앗시리아에서도 선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보다 한발 더 앞선 체제를 고안합니다.

그렇다면,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선보인 그룹 체제란?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각 “아우구스투스”가 “카이사르”를 임명하여, 서로가 방위 업무를 분담한 뒤 임기가 차면 “아우구스투스”들이 각 “카이사르”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새로이 “아우구스투스”가 된 자들은 또다시 자기 “카이사르”들을 임명하는 체제를 안출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후대에 “4두 정치 - 테트라키아” 로 유명한 체제였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그것과 동시에 이 카이사르들을 각각 아우구스투스의 딸들과 결혼시킴으로 인해, 카이사르들에게 권위를 부여함과 동시에 서로간의 유대 관계 또한 강화시키는 조치를 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제국의 황제 지망생들은, 들고 일어나기 전에 한번쯤 심각한 자기 성찰을 해야 했습니다. 황제가 되려면 저 강력한 네 실력자를 모조리 부수어야 한다는 부담을 안아야 했으니까.

일단 새로 등장할 멤버 둘에 관심을 기울여봅시다. 이들은 과연 누구였는가? “흰둥이 -클로루스”라는 별명을 가진 콘스탄티우스와 “양치기 -아르멘타리우스”라는 별명을 가진 갈레리우스가 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버림받은 자. 카라우시우스. 그로써는 순식간에 그룹에서 해고당한 격이 되어버렸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경쟁자를 내버려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갈리아-브리타니아를 막시미아누스로부터 양도받은 “흰둥이” 콘스탄티우스씨는 자기 나와바리를 무단으로 점거한 이 골칫덩이를 처리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제국에 산적한 황제 지망생들에게 좋은 시범 케이스를 보여준다는 의미도 있었던 거죠.

콘스탄티우스는 즉위한 해에 카라우시우스 정부의 심장부인 볼로뉴 항구를 공격하여, 육상으로부터 돌로 된 방파제를 구축하여 항구를 육해 양면에서 포위해버린다는 작전을 수행합니다.

허를 찔린 볼로뉴 항구는 그대로 포위되었고, 볼로뉴는 잠시 저항하다가 곧 항복합니다. 이로써 콘스탄티우스는 카라우시우스가 심혈을 기울여 키워놓은 함대와 병사를 그대로 접수하게 됩니다.

(그러게 돈으로 사귄 친구 놈들 오랫동안 믿을 게 못됩니다. )

콘스탄티우스는 카라우시우스의 함대를 가지고 브리타니아 봉쇄 작전에 들어가게 됩니다.

물론 그 와중에 가끔 기어들어오는 야만족들 퇴치도 병행했지요. 한편.....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라우시우스는 어기차게 저항했지만, 결국 그는 부하인 재무 관리 알렉투스에게 암살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알렉투스는 카라우시우스가 늘 안고 살아야 했던 문제를 마주쳐야 했습니다. 바다 건너에서 도사리고 있는 콘스탄티우스의 존재였습니다. 물론 알렉투스는 한참 후대의 헤롤드 왕이 그랬던 것처럼, 바다 건너에 대한 감시와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지만......

윌리엄이 그랬듯 콘스탄티우스도 결국은 브리타니아 정복에 성공합니다.

우선 콘스탄티우스는 볼로뉴 항에 해군을 집결시켜 전력을 알렉투스에게 과시한 후, 다른 부하 장군 아스클레피오도투스에게 군대를 딸려보내 따로이 브리타니아 서부 해안으로 상륙을 시켰습니다.

(그러고보면 노르만 컨퀘스트 때의 하랄 하르드라디는 동부 해안으로 침투를 했었지요. 그때의 하랄은 윌리엄과도 적대 관계였다는 점이 달랐지만. )

알렉투스에게는 참으로 운이 없게도 당시에는 악천후였던 지라 그의 해군은 콘스탄티우스의 군대가 브리타니아 서부에 상륙하는 것을 보지도 못했고, 당연히 저지도 못했습니다.

볼로뉴에 있는 콘스탄티우스의 대함대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던 알렉투스는, 청천 벽력같은 급보를 접합니다. 서쪽으로부터 대군이 다가오고 있다는 급보였습니다.

그나마 행군중 전투력을 보존하려 애썼던 칠팔백년 후의 헤롤드와는 달리, 알렉투스는 상당한 찌질이였던 모양입니다. 공포에 질린 그는 미친 듯이 휘하 병사들을 몰아대며 진격을 했다고 합니다. 물론 콘스탄티우스 군이 상륙하기 전에 먼저 침공한 측을 처리한다는 합리적인 판단에서 나온

조치였겠지만.....

병사들은 스타크래프트 마린이 아닌지라 미친듯이 클릭한다고 속도가 빨라지는 유닛이 아니었습니다.

음, 근데 이것도 스타크래프트와 비슷하려나?

적군과 마주쳤을 때의 알렉투스 군대는, 이미 행군 과정에서 상당한 낙오자가 발생한 터였고, 그나마 남은 병사도 체력이 심각하게 떨어진 상태여서, 이미 지휘관에 대한 믿음을 저버린 상태였습니다.

(스팀 팩을 좀 많이 썼었나봅니다. 아쉽게도 알렉투스 군대에는 메딕이 없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어렵지 않게 아스클레피오도투스의 군대는 참으로 허무하게도 손쉬운 승리를 알렉투스에게 거둡니다. 알렉투스 자신도 그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으며, 아스클레피오도투스는 브리타니아의 군대와 정부, 백성을 그대로 접수한 채 콘스탄티우스에게 보고만 하면 되었습니다.

이로써 약 10년에 가깝게 존재했던, 독립 국가 브리타니아는 다시금 제국의 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콘스탄티우스로써는 화려한 데뷔였습니다.

이제는 다른 멤버들도 알아봐야 할 차례겠지요. 다음 편에서는 갈레리우스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활약 그리고 꽤나 독특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판 “은퇴 선언”을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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