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어짊을 베풀어 정치를 일으켜 세우다--세종대왕 취임사[일워펌]
게시물ID : sisa_48273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혼돈의강
추천 : 4
조회수 : 603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01/20 00:12:33





세종대왕이 성군인 이유...

원형질파괴
스크랩
대한민국 국민들을 대상으로 앙케이드 조사를 하면 "성웅 이순신 장군"과 더불어 메달권에 꾸준히 등장하는 인물이 "세종대왕"이다.
이렇듯 "세종대왕"은 국민적 사랑을 받는 역사적 인물임에는 틀림없으나, 그의 업적을 질문하면 "훈민정음 창제" 외에 답하는 이가 많지 않다.

이에 본농이 크게 분노하여 몇 가지를 간추려 이야기하고자 한다.


1. 먼저 세종대왕의 취임사 부터 보자.

"어짊을 베풀어 정치를 일으켜 세우다" <施仁發政>

※ 참고로, 요 말씀은 <맹자>에 나오는 발정시인<發政施仁>을 카피한 것이다.

요 취임사가 <맹자>를 카피한 것으로 보아, <맹자>의 유교적 왕도정치의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정치비전을 세우고, 제도를 세우고 베풀고 모범을 보여 동참하게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할 것이다.


2. 세종대왕의 인재관

"인재를 얻어 맡겼으면 의심하지 말것이며 의심이 있으면 맡기지 말아야 한다" <疑之勿任 任之勿疑>

세종대왕은 인재를 선발하는 과정에서 철저한 검증과 쓰는 과정에서는 '장점'을 취해 쓰되 인재를 보호해야 함을 역설했다.
집현전을 통해 인재를 '재교육'하고 배양하는 동시에 당대의 지식을 몽아 정책에 활용하는 싱크탱크로 활용했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세종대왕의 인재등용과 국정을 연결하는 매커니즘이 "토론방식"이였다는 것이다.

이와관련한 세종대왕의 일성을 들어보자.
"내가 임무를 잘 알지 못하니 좌의정, 우의정과 이조, 병조의 당상관과 함께 의논해서 벼슬을 제수하고자 한다".
지금으로 부터 600년 전에도 인재등용에 있어 "소통"의 중요함을 세종대왕은 알고 있던 것이다.

3. 세종대왕의 의사결정과정.
위에서 세종대왕의 국정현안에 대한 의사결정에 "토론"을 중요시 했다고 설명했다.
여기에선 이를 증명할 사건 하나를 알려주고자 한다.

이름하여 <파저강 토벌논쟁>!!!
요 사건을 간략히 요약하면 당시 당주지방과의 군사적 완충역할을 한다는 명목하에 생필품까지 받아갔던 만주족 오랑캐(여기에서 오랑캐는 부족이름이닭)추장인 이만주가 여연지역(백두산 일대)을 침략해 대규모 노략질을 하는 사건이 터졌다.
배신감 쩌는거쥐!
세종대왕 또한 크게 분노하여 이것을 기회로 여진족을 제압하고 북방영토를 개척하는 일타쌍피의 호기로 삼으려 했는데, 왠걸! 반대가 만만치 않았던거야.

반대이유가 뭔고 하니, 세종대왕의 이같은 계획이 실행되면 자칫 중국 아그들(당시 명나라)이 짱날 것이고 결국 백성을 보호하고자 한 일이 그 일대 백성들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는 논리였던거쥐.
그래서 요 건으로 3차에 걸친 <끝장토론>이 벌어진겨.
요때, 찬성측패널로 참석한 세종대왕께서 반대측패널이였던 최윤덕을 설득시키는데 성공했다.

세종실록에 보면 유독 이런 반대측과의 토론과 설득에 대한 기록들이 많다는 것이 세종대왕이 비록 국왕이기는 하나 국정을 운영함에 토론을 중요시 했음을 반증한다 할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세종대왕의 토론원칙은 반대측 패널을 반드시 토론에 끼워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였다.


4. 세종대왕의 복지마인드.

당시에 출산휴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 다들 크게 놀랄듯 싶다.
세종대왕은 관청의 여자노비에게 출산 후 휴가를 100일로 늘려주고 <출산 전 휴가>제도를 도입했을 뿐만이 아니라. 출산 1개원 전부터 산모의 복무를 면제하도록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남편의 출산휴가>제도까지도 도입했다.
기록에 의하면 <남편의 출산휴가>기간은 한 달 정도였다 한다.

노비의 출산제도를 개선하였고, 헌릉 주변에 밟힌 곡식에 대해 3배로 보상해줄 것을 지시하였으며, 재생원(고아원)제도를 보완하는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정책에 늘 신경을 썼었다.


5. 세종대왕의 국정운영철학.

"민생들이 하려고 하는 일을 혼란스럽지 않게 하려고 임금을 세워서 다스리게 했다"

세종대왕은 천재지변 등 숙명적인 것을 '한'이라 하였고, 피할 수 있는 것을 피하지 못해 당하는 고통을 '원'이라 구분하여 정치가 '한'까지는 손대지 못하지만 '원'은 없도록 해야 한다는 국정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백성들이 '원'이 없게 하기 위해 '호소'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것을 지시하였고, 백성 스스로 민유방본<民惟邦本>이 되도록 지시하였다.
이를 위해 시간이라는 정보와 문자라는 권력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한 것이다.


쓰다보니 몇 년전 서거하신 어떤 분이 오버랩되어 맴이 아려온다.
여하튼 왜 세종대왕을 성군이라 추앙하는지 이해가 되었길 바란다
.

http://ilwar.com/history/64651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