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덕에 올라서 보았다. 그토록 오랜 세월과 많은 투쟁을 거친 지금, 나는 이해했다.
온 세상이 폭발하기 직전의 폼페이임을 알려 준 죄악의 도시는 축복 받을 지어다! 여자들은
뻔뻔스럽고, 남자들은 믿음직 하지 못하며, 악과 불의와 질병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무슨
쓸모가 있는가? 모든 약삭빠른 장사꾼들과, 식인종 살인자들과, 신을 싼값으로 팔아치우는
성직자들과, 뚜쟁이들과 내시들. 그들은 왜 살아야하는가? 술집과, 공장과, 매음굴에서
부모가 차지 했던 자리를 왜 어린아이들이 자라서 메워야 하는가? 이런 모든 문제가 길을 가로막아
혼이 통과하지 못한다. 그나마 세상이 한떄 지녔던 혼마저 사상과, 종교와, 예술과 공예, 과학,
법률 따위의 찬란한 문명을 창조하느라고 소모 되었다. 이제 세계는 기운이 빠졌다. 야만인들로 하여금
와서 막힌 길을 치우고, 혼이 지나갈 강바닥을 다지게 하라.
나는 압박당하고 굶주린 군중이 과음 과식한 주인들이 멍청하게 둘러 앉은 묵직한 식탁으로
쳐들어가는 장면을 본다. 키메라는 공격하는 자들을 자극하고, 자리에 앉은 자들도 갑자기 소음을
듣는다. 그들은 시선을 돌린다. 처음에 그들은 웃다가, 다음에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 초조하게
눈을 내리깔고, 그들의 노예들과 하녀들과 소작인들과 일꾼들이 맨발로 봉기했음을 깨닫는다.
성스러운 순간이다! 인간이 거침없이 상승하는 이런 순간에 사상과, 예술과, 행동의 가장 위대한
업적들이 이룩되었다. 주인들도 단합하여 저항한다. 하지만 우리시대 전체가 그들에게 불리하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문명을 창조하고 생명력을 상실했다. 그들이 마지막 형태의 의무를
치를 순간이 왔으니, 그들은 사라져야 한다.
새 식탁이 무거워지자마자 이번에는 노예들이 살찌고 멍청해지기 시작한다. 굶주림과 키메라 같은
영혼의 장군들이 또다시 앞장을 서고, 억눌린 다른 군중이 흙에서 봉기한다. 그리고 이런
규칙적인 순환은 쉬지않고 영원히 계속되리라.
이것은 법칙이며, 이렇게 삶은 스스로 새로워지며 전진한다.(사상과 문명도 생명체인데) 모든 생명체는
주변의 모든 것을 붙잡아 차지해서 동화시키고, 가능하다면 세계를 지배하려는 억누르지 못할 필요성을,
그리고 나아가서는 의무감을 느낀다. 새로운 사상이란 가장 굶주리고 움켜잡는 힘이 센 짐승이다.
하지만 또 다른 법이 활동하기 시작하면, 생명체가 널리 뻗어나가 다스리는 의무를 아무리 열심히
실천한다 해도, 그가 실천하는 만큼 몰락에도 가까워진다는 또 하나의 비정한 법칙도 동시에
힘을 발휘한다. 우주의 조화가 죽음이라고 여겨서 용서하지 않는 유일한 죄악은 아마도 지나친
오만함뿐이리라. 생명이 권력을 축적하면 멸망을 낳게 된다. 또한 생명체는 맡은 의무를
다했기 때문에 제거된다는 불가해한 사실도 존재한다. 의무를 완수하지 못했더라면 그것은
남들을 괴롭히거나 자신이 괴롭힘 당하지 않으며 훨씬 더 오랫동안 멍청히 살았으리라.
이러한 재앙의 의무는 생명체의 마음속에 깔려 있다가 위로 오르고 정복하는 사명을 일단
완수하고 나면, 다음번에 세계를 지배하고 싶어서 손을 들고 봉기하는 다른 생명체에게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사라져 버린다. 삶의 모든 분자(分子)는 굉장히 폭발적인 엘랑(비약,飛躍)을
지녔으며, 그런 분자는 삶의 추진력을 통째로 응축시켜 담아서, 조금만 충격을 주면 당장이라도
터져 버릴지 모른다. 삶은 이렇게 내적인 갈망을 해방시키며 나아간다.
이런 법칙은 처음에는 부당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우리들을 격분시킨다. 하지만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들은 감격하게 된다. 이 법칙 덕분에 야만적인 힘은 전능함을 상실한다. 이러한 조화의 법칙이
한편으로는 권리를 최대한으로 확대시키도록 충동질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전체>를 섬기기 위해
전진할때마다 그것이 자신의 개인적인 파멸을 향한 전진임을 상기시키기 떄문에, 강자는 교만과
뻔뻔스러움으로 불균형하게 비대해지지 않는다.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운명은 어디로 가는지 보지 못하게 그들의 눈을
가린다. 만일 그들이 보았다면 엘랑은 감소하리라.
나는 인간 활동의 순환 전체를 능력껏 모두 파악하고, 인류의 모든 파도를 어떤 바람이 치솟게
하는지 알아내려고 노력한다. 나는 작아서 눈에 띄지도 않는 거대한 원의 한조각인 내가 사는
시대를 살펴보고, 오늘날의 의무를 명확히 파악하기 위해 투쟁한다. 그가 살아가는 하루살이
삶 동안에 인간이 어떤 불멸성을 이룩할 방법은, 아마도 불멸의 흐름을 따르려고 노력함으로써
불멸해지는 길뿐인지도 모른다.
나는 투쟁에 몸을 던진 인간은 광물에서 식물로, 식물에서 동물로, 동물에서 인간으로 상승하고,
다음에는 자유를 위해 싸운다고 깊게 믿는다. 투쟁자는 모든 결정적인 시대에 새로운 모습을 지닌다.
그는 <정의! 행복! 자유!>라고 소리치면서 동지들에게 외칠 표어를 나눠주고 격려 하지만,
정의와 행복과 자유는 그럴수록 점점 더 멀어진다는 무서운 비밀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을 실현하려고 투쟁하는 모든 사람이 그의 이상을 이룩할 터이며, 그렇게만 되면
세계는 행복으로 넘칠 것이라고 믿는 현상은 옳기도 하거니와 도움이 된다. 이렇게 되면
혼은 꿋꿋한 마음과, 끝없는 상승을 위한 용기를 얻는다. 마차꾼이 말의 입에다 건초를
한줌 달아 놓는 셈이다. 무거운 짐을 실은 수레를 끌면서 말은 목을 길게 내뽑아 한입
먹어보려 하지만, 건초는 점점 더 멀어지기만 한다. 말은 건초에 닿으려고 애를 쓰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비탈을 오른다.
나는 벅찬 존경심을 느낀다. 이들 시커먼 군중 속에서 나는 비탈을 오르면서, 인류로 하여금
함께 오르자고 재촉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도시>를 똑똑히 보기 때문이다. 다른시대에
살았더라면 나는 당시에 상승하던 귀족과 공민과 제조업자와 상인들의 집단에서 이 <도시>
를 찾아내고는, 그들과 함께 어울렸으리라. 사람들은 그들보다 높은 목표를 향한 투쟁에
항상 얽메이기 떄문에 위로 밀고 올라가지만, 결국 지치고 나면 투쟁은 그들을 버리고
활력을 잃지않은 새로운 대상을 찾아 달려간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의 시대가 벌이는 영원한 공격을 돕고, 함께 일해야 할 의무를 따라야 한다.
오늘날 투쟁을 떠맡은 자들은 굶주리고 노예로 일하던 군중이다. 군중은 이렇게 비정한
<공격>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하찮은 지성이 이해하고, 평범한 필요성에
도움이 되게끔 투쟁에 자그마한 명칭을 붙힌다.
그들은 그것을 행복이니, 평등이니, 평화라고 부른다. 하지만 모습을 감춘 투쟁자는 민중을
격려하기 위해 이런 미끼를 던져놓고는, 이성과 육체를 뚫고 들어가 분노와 굶주림의
모든 현대적인 외침들로부터 자유라는 의미를 창조해 내려고 가혹하고 무자비 하게 싸운다.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살펴보는 일은 매우 위험하다. 투쟁자는 인간에게 관심이 없고,
사람들에게 불을 붙히는 불길에만 신경 쓴다는 끔찍한 비밀을 알아내고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힐지도 모른다. 그가 가는 길은 해골로 엮은 묵주처럼 인간을 꿰뚫고 지나가는
붉은 줄이다. 나는 붉은 줄을 따라가는데, 비록 내 두개골을 깨뜨리고 때려 부수더라도
세상의 모든 현상 가운데 오직 그것만이 내 관심을 끈다.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나는
필연성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우리들은 인간의 한계점 내에서 일하고 의무를 수행해 나가도록 하자. 언저리에 이르면
입을 벌린 심연이 무서워 피가 얼어붙을지도 모르므로. 우리들은 한계점을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언저리에는 세상을 불어 사라지게 하는 위대한 마술사인 붓다가 차분하면서도 독을 품은 미소를
머금고 서서 기다린다. 하지만 우리들은 세상이 사라지기를 바라지 않고, 그리스도가
세상을 어깨에 메고 천국으로 옮겨 놓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우리들은 그것이 여기에서
우리들과 함께 살고 투쟁하기를 원한다. 우리들은 도예가가 진흙을 사랑하고 탐하듯 세상을
사랑한다. 우리들에게는 가지고 일할 다른 재료가 없고, 씨 뿌려 거둘 혼돈 말고는 단단한
다른 밭이 없다.