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가자들에게 주어진 원칙은 두가지였다.
1.살아남을 것.
2.조커를 죽일 것.
6번. 6번 연속으로 살아남으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
조커란 놈은 5번 지금까지 5번 연속으로 살아남은 놈이었다.
그 놈을 죽인 자가 살아남으면 그 자도 6번을 살아남은 것으로 인정되었다.
이름대로 '조커' 카드인셈이었다.
게임의 룰은 간단했다. 러시안 룰렛. 다만 쏠 사람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
확률게임이던 러시안 룰렛은 이 조건의 추가로 심리게임이 되었다. 그들은 이것을 코리안 룰렛이라 불렀다.
첫째날.
다른 참가들과 처음으로 만났다. 서로를 알아가기 위한 12시간이 주어졌다.
자기소개를 했다. 정치범 둘과 살인범 둘이었다. 한명은 자신에 대해선 아무말도 없었다.
나는 일종의 누명을 쓰고 이 곳에 들어왔다.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아무런 의미도 없어보이는 대화는 사실
자신이 조커로 보이지 않게 하기위한, 그리고 조커가 누군지 단서를 찾기위한
긴장으로 가득차있었다.
하지만 결국 아무 단서도 없었다. 당연한 결과다. 이 게임에서 5번을 살아남은 놈이다.
그렇게 아무런 단서도 없이 코리안 룰렛은 시작됐다.
순서는 랜덤이었다. 나는 운이 나쁘게도 첫번째...
서로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기에 순서대로 간편하게 ABCDEF라고 부르기로 했다.
B와 C는 정치범이고 D,E는 살인범이었다. F는 말이 적던 신중한 사내였다.
기본적으로 순서가 어떻든 러시안 룰렛에선 죽을 확률이 모두 동일하다.
첫번째가 죽을확률은 1/6.
두번째가 죽을 확률은 첫번째에서 총알 장전되어 있지 않을 확률 5/6와 두번째에서 총알이 장전되어있을 확률 1/5을 곱한
1/6. 같은 원리로 나머지 차례도 모두 같은 확률이다.
코리안 룰렛도 시작되기전엔 순서에 관계없이 자기차례에 총알이 장전되어있을 확률은 1/6이다.
하지만 러시안 룰렛은 시작 전에 누구를 쏠지 이미 정해져있는 반면, 코리안 룰렛에선 실시간으로 결정되었다.
순서가 지날수록 자신의 차례에 총알이 장전되어 있을 확률은 높아진다.
예를 들면 첫번째에서 총알이 없었다는 것이 확인되고 난 후에 두번째가 총알을 가질 확률은 1/5.
같은 원리로 세번째는 1/4, 네번째는 1/3, 다섯번째는 1/2, 마지막은 100%이다.
물론 마지막까지 총알이 발사되지 않는 경우는 드물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순서가 뒤로 갈수록 더욱 확실하게 결정할 수 있었다. 나는 1/6의 확신을 가지고 선택한다면
마지막은 100%확신을 가지고 선택한다.
그리고 내가 누군가를 죽이려 한다면, 그 누군가도 나를 죽이려 할 것이다.
이 게임이 돌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이다.
첫번째에서 총알이 없었다는 것이 확인된 후 두번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그는 1/5의 확률을 가지고 선택해야한다. 자신의 뒷차례에게 총을 겨눈다면
그도 분명히 자신에게 총을 겨눌터. 그렇다면 두번째는 그렇게 불확실한 선택을 하려고 할까?
결국 타겟이 되는 것은 이미 선택권을 잃은 첫번째. 바로 내가 된다.
아마 누구도 조커라는 확실한 증거가 없는 지금 상황에서 고려해봤을때,
세번째의 타겟도 군중심리에 따라 내가 될 확률이 높았다.
거기까지 가면 상황은 이미 끝이다. 네번째도, 다섯번째도, 여섯번째도 타겟은 내가 된다.
결국 5/6의 확률로 나는 죽게된다.
해결책이 필요했다.
"여러분, 저는 이번에 우승자가 되어도 5번 더 살아남을 자신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커를 죽이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단서도 있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를 겨눈다는 것은
서로간의 원한만 사는 일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나중에는 살아남기 위해 서로 싸워야 하겠지만 지금은 조커를 잡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약속드립니다. 누군가 조커로 밝혀지기전까지 저는 여러분에게 총을 겨누지 않겠습니다."
총을 들었다. 총구를 나의 관자놀이에 가져갔다. 1/6.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죽을 확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5/6의 확률을 1/6로 바꾼 것만으로도 큰 성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손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린다.
'딸깍'
총알은 들어있지 않았다.
성공이다. 이제 B에게 선택권이란 없다.
B가 지금 총을 겨눌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
하지만 나는 공개적으로 조커를 죽일 때까지 당신들을 해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를 겨눈다면 그는 자신이 조커임을 시인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물론 살아남기 위해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했을 뿐이라고 변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구도 조커란 단서가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다. 얼굴이 마음에 안든다는 이유만으로도 남에게 총을 겨눌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불확실하게나마 단서를 흘린다는 것은 다음 날에서의 죽음을 의미했다.
결국 그는 나처럼 자신을 겨눌 수 밖에 없다. 그는 사람의 심리에 민감한 정치인이었다.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팩트가 아니라 이미지이다. 그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겨눈다.
C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은 죽지 않았다.
D부터는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1/3의 확률. 목숨을 걸기엔 많이 위험해진 확률이다.
하지만 그는 우리에게 총을 겨눌 수 없다. 우리는 같은 판단을 내리고 서로를 해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에서
미약하게나마 유대감을 가졌다. 지금 우릴 겨눈다면 총알이 없다면 세 사람이, 총알이 장전되어있더라도 살아남은 두사람이 다음 날
D를 겨누게 될 것이다. 그건 최악의 상황이다.
그렇다면 E,F에게 총을 겨눌 수 있을까? 총알이 발사될 확률은 1/3.
발사되지 않는다면 쏘려던 사람은 무조건 자신을 향해서 총을 겨눌 것이다.
나머지 한사람도 십중팔구는 자신에게...
어쩔 수 없다. 그에게도 자신에게 총을 겨누는 선택지 밖에 남아있지 않다.
D가 총을 관자놀이에 가져간다. 방아쇠를 당긴다.
'탕'
D는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